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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영장이 집행돼 특별검사실에서 성동구치소로 향하는 이형택 씨. ⓒ 오마이뉴스 이종호
'대통령 처조카' 이형택 씨(60)가 1일밤 마침내 구속됐다.

이형택 씨(이하 존칭 생략)의 공식 직책은 '예금보험공사 전무'였다. 그러나 이 공식 직책은 이른바 '이형택 게이트'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없다. '이형택 게이트'의 본질을 규명하는 '키워드'는 '대통령의 처조카'라는 비공식 직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형택 씨가 '대통령의 처조카'가 아니었다면, 청와대 경제수석·국정원 2차장·해군 참모총장이 공직사회의 서열상 '까마득히 아래에 있는' 일개 정부 산하기관 임원의 청탁과 로비에 휘둘렸겠는가.

여기서 잠시 '대통령 처조카' 이형택 씨의 신상명세를 살펴보자.

1942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형택은 전형적인 금융인이다. 집안 분위기부터 그랬거니와, 그는 한국증권업협회 회장과 한신증권 사장을 지낸 이강호 씨(작고)의 차남이다. 이형택은 나중에는 서울은행장을 역임한 심병식 씨(작고)의 사위가 되기도 한다. 이강호 씨는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의 첫째 오빠. 두 사람은 대한민국 의사면허번호 4호 소지자인 이용기 씨(작고)의 6남2녀 중 장남과 장녀이다.

이형택은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하고 27세가 되던 1969년 상업은행에 취직하면서 금융계에 입문한다. 서울은행으로 옮겼던 그가 동화은행 창립멤버로 합류한 것은 1989년.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주변에서 "겸손하고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던 '평범한 은행원'이었다. 그러나 역대 집권세력의 미움을 받던 정치인 김대중 씨의 처조카라는 현실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두 차례나 '변두리 지점'으로 발령을 받는 불이익(?)을 당한 것과 19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의 김대중 비자금 폭로사건 때 비자금 관리자로 지목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1996년 동화은행 본점에 복귀해 총무팀장, 영업부장으로 활동하던 이형택의 인생에 대전환의 계기가 온 것은 이듬해인 1997년. '고모부'인 김대중 씨가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프레시안> 박태견 기자의 표현에 의하면 '미운 오리새끼'가 하루아침에 '백조'로 변신한 셈이다. 실제로 이형택은 그 직후 영업1본부장, 이사대우로 고속 승진한다. 덩달아 영업실적도 급신장 했는데, 혼자서 수신고를 1조원이나 넘겨서 동화은행 랭킹 1위를 기록한 것이다.

이형택이 대통령의 친인척으로서 언론의 각별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동화은행 퇴출로 일자리를 잃고 6개월간 쉬다가 1999년 1월 전격적으로 예금보험공사 전무에 임명되면서부터였다. 부실 금융기관을 총괄하는 정부 산하기구인 예금보험공사의 핵심 간부직에 퇴출된 은행의 임원 출신이 임명된 것은 특혜라는 비난이 일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사실 '이형택 게이트'의 비극은 이미 이때부터 잉태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일각에선 김대중 비자금 관리자로 지목까지 됐던 그가 예금보험공사의 전무로 취임한 것을 두고 "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든 자살 행위…언젠가는 대형 사고가 터지고 말 것"이라는 우려와 경고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리고 3년만에 그 우려와 경고는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

▲ 이형택 씨는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첫째 오빠의 차남이다. 1979년 동교동 자택에서 연금 날짜를 표시한 달력 앞에 나란히 선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이형택의 범죄 혐의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은 이미 언론에 자세히 보도됐으므로 여기선 재론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형택 게이트'가 대통령 친인척 '권력형 비리'의 한 전형임이 명백하다는 사실과 김대중 대통령 역시 역대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친인척 관리에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많은 국민들은 의혹의 눈길을 보내며 이렇게 묻고 있다.

"'처조카'가 저 정도라면, '아들'은 어느 정도일까?"

사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현철 씨의 국정농단 등 전직 대통령들의 친인척 비리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처음부터 친인척 관리에 엄중한 태도를 보여왔으며, '국민과의 TV대화'에서도 몇 차례 이런 사실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아래에 요약해 정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직 대통령들의 친인척 비리가 현재의 상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 대통령: '조카사위' 김종필(유신정권이 끝난 뒤에야 불거진 216억원 부정축재 혐의, 정보정치와 공작정치 등 국정농단 행위).

