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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새우 젓갈과 새우젓갈의 알콩달콩!

새 우 : 얼레리꼴레리 보리새우는 젓갈이 아니래요.
보리새우 : 어 뭔소리? 나는 김장할 때 없어서는 안될 보리새우 젓갈이여!
새 우 : 나는야 돼지고기 알맞게 삶아서 새우젓에 찍어먹고 막걸리 한사발 주욱 들이킬 때 없어서는 안되고, 평상시에는 고추몇개 썰어넣고 반찬대용이여?
보리새우 : 응 그려..새우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다 역할이 있잖아... 우리 사이 좋게 잘 지내자
새 우 : 옹야... 그러자.......*^.^*


Ⅰ. 강경읍의 지리적 여건

강경읍은 논산시의 남부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 동부는 연무읍과 채운면, 서부는 금강과 부여군 세도면, 남부는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북부는 성동면과 접하는 지역이다.

자연 지리적인 조건이 강경읍 주위에는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어 곡창지대로서 알려지고 있으며 서해와 통하는 금강이 있어 강경포구는 굴지의 수산항으로 한세기 동안 영화를 누렸던 곳이기도 하다.

또 강경은 계룡산지와 대둔산지로부터 발원하는 금강지류들이 북서에서 남쪽으로 흘러 논산천에서 합류, 강경읍 부근에서 금강본류와 만난다. 논산 곡창지대의 젖줄을 형성하고 있고 금강은 천혜적인 방위선인 동시에 교통수단이 되어 자연 지리적인 조건이 인간이 거주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Ⅱ.강경포구

(1)구한말 객주 등장 후 전성기 맞아

천혜적인 내륙항으로 일찍부터 수운이 발달하기 시작한 강경포구는 금강하구의 관문으로 서해에서 들어오는 각종 해산물과 교역품들이 이곳에 들어와 전국각지로 팔려나갔다.

이조중기 무렵 제주에서 미역과 고구마, 좁쌀 등을 실은 배들이 강경포구로 드나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들이 등장하면서 강경은 서해 수산물 최대 시장으로 발전하여 일제가 경제 수탈전초기지로 삼으면서 최고 번성기를 맞게 되었다.
일제 초기부터 반세기동안 성어기에는 하루에 1백여 척의 배들이 포구에 들어와 생선을 산더미 같이 부렸고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하루에 2, 3만명씩 몰려와 성시를 이루었다.

(2)전국 3대시장의 하나

강경시장은 평야시장, 대구시장과 함께 전국 3대시장의 하나로 손꼽혔다.

해마다 성어기인 3,4,5,6월 4개월 동안 강경시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생기있는 시장이었다. 충남을 비롯하여 충북, 전북, 경기 등지의 이름있는 상인들은 생선을 사기 위해 강경으로 몰려들어 여관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 무렵의 어업은 조그만 범선을 이용한 근해조업이어서 서해의 고군산열도가 서해의 최대 어장이었고 여기서 잡은 고기들이 금강을 타고 강경으로 들어왔다.

조기와 갈치는 전국의 수요가 전부 여기로 입하되었고, 민어, 홍어, 게, 전갱이, 새우젓 등 서해에서 잡은 고기들은 모두 강경을 통해서 소비지로 팔려 나갔다. 이무렵 「1원산, 2강경」이란 말도 생겨났다. 이때의 원산은 명태, 오징어 등 동해에서 생산되는 어물들의 집산지였다.

(3) 농산물, 포목시장도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

수산물 시장이 커짐으로 해서 농산물을 비롯한 다른 상품들도 자연히 이곳으로 들어와 성시를 이루었다.

논산평야에서 생산된 쌀이 여기에서 거래되었고, 연산의 대추와 감등 과일도 이곳으로 집산되어 팔려나갔다. 또 중국산 비단이 금강을 타고 들어와 강경은 점차 수산시장은 물론 농산물 시장, 포목시장으로서도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장이 되었다.

(4) 일제땐 수탈의 관문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는 제일 먼저 강경포구를 수탈의 관문으로 삼았다. 강경에 4개의 대형 도정공장을 세우고 김제 만경평야와 논산평야에서 거두어들인 추곡을 수탈해서 도정한 후 일본으로 보냈다.

이때 일제는 강제 착취라는 인상을 흐리기 위해 강경에서 1차 도정을 한 후 배편으로 군산으로 보내 다시 대형 화물선으로 옮겨 싣는 등 은밀하게 수탈 행위를 하였다.

