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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전세계를 누비며 '세계경영'의 웅지를 펼치던 김우중은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현상금 걸린 범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진은 지난 2월 23일 김우중 체포결사대가 파리로 떠나기 직전 김포공항 제1청사에서 출국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이종호


<상도>는 MBC 창사 40주년을 기념해 50부작으로 만든 대하드라마의 제목이다. 상도(商道)? 그 의미를 풀어 보면, '상인철학'(혹은 상업철학)이 될 터인데, 그 '철학이 있는 상인'의 실제 모델은 조선 후기의 거부(巨富) 임상옥(1779∼1855)이다.

드라마 <상도>는 두 가지 점에서 흥행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선 작년 '<허준>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이병훈 PD와 최완규 작가가 이 드라마 제작을 위해 다시 손을 잡았다. 물론 인기작가 최인호(57)의 베스트셀러인 같은 제목의 소설이 이 드라마의 원작이라는 점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흥행의 요인이다.


임상옥과 최인호

19세기 조선 최고의 부자를 20세기 남한 최고의 작가가 그린 셈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과거의 부자' 임상옥을 연상케 하는 '현재의 부자'가 등장한다. '자전거에서 시작해 세계 굴지의 자동차 브랜드를 꿈꾸다 시험운행 중 그 자동차 안에서 장렬하게 죽어간 기평그룹 총수 김기섭 회장'으로 묘사된 허구의 인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나는 최인호가 소설 <상도>를 통해 창조한 캐릭터인 '임상옥'과 '김기섭'의 모습에서 전 대우 회장 김우중(66)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우중과 최인호

이번에는 20세기 남한 최고의 부자와 최고의 작가가 만난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1996년 12월 12일부터 1997년 1월 9일까지 유럽, 러시아, 동남아시아 등 14개국을 함께 여행했다. 그리고 최인호는 국내로 돌아와 대우전자 광고모델로 나서기까지 했다. 특히 최인호는 각종 인터뷰를 통해 김우중과의 해외여행에서 큰 감동을 받았으며 그에게 완전히 매료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김우중과 임상옥

결국 작가 최인호를 매개로 약 2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의 무역왕' 김우중과 '과거의 무역왕' 임상옥이 조우한 것이거니와, 최근 예금보험공사가 1400억원 상당의 은닉재산을 공개하면서 또다시 뉴스의 인물로 떠오른 김우중을 임상옥과 비교연구를 통해 분석해 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1)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성공한 장사꾼이 됐다

[임상옥] '무역왕' '인삼왕' 등의 애칭을 가지고 있는 임상옥은 전주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임봉핵을 따라 당시 국경무역의 전진기지 중 한 곳인 의주에서 주로 활동했다. 기지와 계략이 뛰어났던 그는 31세가 되던 해에 인삼무역 독점권을 확보하고 40대에는 변무사 수행원으로 청나라와 인삼을 거래하면서 당대의 거부가 되었다.

임상옥의 아버지 임봉핵은 인삼 보따리를 메고 북경에 갔다가 비단을 사가지고 서울로 돌아와서 되팔아 이문을 남기는 장사꾼이었다. 드라마 <상도>에서 그는 아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들려준다.

"북경행 사신을 수행하는 장사에 이문이 많단다."

그런데 어느 날 임봉핵이 뜻밖의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소설에선 물에 빠져죽는 것으로, 드라마에선 참형 당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남은 가족은 엄청난 빚더미에 올랐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임상옥은 온 몸을 던져 더 열심히 일해야 했고, 힘들 때마다 입술을 깨물면서 "나도 돈을 모아 반드시 거상이 되고 거부가 되고 말 테다"라고 결심한다.

[김우중] 김우중의 아버지 김용하는 제주도 출신이지만 학교와 직장 때문에 평양, 동경, 서울, 경성(함북), 대구 등을 전전했다. 1936년 김우중이 태어나던 당시 아버지 김용하는 대구사범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재벌과 가벌>(서울경제신문, 1991)이란 책에는 아버지 김용하가 어린 아들 김우중에게 자주 해주었던 말이 소개되어 있다.