●전두환 대통령: '부인' 이순자(새세대심장재단, 새세대육영회 설립비 명목으로 반강제적 성금 모금), '동생' 전경환(새마을운동중앙본부 기부금과 공금 76억원 횡령 및 탈세, 각종 청탁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형' 전기환('용산마피아' 통한 경찰 인사 개입, 노량진수산시장 운영권 강제교체 개입 혐의, 공금 27억원 횡령 혐의), '장인' 이규동(명성그룹 탈세혐의 배후설, 한보그룹 정태수 유착설, 동자부장관에게 LNG 기지 건설공사 한보에 달라고 청탁 혐의), '처삼촌' 이규광(이철희-장영자 7천억원대 어음사기 사건 관련 혐의), '처남' 이창석(탈세, 횡령사건으로 구속).

●노태우 대통령: '처고종사촌' 박철언('황태자'로 불리며 국정개입 혐의, 슬롯머신 업계 대부 정덕진 형제에게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처남' 김복동(예비역 장성 모임 송백회 회장으로 군 인사 개입 혐의), '동서' 금진호(경제부처와 재계에 영향력 행사 혐의, 노태우 비자금 세탁 중개 혐의로 기소), '딸' 노소영(이양호 씨 부인의 공군참모총장 인사청탁 뇌물수수 혐의).

●김영삼 대통령: '차남' 김현철(청와대, 안기부 장악하고 정부관료 인사권 개입,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 공천권 좌지우지, 두양그룹·대호건설 등 6개 업체로부터 이권청탁과 함께 65억원 수수 혐의로 구속).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의 '큰 과오'와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작은 과오' 운운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면, 그것은 온당치 못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차별성이 도덕성이고, 친인척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는 약속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 또한 남달리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형택 게이트'가 드러나면서 결과적으로 김 대통령은 대국민 약속을 위반한 셈이 됐다. 누가 어떤 비난을 하더라도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제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형택 게이트'가 가뜩이나 불안한 현 정부의 레임덕 현상을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권 초기 '하나회'의 숨통을 끊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아들의 비리가 사실로 드러나면서부터 맥을 못 추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대통령 친인척의 '권력형 비리'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한국적 정치풍토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상황에서 공식적인 보좌 시스템보다 비공식 라인이 더 잘 통할 때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역대 정권에서 대통령의 친인척은 정경유착의 '핫라인'이자 음험한 뒷거래의 '습지대'로 기능해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TV 드라마 <상도>에서도 그런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제왕'이 통치하던 조선시대 말기에 의주 상인 임상옥은 순조의 외숙부이자 호조판서인 박종경에게 5천냥 짜리 어음을 바치고 인삼무역 독점권을 따낸다. 이것이 임상옥이 '조선 제일의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드라마 <상도>와 그 원작인 소설 <상도>에선 '5천냥 짜리 어음'을 '백지수표'로 설정하는 한편 이 행위를 신비스럽게(?) 처리했지만, 냉정하게 보면 '최고통치자의 친인척에게 뇌물을 주고 이권을 따낸 부정비리와 정경유착'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용호 게이트'의 핵심 관련자이자 '조폭' 두목으로 알려진 여운환 씨가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씨(민주당 의원)와 접촉하고, 이용호 씨가 방송사 간부를 통해 차남인 김홍업 씨(아태재단 부이사장)에게 접근했던 것도 바로 이런 '유구한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왜곡된 관습'은 삼성그룹, 현대그룹, 대우그룹의 총수인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씨 등 '별 탈 없이 성공한 기업인'이나 명성그룹 총수 김철호 씨처럼 '탈이 생겨 실패한 기업인'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기도 하다.

