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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어머니가 전화 끝에 '식당을 하나 내야겠다'며 '지금하는 일은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한숨을 토하셨습니다. 요구르트 배달에 파출부, 청소 등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한 번도 '힘들다'는 말씀이 없으셨던 분이라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들의 변변한 도움도 없이 케라틴이니 올리고당이니 온갖 낯선 말을 외우면서 조리사 자격증을 따신 게 10여 년 전입니다. 그 후 97년인가, 시장 한 귀퉁이에 작은 갈비집을 내고 '사장님' 소리에 뿌듯해한 것도 잠시, IMF 한파에 식당문을 닫고 어머니는 다시 월급쟁이 주방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식당을 내야겠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저는 '그래 잘됐다' 싶었고, 식당 내는 일이 실제로 추진되어야만 어머니가 월급쟁이 주방일을 그만두시겠다 싶어 '대박 아이템이 하나 있다'고 바람을 넣었습니다. 제 친구네 집에서 특허를 낸 '옻닭집'이었죠.

'복날에는 현금이 300만 원씩 들어온다더라'는 약간의 과장, '지금 놓치면 기회가 없다'고 등떠민 끝에 어머니는 친구네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친구네 어머니와 두 분이서 딸에 대한 신세한탄(제 친구 역시 맏딸인데 저처럼 부모님 곁을 떠나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답니다)을 한참 하시고는 의기투합, '체인점 개시'를 전격 결정했습니다.

어머니는 가게 얻으랴, 내부 수리하랴, 돈 구하랴, 오히려 식당 나가실 때보다 더 정신 없으셨습니다. 저는 식당을 열게 한 중개인의 막중한 책임감으로, 매일 어머니와 통화를 하며 진행상황을 체크했지요.

식당은 이제 도배를 끝내고 마무리 공사만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남동생은 주말마다 불려나가서 막노동을 했지만, 그와는 달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한 저는 그냥 말로만 '옻닭 외에 별미가 될 만한 곁들임 반찬이 있어야 한다', '근처에 대학이 있으니 학생들 상대로 하는 간단한 메뉴를 두는 건 어떻겠냐' 등의 제안을 드렸습니다.

개업을 앞두고 부모님은 이른바 '홍보전략'이라는 것도 세웠습니다. 옻닭집 활성화를 위한 부모님의 전략은 간단했습니다. '입소문을 내자!' 부모님이 내게 내민 전단지 문안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부모님이 고심 끝에 내민 '상술'치고는 너무 소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전단지 문안 중에는 '기존 시중 옻닭과는 전혀 다른', '한방 보약 옻닭', '6시 내고향, 9시 뉴스에서까지 반영' 등의 문구도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구는 이 부분입니다. '전단지를 가지고 오시는 고객 분께는 옻닭 1마리 당 5000원씩 활인해드립니다'.

'알레르기'를 '알러레기'로, '할인'을 '활인'으로 적어놓긴 하셨지만, 아버지가 이걸 쓰기 위해 얼마나 고심하셨을까요. 5000원을 할인하면 과연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 계산하느라 또 얼마나 머리 아프셨을까요.

'중간에 틀린 글씨가 있다'는 제 지적에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시며 '그럼 국문과 나온 네가 해라'라며 밀어놓으십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전단지 제작'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안게 되었습니다. 수줍음을 무릅쓰고 1만 부 가까이 되는 그 전단지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것은 이제 제 남동생들의 임무가 되겠지요.

우리 부모님의 '치밀한' 상술, 남동생들의 날품팔이 그리고 우리 옻닭집, 모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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