"너는 커서 장사를 해라."

아버지 김용하는 교육자 집안의 인텔리 분위기에서 자란 5남1녀의 자녀들에게 교육자, 법률가, 학자, 의사 같은 직업을 권했지만 유독 4남 우중에게만은 장사를 권했던 것이다. 이런 말을 자주 듣고 자란 김우중은 어렸을 적부터 막연하나마 '어른이 되면 장사를 해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자랐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 김용하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면서 남은 가족은 어려움에 처한다.(김우중이 한때 대북사업에 적극적이었던 것도 아버지의 북행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어린 김우중은 신문팔이, 냉차장사, 열무장사 등을 하며 고학을 했다고 한다. 그때 고생하던 그는 이를 악물고 반드시 큰돈을 벌겠다는 결심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우중의 어린 시절과 관련한 보도기사를 찾다 보니 사실과 다른 것이 의외로 많이 발견됐다. 특히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생 때부터 신문팔이 등으로 가문과 동생들을 돌보았으며 교통비를 아껴 책을 사보며 고학했다"는 대목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문팔이 등으로 고학을 하면서 사업감각을 터득했다"고 마치 '위인전 쓰듯이' 보도한 언론도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했듯이 김우중은 5남1녀 중 4남이다. 실례로 서강대 교수, 아주대 총장으로 있다가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까지 지낸 김덕중이 그의 둘째형이다. 따라서 '장남으로 어린 동생 돌보며 고학' 운운한 일부 언론의 보도는 '김우중 성공신화'를 보다 극적으로 보이게 하려다 보니 저지르게 된 과장보도로 판단된다.)

그러나 김우중은 임상옥에 비하면 행운아였다. 실종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결정적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김우중이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사회에 막 첫발을 내딛을 무렵, 아버지의 대구사범 제자인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한 나라의 절대 권력자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이 '김우중 성공신화'의 비밀을 푸는 결정적 열쇠였음은 세상에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민주주의에는 '쿠데타'였는지 몰라도 김우중의 인생에는 '대혁명'이 된 셈이다.

70년대 초반에 박정희가 젊은 사업가 김우중을 사석에서 만나면 '우중아' 하며 얼굴을 비벼댈 정도로 귀여워했다고 하는데, 박정희에게 있어 김우중은 '사적으로' 동향의 후배이자 스승의 아들이었다. 박정희는 '공적으로도' 김우중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개발독재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펼쳐나가려면 '샐러리맨 성공신화'의 모델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우중이 5백만원의 자본금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한 1967년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막 시작되던 해였다.


(2) 미친 듯이 일했고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임상옥] 임상옥은 탈상도 하지 않은 상주의 몸으로 장삿길에 올랐다. 아버지의 병사라는 불행을 갑자기 맞아 앞길이 막막했으나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 집안을 꾸려가야만 했고 아버지가 남겨놓은 빚도 갚아야만 했다. 그는 늙은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상복도 벗지 못한 채 북경 사신의 마부로 따라나섰다.

국경무역의 길은 멀고도 험했지만, 임상옥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대하실록 '재벌25시' 제5권 <거부들의 축재행진과 인생 파노라마>(동광출판사, 1985)에는 임상옥의 험난했던 장삿길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의주에서 북경까지의 2030리 길. 그것은 무척이나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압록강을 건너 120리까지는 청나라와 조선의 완충지대로서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러니 사나운 들짐승들의 위험 속에서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인지대를 벗어나면 청나라의 변경이 나타나는데 그곳은 도둑 떼가 득실거리는 무법천지였다."

