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7개월이 되어갑니다.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마감하고 그렇게도 간절히 보고 싶어하던 하느님 곁으로 어머니는 가셨습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 쌓여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잘 모시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머니께 대한 효도라고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자그마치 4년 동안이나 풍으로 고생하셨습니다. 1997년 그러니까 71세 되던 해 3월 말에 식탁에서 쓰러지신 이후 단 한 번도 자유롭게 밖에 출입하지 못하고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해 9월에 큰아들인 내 집에 오셔서 생활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많았지만 아버지와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모두 극복하였습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어머니가 중풍으로 자리에 눕고 지팡이에 몸을 간신히 의지하고 화장실에 다닐 때에 어머니 모시는 문제로 4남매가 모였습니다. 같은 인천에 사는 동생과 내가 어머니를 당연히 모시는 것으로 결론짓고 동생이랑 좋은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아내도 제수씨도 같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한 군데에서 모시면 힘드니 보름씩 모시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연로하신 아버지(그 당시 74세)는 집에 계시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희생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집에 어른 한 명은 꼭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내도 제수씨도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주 밖에 나가봐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경로당이나 복지 회관에 나가시는 것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가장 마음 아팠습니다.

나도 동생과 아내, 그리고 제수씨의 의견에 동의하여 바로 부모님을 보름씩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야 아내도, 제수씨도 어느 정도 숨을 쉬면서 생활하고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부모님은 보름씩 두 아들 집을 오가며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입니다. 이웃에 살며 성당에 같이 다니는 58세 된 형님이랑 (그 때 내 나이는 39세였습니다) 교우 초상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8월인 것 같습니다. 문상을 하고 기도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머니에 대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난 형님께 자랑스럽게 동생이랑 같이 보름씩 번갈아 가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형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좋은 방법이다'느니 '나쁜 방법이다'느니 하는 반응이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난 당혹했고 불안해졌습니다.

잠시 뒤에 형님은 조용히 나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리노'는 성당에서 부르는 나의 세례명입니다.
"가리노 형제, 풍 걸린 어머니 모시느냐고 힘들지? 정말로 힘이 드는 일이지. 암, 내가 우리 장모님 모셔봐서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지. 가리노 형제가 부모에게 효도하고 있는 것 내가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이번에는 가리노 형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네. 아니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네.

보름씩 동생과 같이 나누어 모시면 물론 형제들은 좋겠지. 그러나 부모님한테는 큰 괴로움이고 슬픈 일이네. 부모님은 무엇보다도 사실 곳이 정해져 있어야 하네. 동생이든 형이든 어느 한 집에서 정해놓고 모셔야 되네. 그러고 나서 나중에 가끔 오고가면 되는 것이네. 부모님이 정처가 없어서 보름씩 두 아들집을 전전한다면 그 마음의 괴로움은 엄청난 것일세.

성한 가리노 형제가 일정한 주거지가 없어서 두 곳을 왔다갔다 한다고 생각해 보게나. 그것도 큰 고통일 것이야. 하물며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께서 두 아들이 모시는 게 힘들다고 짐을 싸들고 왔다갔다 하시면 겉으로 표현은 못하시지만 속으론 얼마나 눈물 많이 흘리시겠나."

형님의 그 말씀을 듣고 난 금방 깨달았습니다.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들 편한 것만 생각했지 부모님 불편하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형님 말씀처럼 부모님은 큰아들인 나에게 야단이라도 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들 며느리 몰래 한없이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애지중지 키운 두 아들에게 그렇게 푸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땅이라도 치며 통곡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큰아들인 나는 바보같이 그것을 몰랐습니다.

다음 날에 나는 아내에게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모셔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반대했습니다. 뜻은 좋지만 그것은 너무 힘드니 지금처럼 동생과 나누어서 모시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나와 아내 사이에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사실 집에서 모시는 것은 아내와 아버지입니다. 나는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기 때문에 하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 말다툼을 한 끝에 간신히 부모님을 모셔오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내의 표정이 아주 어두웠습니다. 앞으로 편찮으신 어머니 모실 생각에 걱정이 태산 같았겠지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풍 맞은 어머니 모시는 대신 내가 당신에게 잘하겠다. 두고 봐라"고요.

그렇게 해서 그 해 9월에 부모님이 완전히 큰아들 집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작은아들 집이나 큰아들 집이나 아버지가 고생하시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부터는 제수씨가 편한 대신 아내가 많이 힘들게 되었습니다. 아내에게 잘해주겠다고 말은 했으나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별로 잘해준 것이 없어서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올 4월에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는 큰아들 집에서 생활하셨습니다. 가끔 동생이 와서 어머니를 모셔가서 일 주일이나 보름 정도 모시고 있어서 아내가 좀 쉬기도 했지만 대부분 아내가 모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1년 동안은 어머니가 누워서 생활하는 바람에 대소변을 다 받아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치매 증상이 나타나서 모시는 데에 어려움이 몹시 많았습니다. 짜증도 내고 큰 소리가 오고간 적도 사실 많았습니다. 아내와 다툰 적도 적지 않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께 불효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아내의 정성 때문에 어머니는 큰아들 집에서 생활하시다가 숨을 거두시고 큰아들 집에서 장례까지 다 치렀습니다. 특히 아내는 그 어려운 장례를 병원에서 하지 않고 집에서 교우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무사히 해냈습니다. 나에게 정말로 고마운 아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끝없이 사랑해준다 하더라도 그 은혜는 갚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 사람이 사는 올바른 방법을 깨우쳐 준 이웃집 형님을 생각합니다. 만약에 그 당시 그런 말을 내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부모님을 어떻게 모셨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동생과 같이 보름씩 혹은 한 달씩 틀림없이 모셨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부모님은 짐을 싸 가지고 두 아들집을 왔다갔다하셨을 것입니다. 두 아들을 원망하고 속으로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시면서요. 형님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의 인사를 정중히 드립니다.

"형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 그 고마운 형님이 다음 달 초에 강화로 이사합니다. 이 곳 성당에서 봉사를 참 많이 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두들 아쉬워합니다. 형님과 이 곳에서 같이 생활한 시간이 벌써 4년하고도 5개월이 지났습니다. 형님 덕분에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정말로 잘하고도 잘한 일입니다. 그 고마움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하셔도 꼭 연락 드리고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