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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열사 등 애국지사들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에 항일독립운동가 및 양민 살해에 앞장선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묻혀 있어 '뒤틀린 역사'를 실감하게 하고 있다.

익히 알려진 바처럼 백범의 어머니 곽락원(1856-1939) 여사와 백범의 큰 아들 김인(1918-1945) 선생은 백범의 암살범 안두희가 암살 배후로 지목한 고 김창룡 전 육군특무부대장(1920-1956)과 불과 수백여 미터 거리를 두고 함께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곽 여사의 경우 자식을 살해한 '가해자'와 같은 묫자리에 함께 묻혀 있는 셈이다.

김창룡의 묘는 국군기무사령부 주관으로 98년 2월 대전 국립묘지 장군묘역으로 이장됐고, 곽 여사와 김인 선생은 이듬해 4월 이곳 애국지사 2묘역으로 옮겨왔다.

김 전 특무부대장은 함경남도 영흥 태생으로, 일제시대 관동군 헌병대 정보원,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원,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 육군특무부대장 등을 지냈으며 지난 1992년 안두희가 김구 선생 암살때 '실질적 지령'을 내린 인물로 지목됐었다.

이와 관련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보2과)는 2000년 1월, '대전형무소 학살사건'을 공론화시킨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와의 면담 과정에서 "(전쟁 당시 양민학살은) 전부 김창룡(당시 육본본부 정보국 4과장)이 한 것이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다른 한편 백범 어머니 곽 여사는 아들 김구선생의 옥바라지뿐만 아니라 일찍 세상을 여읜 며느리를 대신해 백범의 아들인 두 손자를 기르다 중국 중경에서 타계했다. 백범의 맏아들 김씨도 중국 상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벌이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5년 3월 타계했다.

대전 국립묘지 장군묘역에는 김창룡 중장 외에 유학성 전 의원(1927-1997, 육군대장)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유 전 의원은 12.12 당시 수경사 30경비단 모임에 참석한 12.12 핵심인물로 이 사건과 관련, 군형법상 반란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병세가 악화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돼 있던 상태에서 숨졌다.

국립묘지령 제3조는 전역 및 퇴역한 예비역 대상자 중 '금고 이상의 형을 받고 집행유예중에 있는 자' 등 결격사유가 있는 경우 국립묘지 안장을 불허하고 있으나 당시 국방부는 '형 확정전 무죄추정'과 '피고인 사망시 공소기각'이라는 법리를 내세워 유 전의원의 국립묘지 안장을 허용했다.

유 전 의원의 국립묘지 안장은 12.12 사건 등에 대한 역사 청산 작업이 추진되던 시기여서 시민단체가 반발하는 등 논란이 일었었다.

▲국립묘지 이단자들. 왼쪽부터 김창룡, 유학성, 오제도의 묘 ⓒ 오마이뉴스 심규상

애국지사 1묘역과 마주보고 있는 국가유공자묘역에는 오제도 검사(1917-2001)가 안장돼 있다.

오 검사는 한국전쟁 직전 전향 좌익인사들을 한데 묶어 집단학살의 빌미를 줬던 '보도연맹'을 주도해 만들었다. 이 단체에 "대한민국 정부가 보호해준다"는 약속으로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전국에서 33만여 명이 가입했으나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이들을 일제히 총살했다.

오 검사는 한국전쟁 때는 부역자를 가리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총지휘관'을 맡았는데 당시 김창룡 씨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이었다. 오 검사는 56년 '진보당사건'에선 당시 조봉암 진보당 당수의 사형선고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 때의 대표적 '정치재판'이자 '사법살인'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여인철 지부장(48)은 "국립묘지는 애국애족 정신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한 곳"이라며 "이들은 과거청산 없는 역사적 한계로 인해 법적으로 흠이 없을지 몰라도, 민족사적 양심을 잣대로 평가할 때 절대 국립묘지에 묻혀서는 안되는 인물들"이라고 말했다.

국립묘지 안장자격은 △순직·전사자 △장례가 국장·국민장으로 치러진 자 △전역장군·20년이상 군복무자 △애국지사·상이군경·무공수훈자 가운데 금고 이상의 형을 받지 않은 자 △기타 국가에 공이 현저한 사람에 한하고 있다. 오 검사는 국민훈장무궁화장, 국민훈장모란장, 을지무공훈장 등을 받아 검사 신분으로는 유일하게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정보원'의 비문

▲ 대전 국립묘지에 서 있는 김창룡 비문(위)과 백범 맏아들 김인 선생 비문(아래) ⓒ 오마이뉴스 심규상
불과 수백여 미터 사이를 두고 마주한 백범의 맏아들 김인 선생(1918-1945)과 백범의 암살 배후 혐의를 받고 있는 김창룡 전 육군중장(1920-1956)은 일제치하에서 똑같은 정보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김창룡이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기 위해 정보원을 한 반면 김인 선생은 일본군 점령지인 상해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한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

따라서 김인 선생은 1939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일하지만 김창룡은 1940년 일본 관동군 헌병대 오장(하사급 분대장)에 올라 헌병대 정보원으로 일한다.

김인 선생은 해방의 순간을 보지 못하고 45년 3월 타계하나 김창룡은 해방 2년 뒤 육군사관학교(3기생) 소위에 임관한다. 김창룡은 이후 1949년 백범 암살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한국전쟁시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과 육군본부정보국에서 일하면서 양민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인 선생이 1936년 독립군 특무대 예비군훈련소 감독관으로 일한 반면 김창룡은 1951년 육군 특무부대장을 맡았다. 지난 역사속에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은 현재 대전 국립묘지에 같이 누워 있다.

두 사람의 비문에는 각각 이렇게 새겨져 있다.

육군중장 김창룡

피흘려 도로 찾은 자유와 평화
금수강산에 골고루 심어주자
나라의 방패되어 청춘을 바친
한겨레는 한겨레 한 목숨이다.
지키자 나의조국 슬기로운 맹호부대
정의의 선봉대다 우리 육군특무부대

'육군특무대가중에서,

애국지사 김 인

우리는 반역자!
현실과 타협을 거부하는 무리외다
우리는 혁명가!
정의를 우리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외다.
그리고 우리는 선구자!
선구자인 까닭에 어느 때 어느곳에서든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압니다

-자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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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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