임상옥은 '무인지대'와 '무법천지'를 오가면서 미친 듯이 상술을 익혀나갔다. 상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임상옥은 훤칠한 키에 용모까지 빼어난 데다 말주변도 좋아 사람을 잘 사귀었다. 북경을 수십 번 오고가는 동안에 그는 그 바닥에서 오랫동안 생활해온 노련한 선배들을 제치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김우중] 김우중은 1960년 대학(연세대 경제학과)을 졸업하지도 않은 학생 신분으로 장면 정부의 부흥부 촉탁사원으로 일했다. 그리고 정식으로 대학을 졸업한 1961년 섬유수출업체인 한성실업(대표 김용순)에 입사한다. 샐러리맨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김우중은 곧바로 동남아 시장을 누비기 시작했다.

회사원 때부터 일에 미쳐버린 김우중은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쌓은 경험과 감각을 토대로 1967년 대우실업을 세워 독립했다. 젊은 실업가 김우중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20개의 생산라인을 갖춘 섬유공장 건설을 추진하는 한편 해외지사 설립에도 나섰다.

<한국재벌연구>(매일경제, 1990)에 따르면, 그런 시도에 힘입어 1967년 58만 달러였던 수출실적이 2년 후에는 4백만 달러로 뛰어올랐다고 한다.

강준만 교수는 김우중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며 '일 중독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거니와, 그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다음은 김우중이 신입사원들에게 자주 들려줬다는 말이다.

"내가 옷을 수출하는 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옷을 팔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옷에 관한 한 나도 모르게 전문가가 됐습니다. 옷의 색감을 구별해내는 것은 미술학도보다 낫고 마감처리의 불량을 골라내는 데도 의류전문가보다 낫다는 얘기를 들어요. 미치면 안 보이던 것도 보이게 돼요."

대우그룹 회장 당시 일에 미쳐 있던 김우중의 하루 일과는 유명했는데,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새벽 5시 일어나기, 7시까지 출근하기, 30분 간격으로 사람을 바꿔 만나며 정신없이 일하기, 밤 12시를 넘겨서야 잠자리에 들기의 강행군이 바로 그것이다. 좋아하는 음식도 먹는 시간을 줄여주는 비빔밥과 설렁탕이었다고 한다.

바쁘기는 해외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세계경영'을 한창 추진하던 1996년에는 1년 365일 중 70%가 넘는 257일을 35개국을 다니면서 해외에서 보냈다. 오죽하면 수행비서가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3년마다 교체까지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와 해외여행을 함께 했던 작가 최인호는 마치 '유격훈련'을 하는 것 같았다고 토로했으며, 부인 정희자는 한 여성지와의 인터뷰에서 "결혼 20년 동안 그와 산 것은 단 6년에 불과했다"고 고백했다.


(3) 국제무역과 국가시책의 흐름에 눈치가 빨랐다

[임상옥] 임상옥 하면, 한창 국경무역을 하던 당시 북경 상인들이 불매동맹을 맺어 조선인삼의 가격하락을 유도하려고 시도하자 과감하게 인삼을 불태워 버림으로써 도리어 더 비싼 가격으로 팔게 됐다는 '기지와 계략의 일화'로 유명하다.

실제로 임상옥은 북경과 의주와 서울을 오가는 국제무역에서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터득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인삼무역권 민간인 양도라는 시대적 호기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낚아챘다. 31세 되던 해인 1810년 세도가에게 접근해 다른 다섯 명의 거상들과 함께 인삼무역 독점권을 따낸 것이다.

엄밀한 의미로 보면 특혜였지만, 일단 엄청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인삼무역 독점권을 손에 쥐면서 임상옥은 눈부신 속도로 부를 쌓아 갔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는 의주에서는 물론이고 조선 팔도의 제일 가는 부자가 됐다.

그의 명성은 청나라에서 더욱 알려졌는데, 북경에서는 '조선의 거상 임상옥'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더욱이 불혹의 나이 40세가 되자 "조선에서는 임상옥만큼 청나라의 사정에 정통한 사람이 없다"고 평가할 정도로 자타가 인정하는 '청나라 전문가'로 통하기도 했다.

