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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걸린 할머니는 어느 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상우에게 말한다.
"떠난 버스와 여자는 잡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미련은 남기 마련 아닌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결론이 나올 것만 같았건만, 감독은 애써 나의 이러한 작은 바람마저 외면한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다 보고 뭔가 허전함이 깃든다.

허진호 감독의 또 다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가 보여줬던 다가서지 못한 때늦은 사랑과 이번은 다르다. 되레 충분히 격정적이고, 솔직하고, 대담하다. 하지만 그들도 많은 얘기를 들려주는 것에는 인색하다.

만 3년 만에 새 작품을 안겨준 허진호 감독. 그는 왜 '봄날은 간다'는 제목을 택했을까. 이번에는 관객들에게 또 어떤 과제를 남기려 하는 것일까.

#1 '라면과 차'로 만난 그들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홀아버지, 그리고 고모를 가족으로 둔 상우(유지태 분). 그는 자연의 소리를 찾아다니는 사운드 엔지니어다.

어느 겨울, 강릉 방송국 라디오 피디 은수(이영애 분)를 만난다. 그녀의 직업은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는 라디오를 진행하는 것이다.

같이 작업을 하게 된 두 사람. 대나무 숲도 산사도 같이 거닌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너무도 빨리 적응한다. 첫 작업 후 헤어지려는 순간. 은수의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말이 발단이 돼 준 것일까.

어느 날 상우는 은수에게 아버지가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 달라고 한다고 전한다. 하지만 은수는 이미 한 번의 결혼 경험이 있다.
"상우씨, 난 김치 못 담궈."
그녀는 자신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다. 노련하게도 '김치'를 핑계댈 뿐.

# 2 엉클어진 사랑

이때부터 그들의 관계는 삐걱거린다. 상우의 말이 부담스럽고 결혼에 대한 상처가 커서일까. 느닷없는 짜증과 자꾸만 멀어지려 하는 은수의 모습이 낯설다.

은수는 숫제 또 다른 남자를 만난다. 하지만 상우는 그러지 못한다. 간혹 은수네 집에 가서 기다리기도 하고 집에 찾아가 재워 달라고 떼를 써 보기도 한다.

그러는 상우에게 어느 날 은수는 이별을 선언한다.
"우리 헤어져."
하지만 상우는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지?"라고 말할 뿐이다. 도대체 상우는 이해가 되지 않나보다. 그러나 이별은 받아들여야 한다.

며칠을 참아 보지만 답답한 마음에 찾아 나선 상우는 은수네 집을 찾는다. 애써 건네는 말.
"태워 줄까?"
하지만 은수는 이미 자기 '차'가 있다.

그리고 상우가 아닌 또 다른 남자와의 여행을 꿈꾼다. 뒤를 따라온 상우. 화가 난 것일까. 은수의 차에 흠집을 낸다.

#3 그들은 정녕 이별을 원하나

그리고 얼마 지나 상우를 찾아 온 은수. 상우는 그녀와의 만남이 그리 반갑진 않은가 보다. 그녀의 호의도 뿌리치며 이별을 택한다. '봄날. 그들이 꽃피운 사랑을 뒤로 한 채.

그리고 상우는 어김없이 자연의 소리를 찾아나선다. 오늘은 보리밭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영화의 장면 중 낯익은 풍경이 느껴질게다.

다림이가 정원의 사진관 유리창에 돌을 던지는 장면은 흡사 상우가 은수의 차에 흠을 내는 것과 정원이 창 너머 다림이를 보던 장면은 상우가 작업실 창을 통해 은수를 찾는 것 등에서 말이다.

하지만 어김없이 허진호 감독의 남다른 색채도 느껴진다. 그는 '이벤트성'이 아니라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연결고리를 찾는다.

'라면'을 통해 서로 얘기하고, 처음 그들의 만남이었던 '차'가 이제는 헤어짐의 상징으로 변신해 버린다. 그리고 마음이 울적하면 으레 오는 ‘비’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묘미는 배우와 멀찌감치에서 둔 거리다. 그들은 가까이 있지 않다. 우리는 그들을 지켜 볼 뿐이다. 또 장황한 설명도 없다. 절제미라고 여결질 만큼.

그러나 궁금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지?"라는 상우의 말처럼 감독은 사랑이 과연 변할 수 있는 것이란 걸 말하고 싶은 것이었는지. 은수는 정녕 결혼에 대한 상처로 상우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지.

어쨌든 이번 영화는 만나 사랑하는 얘기라기보다 '헤어지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들이 나눴던 '봄날'같은 사랑은 훌쩍 '가' 버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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