▲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에게 통렬한 반성과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야당 시절인 1987년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아 유족들과 부둥켜 안고 통곡하는 김대중 대통령.
그렇다면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전통과 관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최고통치자 친인척의 호가호위(狐假虎威)와 발호(跋扈)를 초기부터 근절할 수 있는 법률적·제도적 시스템의 정립과 개선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 조선시대의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과 '부마불임(附馬不任)의 원칙'은 좋은 전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분경(奔競)'은 벼슬을 얻거나 빠른 승진을 위해 제왕의 친족이나 고관을 찾아 로비하는 행태를 말하는데, 조선의 국가적 기틀을 세웠던 태종은 '분경금지법'을 제정한 바 있다. '부마불임의 원칙'은 왕족, 종친, 부원군, 부마 등 제왕의 친인척은 고위 관직이나 공직을 갖지 못하게 한 전통이다. 절대권력자의 친인척이 공직에 있으면 설혹 미관말직일망정 아첨배들이 몰려들고 이권청탁이 따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 때문에 이런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 친인척 부당행위 금지법' 등의 법률 제정을 약속한 바 있으나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상태다. 아울러 대통령 친인척 관리를 담당하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이 김홍일 의원의 보좌관 출신이라는 점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 거의 모두가 친인척 문제로 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던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김 대통령이 겪고 있는 최근의 사태는 자업자득의 측면이 크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김 대통령은 장남인 김홍일 의원의 정계은퇴를 포함한 강력한 조치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책임이 있다.

물론 아무리 대통령 아들이라도 의혹이 제기된다는 이유만으로 정계를 은퇴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 집권세력이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지금은 국민에게 읍참마속(泣斬馬謖)보다도 더 강력한 반성과 개혁의 의지를 보여줄 때이다.

아울러 어떤 좋은 제도가 완비돼 있더라도 통치자 본인의 강력한 의지와 실천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 대통령 친인척의 부정과 비리가 발생할 경우 강력한 처벌을 통해 일벌백계를 할 때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정농단과 부정비리로 법원에서까지 중형을 선고받은 김현철 씨를 대통령의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면·복권시킨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법질서의 문란을 자초한 김 대통령이 대오각성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최근 대통령 친인척 문제를 다루는 언론의 보도행태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몇 가지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이건 정말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친인척 관리를 철저히 잘 했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일부 언론은 그것을 현재의 사태와 연결하면서 현 정부를 '헌정사상 최고로 부패한 정부'라느니 '헌정사상 최대의 친인척 비리'라는 식으로 여론을 유도하기도 했다.

▲ 최근 나오는 '박정희의 철저한 친인척 관리 신화'는 김정렴 전 비서실장의 작품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녀 및 측근과 함께 한 운명의 사진. (오른쪽부터) 정승화, 김정렴, 차지철, 전두환 씨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은 친인척 관리에 엄격했다"는 주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던 김정렴 씨의 회고록 <아, 박정희>를 근거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언론이 이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한 마디로 '조작된 신화(神話)'에 불과하거니와, 지금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를 꼼꼼하게 살펴보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우선 '친인척 관리에 너무나 철저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조카사위' 김종필 씨(JP)를 권력의 2인자(중앙정보부장, 공화당 의장, 국무총리)로 특별 대우했다.(JP의 부인 박영옥 씨는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의 장녀.) '처삼촌' 대통령을 등에 업은 JP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공작정치의 원조가 되었으며,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며 정치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부도덕한 횡령사건(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빠찡고사건 등 4대의혹사건)을 저지른 장본인으로 지목됐으며, 굴욕적인 한일협상을 주도하면서 국민을 속이고 일본 외상 오히라와 비밀각서를 교환했다.

물론 박 전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JP는 대통령의 '청렴결백'한 친인척이었다. 그러나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자마자 JP가 저지른 '부정축재'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났거니와, 5·17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 세력이 발표한 '권력형 부정축재자' 명단에서 주요 인물과 그들이 착복한 액수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1위: 김종필(전 국무총리) 216억원
● 2위: 이후락(전 대통령 비서실장·중앙정보부장) 194억원
● 6위: 박종규(전 청와대 경호실장) 77억원