[김우중] 김우중 하면, 초대형 베스트셀러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와 '세계경영'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는 이 책을 출간한 후인 1993년 '세계경영'의 경영이념을 정식으로 선포하고 5대양6대주를 누비기 시작했다.

세계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지식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기에 바빴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1997년 대우를 "해외인력 20만명 해외재산 119억 달러를 가진 개발도상국 최대의 초국적 기업"으로 평가했으며, 김우중은 동유럽 국가에서 국가원수급 예우를 받기도 했다.

<월간조선> 대표이사 사장이자 편집장이자 기자인 조갑제 등 일부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그런 김우중을 '한국판 징기즈칸'이라도 되는 것처럼 찬사를 아끼지 않기도 했다. 물론 김우중이 몰락하자 태도를 싹 바꿔 <월간조선> 11월호에 김우일 전 대우그룹 상무를 출연시켜 김우중을 '무책임한 경영으로 이윤창출에 실패한 용서받을 수 없는 경영인'으로 규정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임상옥이 인삼무역 독점권을 따내며 거부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 31세였던 것처럼, 김우중도 31세가 되던 해에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독립하면서 재벌을 향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성실업 회사원으로 동남아 시장을 누비며 주력 상품인 트리코트 원단 수출에 주력하면서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던 김우중은 직접 회사를 차렸는데, 그는 국제무역을 중시한 임상옥처럼 '내수'보다 '수출'에 주력했다.

김우중의 성공은 정부의 경제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선 섬유수출업체인 대우실업을 창업한 1967년이 공교롭게도(?) 정부가 경공업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발연도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거니와, 그의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70년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에 들어서자 중화학산업 육성정책으로 경제정책의 방향을 전환했다. 바로 그 무렵 김우중은 공교롭게도(?) 중화학산업 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1973년에 영진토건(대우건설의 전신), 동양증권(대우증권의 전신), 동남전기(대우전자의 전신)를 인수했으며, 1976년에는 한국기계(대우중공업의 전신), 1978년에는 옥포조선(대우조선의 전신),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의 전신)를 인수했다.

김우중의 대우는 그런 부실기업 인수를 통한 사업확장 전략으로 급부상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4대 재벌그룹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일종의 기업사냥에 나선 것인데, 김우중은 당시 '인수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최근 언론들이 진승현, 이용호 등 젊고 야심적인 벤처 사업가들의 기업사냥을 비판하고 있지만, 김우중은 이미 30년 전에 그런 모범을 실천한 '선배님'이었던 것이다.

김우중의 '세계경영'도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한때 대권 도전의 천기를 누설하는 바람에 평소 김우중을 마땅치 않게 보아온 김영삼마저도 대통령 재직 당시 '세계경영'을 표방한 김우중에 대해서 '세계화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4) 특혜 얻기와 인맥 관리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임상옥] 드라마와 소설 <상도>에서는 주로 임상옥을 강직하고 정직한 인물로 그리고 있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알고 보면 임상옥도 처세와 술책에 능한 여느 장사꾼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인물이다. 아니 도리어 그는 특혜나 이익을 얻기 위해 뇌물을 바치거나 편법을 저지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국경무역은 상인들이 북경 사신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철저한 몸수색 등 각종 규제가 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상옥이 소속해 있던 의주 상단만은 미리 국경을 넘는 특혜를 누렸는데, 2백년 전에도 장사꾼과 권력자의 은밀한 거래는 여전했던 모양이다.

특히 순조 시절 임상옥이 당대의 세도가인 호조판서 박종경(순조의 외삼촌)의 총애를 받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임상옥은 인삼무역 독점권을 민간에 양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권력자와 줄을 대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묘책을 강구한다. 그리고 마침 박종경이 부친 박준원 (순조의 외조부)의 상을 당하자 무조건 5천냥을 부조금으로 낸다. 그것은 전체 부조금 액수보다도 더 많은 것이었다.

