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구랍 29일, 막내 여동생 결혼식에 가고자 길을 나섰는데, 눈이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경춘가도에 함박눈이 내려 차량들이 오도가도 못한 채 멈춰서 있었습니다. 그러잖아도 인천에서 가평은 먼 거리여서 서둘러 나선 길이었는데.

"얼마나 큰 부자가 되려구 이렇게 함박눈이 쏟아지나…."

내 말에 처는 "그러게 말이야"하고 맞장구를 칩니다. 막내 여동생 성미는 두 아이를 낳고 살다가 늦은 결혼식을 올리는 것인데 이렇게 눈이 내려 벌써 몇 시간을 버스 안에서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평소 10분이면 갈 거리를 한 시간이 넘게 걸리니, 이내 제 시간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차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것으로 급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데……. 문, 득,

'그래, 그 해 겨울에도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렸더랬지…'

하는, 눈 내리는 대성리 강물 위로, 마치 플라이 낚시로 건져 올린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기억이 뛰어오릅니다.

'… 1990년 …, 1월….'

청평에 내리자 세 시가 넘었습니다. 이미 결혼식을 시작할 시각이 지난 겁니다. 청평에서 설악면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지체로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하고. 그래도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으로 처,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눈은 여전히 쏟아지는데 택시운전사는 신이 났습니다. 급한 마음에 재촉을 할까 하다가는 그만두었습니다.

택시는 청평댐 아래로 새로 난 다리를 건너 호반을 끼고 이미 얼음이 깔린 길을 엉거주춤 달립니다. 그 때도 하얀 융단 같은 눈이 제대병의 귀향 길을 반겨줬지요.

"이 후미진 골짜기에도 러브호텔이 들어섰네……."

택시운전사의 혀차는 소리에 둘러보니 눈발은 많이 가늘어졌습니다. 설악 읍내에 도착했을 때는 결혼식은 끝나고 폐백을 드리고 있었지요. 폐백을 드리고 있는 여동생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내려와 역시 눈 때문에 늦은 큰형, 아직 남아 있는 친지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 여섯째 차를 얻어 타고 집을 향했습니다.

'12년 전엔 눈 때문에 버스가 끊겨 설악부터 집까지 걸어서 갔었는데. 작은 전역 보따리를 둘러메고….'

그 땐 아직 굽은 신작로에 포장이 되지 않았었어요. 군화에 두꺼운 눈 밟히는 감촉 오드득거리고, 그 소리 조용한 온통 하얀 산골짝을 떨림으로 메아리지게 해서 가끔씩 잣나무 가지에 쌓인 눈을 털며 멧새들 날아올랐었지요. 그 길에서 노래 하나를 얻었었지요. 멧새들 지저귀는 소리 들으며 어느새 흥얼거리기 시작한 멜로디가 노래가 된 셈입니다.

다섯째 며느리와 손주(자)를 맞이하시며 함박웃음 짓는 주름 깊어진 당신들은 열두 해 전보다 얼마나 늙으신 건지……. 이태 전 모두 헐고 조립식으로 지었지만 열두 해 전에는 아직 초가집이었던 안채가 남아있었지요. 훗날 제대해서 집으로 돌아온 날 밤의 기억을

    새벽은
    아비의 바튼 기침으로
    깨어났다
    처마에서 밤새도록
    바람에 서걱이던 고드름처럼
    뒤척이던
    어미는 기침 소리에
    다시 돌아눕고

    …(하략)…

라고 썼더랬는데….




<아버지의 땅>

1. 언제 이 들판에 새 봄이 와서 논을 풀고 밭을 엎을까
산골짝 얼음짱이 녹아 실개천 봇물이 넘쳐흘러
어머니 긴 한숨 같은 바람만 차게 불고
아버지 깊은 근심살처럼 흰 눈이 쌓이는데
언제 이 들판에 새 봄이 와서 논을 풀고 밭을 엎을까

2. 언제 이 들판에 단비가 내려 모를 내고 곡식 심을까
천둥지기 물을 대서 모를 심고 텃밭 일궈 씨를 뿌릴까
어머니 마른기침처럼 흙먼지 자욱하고
아버지 거친 손바닥처럼 갈라진 논바닥에
언제 이 들판에 단비가 내려 모를 내고 곡식 심을까


= 1990. 1.


※ 단순하게 PC에 의존해서 만든 MIDI 음악은 그 자체로 표현상의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는 만든 사람의 역량상의 한계가 먼저입니다만.) 그리고 컴퓨터에 내장된 사운드 카드의 질에 따라서 상이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양질의 MIDI 사운드를 즐기시려면 어느 정도의 투자가 필요합니다. ^,.^=
※ 하루 빨리 mp3 등의 보다 안정적인 매체로 만들어 전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동지의 보름달이 눈 내린 정경을 밝게 내리 비춰 더욱 시리고 푸르른 고향집의 밤, 12년 전 어느 밤처럼 그 날 저녁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2년쯤을 '풍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만, 세월 속에 묻혀 잊었던, 예제를 떠돌면서 악보조차 남지 않은 노래의 가락과 노랫말을 애써 떠올렸습니다.

다시 불러보니 이 노래엔 쓸쓸한 서정이 짙게 녹아 있군요. 돌이켜 생각컨대 눈 내린 고향집의 정경과 기울어 가는 고향(농촌), 그리고 이제 막 군에서 제대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심정까지 겹쳐졌던 모양입니다. 뒤척거리는 밤의 표정이 보입니다.

이 날로부터 열 하루쯤 후의 일이지만 그 눈이 내리는 평화롭고 고적한 시간에 지배자들은 밀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지요. 바로 '보수대연합'이라고 했던 3당 합당이 그것이었습니다. 더구나 3당합당이 이루어지던 날 다른 한편에서는 함박눈과 함박눈보다 더 함박스럽게 날리는 최루탄을 맞으면서 전노협 결성ㅡ이라는 역사적 사건ㅡ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요. (이 날의 일은 별도로 쓸 기회를 만들겠습니다.)

그 황량한 겨울, '모순된 눈'의 풍경이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무뎌질 만도 한데…. 소박하게, 말뜻 그대로 소박하게 제대해서 학교를 마치고 부모형제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던 젊음의 앞날에 긴 '그림자'의 복선을 깔았으니까요. (계속)


덧붙이는 글 | redclef.net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