22년 전의 216억원은 현재 시가로 따지면 수 천억원에 해당하거니와,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JP는 권력의 핵심부에 있을 때 서산농장, 제주감귤농장 등 1백억원 대가 넘는 엄청난 부동산을 챙겼을 뿐만 아니라 3백 돈쭝 무게의 순금제 무사 칼과 50 돈쭝 금송아지 두 마리가 가택수사 과정에서 발견됐다는 발표도 있었다.(이와 관련, JP는 운정장학회 설립을 통해 부동산을 사회에 환원했다고 해명하는 한편 자신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희생양'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당시 부정축재자 명단 발표를 전후해 이후락 씨는 그 유명한 '떡고물론'을 제기해 평범한 시민들을 분노케 했다. "떡을 주무르다 보니 떡고물이 조금 떨어졌을 뿐"이라는 것이 바로 그 발언의 요지. 이 씨의 발언을 두고 시중에서는 "떡이 얼마나 컸기에 떡고물이 그 정도였겠느냐"는 냉소 섞인 뒷말이 돌기도 했다. 특히 이후락 씨는 "어떤 사람은 (부정축재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고 하는데, 한 마디로 우습다"고 반박, JP를 겨냥하기도 했다. 결국 '떡'을 주무른 것은 박정희 대통령과 그 친인척인 JP였고, 자신은 '떡고물'만 조금 주워먹었다는 변명이다.

▲ 김종필 씨와 부인 박영옥 씨(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가 외손자들과 함께 한 모습. 대통령의 '조카사위' 김종필 씨의 부정축재와 국정농단은 대통령 친인척 비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친인척의 청와대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를 거론할 때마다 전설처럼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조작된 신화'에 불과하다. 동아일보가 1986년 발행한 <박정희 정권 18년-그 권력의 내막> 255쪽을 보면, JP의 부인이자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인 박영옥 씨가 얼마나 자주 청와대를 출입했는지 알 수 있다.

"부군인 김종필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할 때면 박영옥은 곧잘 청와대로 숙모인 육 여사를 찾아가 하소연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뒤 친인척들이 정부기관이나 기업체에서 일자리를 얻은 경우도 셀 수 없이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만 보면 다음과 같다.(객관성과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작고한 뒤에 얻은 직위는 생략.)

'장조카' 박재홍(1969년 포항제철 비서실 근무-1973년 동양철관 사장 취임) '조카' 박준홍(국토통일원 근무, 무임소장관실 근무, 대한축구협회 회장 취임) '처형' 육인순(1963년 서울특별시 시립부녀사업관 관장 임명).

물론 이들의 '운 좋은 취직'은 대통령의 지시나 알선에 의한 '특혜'의 결과였다. 더욱이 이들은 그렇게 얻은 직책을 발판으로 삼아 국회의원과 사립학교 이사장 등으로 승승장구한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된 친인척도 있다. '처남' 육인수 씨와 '동서' 조태호 씨가 대표적이다.

'처남' 육인수 씨는 만주에서 전기회사에 근무하다 해방 이후 귀국한 뒤 진명여고 등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평범한 교사였다. "5·16이 없었고 '매부'가 대통령이 안 되었다면 육인수는 아마도 평생을 교직으로 지냈을지도 모른다."(앞의 책, 264쪽) 그런 그가 1963년 공화당(총재 박정희)의 공천을 받아 고향인 옥천·보은에서 6대 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이후 내리 5선을 한 그는 국회 문공위원장, 공화당 중앙위의장 등 요직에까지 오르며 '숨은 실세'로 군림한다.

"대통령의 유일한 손위 처남으로서 그의 발언권은 은연중에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와 당 안에서도 거의 모든 사람이 한몫 놓고 그를 대했다."(앞의 책, 265쪽)

'동서' 조태호 씨는 1961년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대 총무과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동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학교 직원의 신분을 버리고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 이사를 거쳐 MBC 이사로 옮긴다. 그러나 방송국 이사로 근무하다 사장과 싸움을 벌이고 MBC를 떠난다. 그런데 그의 막혔던 인생은 또다시 술술 풀린다. "한동안 별로 하는 일 없이 지내다가"(앞의 책, 266쪽) 1972년 전격적으로 상공부 산하기업인 디자인포장센터 이사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그 '신비스런 인생유전'의 비결은 먼 데 있지 않았다. "처형 육영수가 당시의 상공부장관인 이낙선에 부탁하여 주선"(앞의 책, 266쪽)한 결과였던 것이다.