박종경은 나중에 방명록을 살펴보다 깜짝 놀랐고, 임상옥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권력자와 장사꾼의 '선문답'이 오가기 시작했다. 박종경이 뜬금 없이 "남대문에 출입하는 사람이 하루에 몇 명이나 된다고 보느냐"고 묻자 임상옥은 "두 사람입니다"라고 답한다. 두 사람? 의아해진 박종경은 그 연유를 물었고, 임상옥은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는 대감에게 이익을 줄 사람과 해를 줄 사람, 즉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인삼무역 독점권을 자신에게 주면 더 큰 이익으로 보답하겠다는 말이었다. 두 사람의 오묘한 선문답이 오간 얼마 후 임상옥은 인삼무역 독점권을 따낼 수 있었다.

[김우중] 김우중이 타고난 재능과 근면성을 발휘하며 미친 듯이 일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성공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김우중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다음과 같은 오묘한 화두를 던진 바 있다.

"사업가는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으면 이 가능성을 불쏘시개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사업은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열이 되고 열이 다시 백이 되는 오묘한 계산이 가능한 세계다."

그렇다. 우리가 김우중의 성공비결을 제대로 알려면 '오묘한 계산'의 속뜻을 잘 알아야 하거니와, 정경유착의 내막을 간과한다면 결코 이문이 남는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월간조선> 11월호에 실린 기사 '대우그룹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 김우일의 양심선언'에는 대우그룹이 어떻게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전달했는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생생한 증언이 소개되어 있다.

"해외여행 때 끌고 다니는 가방에 1만원 권으로 현금 5억원이 들어갑니다. 이 정도 현금은 은행들이 바꿔주지도 않아요. 대우그룹 거래은행에 전화해서 '몇 시까지 현금 얼마 준비해 주시오' 하면 1만원 권으로 잘 포장해 놓습니다. 전달은 주로 사장단 비서나 대우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하는데, 밤늦은 시각이나 새벽에 집으로 보내거나 차 트렁크에 넣어 줍니다."

여기에는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우중이 여당 후보였던 이회창에게 20억원의 정치자금을 전달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혹시 '프러스 알파'는 없었는지 궁금해진다) 이번에는 김우중과 김영삼의 거래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자.

"1991년 무렵 김 회장(김우중)은 안산 농장에서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직후 회장이 '김영삼 대표가 대선 후보가 되면 그룹이 살기 위해서라도 도와줘야겠어' 이렇게 말하더군요. …(중략)… 사장단 회의를 열어 '대우그룹의 임원과 부장들을 동원해 YS를 도우십시오.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고 기업가들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YS를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고 지시했어요."


김우중이 하나를 열이 되게 하고, 열이 다시 백이 되게 하는 '오묘한 계산'의 불쏘시개로 삼았던 인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우중에게 각종 특혜를 베푼 박정희야 그렇다 치고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변명을 내세워 김우중은 노태우의 검은 비자금을 실명으로 전환해 주는 '경제정의를 배반하는' 범죄행위까지 저지른다.

결국 '김우중 선공신화'의 진짜 비결은 정경유착이었던 것이다.

한편 김우중은 탁월한 용병술과 인맥관리, 언론플레이와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이기도 했다. 당대의 지식인 스타인 김용옥, 최인호, 이문열, 장기표 등과 세계여행을 하면서 언론으로부터 '고상한 재벌'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일류대 운동권 출신들을 노무관리에 투입하며 '고상한 탄압'의 진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김우중은 인맥을 관리하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는데, 알고 보면 그건 엄청 남는 장사였다. 하나를 열이 되게 하고, 열이 다시 백이 되게 하는 '오묘한 계산'의 살아있는 표본인 셈이다.


(5) 과욕을 부리다 화를 당하다

[임상옥] 임상옥은 탁월한 상술로 조선 제일의 거부가 되자 차츰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우선 고생만 하다가 죽은 아버지 임봉핵의 초라한 산소를 명당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수백간이나 되는 거대한 집을 지었다. 그 집을 완성하는 데 무려 5년이나 걸릴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와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치면 화(禍)를 부르는 법.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의주에 대궐이 하나 더 생겼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임상옥의 비극은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선 암행어사가 의주에 출동했고, 혹독한 감사가 실시됐으며, 대가(大家)는 모두 헐리게 되었다.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법을 어겼다 하여 임상옥은 옥살이까지 당해야 했다.

