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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를 찾은 것이 이번이 네 번째던가. 더 이상 지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복구가 아주 끝난 것일까. 지진 전의 고베를 본 적이 없으니 나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을 되찾은 듯 합니다.

여기 와서 들으니 지진 전과 후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것 중의 하나가 여자들의 옷차림이라는군요. 예전에는 '고베 여자들은 하늘거리며 걷는다'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진 이후 고베 거리에서 하늘거리며 걷는 여자들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우아한 의상으로 폼내기 좋아했던 고베 여인들의 옷차림이 보다 간편하고 실용적으로 바뀐 때문이지요. 지진이 수 백년의 전통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재난을 당해본 여인들은 그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복장이 재난을 피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전통보다 강한 것이 본능일까요.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변화란 실상 아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대지진이라는 참사를 겪고서도 사람들의 사고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지진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1995년 1월의 고베 대지진은 과연 예고도 없이 찾아온 재앙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기미를 주지 않는 자연 현상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다만 기미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일 뿐.

지진 발생 전 고베는 일본에서 지진 확률이 가장 적은 곳으로 손꼽혔다고 합니다. 판의 내부에 위치해 있었으니 안전한 곳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한 지진이 발생해 5000여명이 죽고 20여만 명이 집을 잃는 대 참극을 겪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예기치 못한 것이라니, 판 경계부의 지진만이 예고된 지진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고베 지진 또한 이미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천재지변이라며 자연의 예시를 눈치채지 못한 인간의 무능력을 하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비열한 짓입니다.

우리도 본래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자연은 공평한데 인간만을 귀머거리로 만들었을 까닭이 없지요. 자연이 준 귀를 잃고 귀머거리가 된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탓입니다. 자연과 교감하고 대화할 수 있었을 때 지금 인간이 재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재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들쥐들은 지진이나 해일이 올 것을 미리 알고 피할 수 있다지 않습니까. 그것은 무슨 대단한 능력이나 초자연적인 염력 같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들쥐들은 다만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잃지 않고 있는 것 뿐이지요. 인간이 본래 쥐보다 나을 것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쥐보다 못할 것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인간은 자연이 준 귀를 잃고, 자연과 대화하는 법을 잃어버려서 재앙을 자초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어긋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귀를 찾으려 하기보다는 언제 또 쓰러질지 모르는 거대한 빌딩을 다시 지어 올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다만 유목민의 천막이면 족할 자리에 다시 바벨탑을 쌓아올린 것입니다.

인간은 지진이 오는 소리만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땅이 지진을 통해 인간에게 전하려 했던 전갈마저 받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지진을 겪고 나서 돌아가야 할 곳이 지진 전의 모습은 아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디 자신의 것이 아닌 땅을 잠시 빌려쓰는 인간이 그 땅의 주인처럼 행세하며 만년 왕국을 세우려다 호되고 당하고서도 어리석음을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신의 주인은 인간이듯이 땅의 주인은 땅 자신일 뿐입니다. 세든 길손이 주인 노릇을 하려 든다면 어느 주인이 좋아하겠습니까. 지진이란 주인인 땅의 진노였던 것을. 오랜 세월 땅이 주는 축복으로부터 배우지 못했던 인간이 재앙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분수를 모르는 길손에게 주인이 더 크게 화 낼 일만 남은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고베 밤거리에 어둠이 깊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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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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