인생지사 새옹지마의 가장 드라마틱한 사례는 아마도 대통령의 '조카' 박재석, 재호 씨 형제의 '꿈같은 인생유전'일 것이다. '친인척 관리에 너무나 철저했던' 대통령 '삼촌'의 은혜 덕분에 구미에서 '연필 장사'를 하던 박재석 씨는 어느 날 갑자기 '국제전기기업 회장'이 됐고, 벽돌공장에서 일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박재호 씨는 '동양육운 회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앞의 책, 252쪽)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항소이유서에는 박근혜, 박지만 씨 등 대통령의 '자녀'들과 관련된 추문도 소개돼 있지만, 불행하게 작고한 전직 대통령 가족의 최소한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하여 자세한 언급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것이 대통령 '아버지'의 복잡한 사생활 등 '건전하지 못한 수신(修身)'과 관련된 '불행한 제가(齊家)'의 소산임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제가'는커녕 '수신'도 제대로 하지 못한 통치자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아직까지도 한국의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은 '철저했던 친인척 관리' 운운하며 박정희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만만세!(修身齊家治國平天下 萬萬歲)'를 외치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왔다.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이 김대중 대통령의 '부실한 친인척 관리'를 질타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하다. 우리 국민은 그들에게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철저한 친인척 관리' 운운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비교하는 식으로 보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무엇보다 먼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그나마 우리가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며 주목해야 하는 것은 대통령 친인척 관리 문제와 관련해 사회적 조건과 정치적 상황이 조금씩이나마 전향적으로 변화해 왔다는 점이 아닐까. 설사 그것이 작더라도 긍정적 측면이 있다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때 '생산적 논쟁'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첫째, 권력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작년 12월 11일 차정일 특별검사가 임명되면서 '이형택 게이트'의 진상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 정권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거니와, 이제는 아무리 최고통치권자라도 '성역 없는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는 국민 여론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라"는 격언이 있다. 박정희 정권은 공작정치와 언론통제 등을 총동원한 억압적인 철권통치를 통해 권부의 부패와 비리에 대한 국민의 알권리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친인척 관리와 관련해 지금까지 일부 인사와 언론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신화의 보호벽 속에서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통령 친인척 관리의 대안을 엉뚱하게 '뒤틀린 과거'에서 찾으려는 '총통제 복고주의자'들의 자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둘째, 언론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이형택 게이트'의 진상이 밝혀지기까지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언론은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사실 언론의 사명은 '감시견(Watch dog)'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데 있다. 권력이 부패하면 어떤 희생이라도 각오하고 서슴없이 짖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언론)'가 '도둑(부패권력)'을 발견하면 사납게 짖어야 '주인(국민)'은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박정희 정권 당시 언론은 짓지 않거나 혹은 짖지 못했다. 아니 그들은 도리어 '주인'을 배신하고 '도둑'의 '개'가 되었다. '철저히 침묵'(박동선 게이트 당시 외신에선 난리 피웠지만 국내 언론은 '꿀 먹은 벙어리'로 일관), '꼬리 치면서 알아서 기기'(언론검열 조치가 포함된 유신쿠데타를 '구국의 영단'으로 찬양한 조선일보가 대표적), '권언유착'(정권의 특혜 속에 헐값으로 일본에서 차관 들여다가 호텔 지은 조선일보가 대표적) 등이 당시 그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었다. 언론은 스스로 국민의 알권리를 철저하게 유린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거듭나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언론은 자유롭고 철저하게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사명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이번 사건을 계기로 친인척, 즉 족벌 시스템의 해체를 전 사회적 의제로 확산시켜야 한다.

'이형택 게이트'의 본질은 '이형택'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이형택'식의 의식과 시스템이 문제다. 다시 말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특히 지배층과 특권층(자칭 사회지도층)을 철저하게 감싸고 있는 전근대적 의식과 시스템을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보스 1인이 조폭식으로 운영하는 기존의 정당체제는 물론이고 족벌기업(소유와 경영을 독점하고 세습하는 재벌), 족벌종교(아들에게 목사직을 세습하는 기업형 종교집단), 족벌교육(부패와 비리로 썩어문드러져 가면서도 제도개선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사학재단), 족벌언론(사주의 탈세행위를 비호하기 위해 지면을 사유화하는 족벌신문)을 해체하는 것만이 그 대안이다.

물론 국민들의 의식개혁도 동시에 진행돼야만 할 것이다. '도둑'을 섬기는 '개'의 세상을 만든 데에는 못난 '주인'의 책임도 크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형택 게이트'에서 얻어야 할 가장 큰 교훈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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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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