[김우중] Every street is paved with gold(모든 길은 금으로 깔려져 있다). 국내에서 135만부가 팔리고 14개 외국어로까지 번역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영문번역판 제목이라고 한다. 그러나 '황제경영'의 자리에까지 등극한 김우중의 '노다지 인생'은 영원할 수 없었다. 공격경영에도 불구하고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재계 2위로 부상했던 대우호는 침몰하기 시작했다.

1999년 10월, 지난 30년 동안 실패라고는 몰랐던 '성공의 화신' 김우중은 외국에 잠시 다녀오겠다더니 그대로 잠적해 버림으로써 명예라는 마지막 자존심마저 포기했다. 고달프기만 한 '국제적 도피자'라는 제2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그의 도피는 늘 불안하다. 그의 경영 오판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체포결사대를 조직해서 그를 쫓기 시작한 것이다. 세간에는 "세계는 넓고 숨은 곳은 많다"는 신종 유행어도 생겨났다.

김우중의 몰락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과 오만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성공이 전적으로 자신의 재능과 노력만으로 이뤄진 것처럼 착각했으며, 자신처럼 성공하지 못한 것은 마치 나태하고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듯이 공박했다.

앞에서 드러난 것처럼 온갖 추악한 거래를 했던 범죄자(?)가 온갖 희생을 감내하며 헌신적으로 일해온 노동자들에게 '노동윤리'를 설교한 것이 그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을 모두 구할 수 있는 주술처럼 언론인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떠받들어지던 '세계경영'도 도리어 김우중의 종말을 앞당긴 도화선이 되면서 그 허구성이 앙상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불어로 번역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에 실린, 회사의 성공을 위해 직원에게 희생과 고통만을 모범적 덕목으로 요구하는 내용이 역설적으로 프랑스 톰슨사 인수 좌절(대우그룹이 흔들리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가 됐던 사건)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는 시사적이다. 이와 관련한 강준만의 분석을 들어보자.

"이건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대우의 그런 모순은 김 회장이 갖고 있는 모순과 꼭 닮아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의 사고엔 희생을 요구하는 '전통'과 새로운 변혁을 요구하는 '첨단'이 공존한다. 그의 '세계경영'은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세계경영'일 뿐 그 알맹이는 결코 세계적이지 않다."

실제로 김우중은 국제적 수준의 혁신과 변화를 외치면서도 그 혁신과 변화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낡은 전통과 관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왔다. 자식들의 혼사도 작지만 상징적 사례가 될 것이다.

재벌가 혼사의 불문율 제1조는 같은 재벌이나 정·관계의 권세가 가운데 어느 한쪽과 사돈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거니와, 그것은 낡은 전통과 관습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김우중의 사돈 중 한 명은 개발독재 시절 경제정책 결정권과 특혜자금 돈줄을 쥐고 있던 김준성(제일은행장, 한국은행 총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삼성전자 회장, 대우 회장 역임)이다.

김우중의 좌우명은 '창조'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진정한 창조는 구태의 파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올해 초 <시사저널>은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김우중은 '가장 싫어하는 기업인' 1위에 올랐으며, 대우는 '가장 투자하고 싶은 기업' 6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그런 김우중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수배를 내렸다. 그들이 내건 현상금은 50만원. 31세의 젊은 나이에 5백만원의 자본금을 가지고 출발해서 '한국판 징기즈칸'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영웅'의 가치가 30년 만에 10분의 1로 폭락한 것이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시대가 이제야 외형적 권위와 허구적 우상을 파괴하고 진정한 혁신과 변화를 모색하면서 실질을 숭상하는 참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징후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한 분의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 어떤 대문호의 책이 고물상에서 10원에 팔렸다는 우울한 소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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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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