강경이 포구를 중심으로 번성하자 일제는 어선과 교역선을 보호하고 수산물의 하역을 돕는다는 구실로 제방을 쌓고 갑문시설을 하였다. 이것은 말로는 어민을 위한 것이라 하지만 실제는 내륙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용이하게 한 것이다.

(5) 일제는 객주업에도 손대기 시작

1924년 10월 강경 갑문이 완공되고 부터는 하역작업이 쉬워지고 강경은 홍수피해의 불안을 덜게 되었다. 이 갑문은 강경 읍내를 관통하는 하천의 하류 북옥리에 설치되었는데 밀물이 들어올때 수문을 열어 배를 시가지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썰물때는 갑문을 닫아 배들이 도크안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제는 이 갑문 시설을 한후부터 점차 어업활동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업활동은 조선인 객주 중심으로 이루어 졌었다. 이후부터 객주들은 이들에게 선금을 받기도 하고, 뱃사람들의 출어자금을 밀어주는 형태로 서서히 객주업에 손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가 아무리 이들 객주들을 몰아내고 그들이 수산중개업을 하려고 해도 상인들과 어부들이 그들을 배척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는 없었다.

1935년 일제는 드디어 어업보호취체규칙이라는 것을 만들어 객주들을 정면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어업보호취체규칙의 골자는 「어획물은 한곳에서만 판매토록 하고 해상에서 고기를 다른배에 옮겨 싣지 못한다」는 것으로 강경과 마산에서만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또 어업조합(현 어업 협동조합 전신)을 만들어 기존 객주체제를 바꾸려고 하였다.

어획물을 위판장에서는 거래토록한것은 객주들로 하여금 어업조합에 소속되거나 어협의 허가를 얻도록 해서 그들의 기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같은 일제의 조치는 거센 반발을 일으켜 일제가 만든 이 규칙을 걸어 행정소송을 하고 강경의 객주들과 연결된 전국의 수산물 도매상인들에게 어업조합에서 고기를 사가지 않도록 조치를 하는 등 일제와 맞서 나갔다. 당시 뱃사람들과 도매상인들은 객주들의 지시에 따랐고 일제가 조종하는 어협에 비협조적이었으므로 일제는 끝내 조선인 객주들의 위력을 빼앗지는 못했다.

결국 행정 소송에서도 승소했고, 객주들이 영업을 할 수 있도록 되었으나, 위판장에서만 판매를 하고 일정한 수수료를 내는 선에서 이 사건은 매듭지어졌다.

(6) 성수기엔 북옥동 선창가 불야성 이뤄

「은진(논산)은 강경 덕에 산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강경시장은 꽤 번성했다. 강경장이 서면 금강 하류에서 싱싱한 해물을 가득 실은 고깃배와 여러 지방의 특산물을 실은 무역선들이 줄을 지어 몰려 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도 이곳으로 들어와 선창가는 뱃사람들로 북적였고, 봇짐장수나 등짐장수, 우마차를 끌고 모여든 농부들로 강경포구는 시끌벅적했다.

야바위꾼, 좌판장수, 약장수도 몰려들어 한 몫을 했고 술집마다 술따른는 여자들의 노래가락 소리가 대낮부터 끊이질 않았다. 복옥동 선창가 양쪽으로 죽 늘어섰던 100여군데의 색주가, 하루에 소한마리씩을 잡았던 강경여관, 삼남지방에서 최초로 세워진 호남호텔, 그 당시 강경의 번성함을 말해준다. 밤마다 부둣가의 술집들은 불야성을 이룬 채 뱃사람들의 노래소리로 그칠줄을 몰랐다.

명월관과 대성관 등 유명한 요정에는 항상 60∼70명의 기생들이 들끓었고 읍내를 가로지른 수로변으로 인력거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7) 문화시설 보급도 가장 빨라

강경이 평양, 대구시장과 함께 우리나라 3대시장으로 손꼽힐 당시의 최대 인구는 3만명에 달했다. 상인 등 유동인구까지 합치면 10만 인구가 북적댔다. 인구의 집결은 상대적으로 문화시설의 보급도 빨리오게 했다.

1920년대 도내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다. 강경읍 만의 전기 공급을 위한 화력발전소가 대흥리(현 동광상회)에 1백평 규모로 세워졌었다고 한다. 상하수도도 이때 놓여졌고, 호남지방 최초로 강경극장도 세워졌다.

중요 관공서와 은행등도 일찍부터 강경에 자리 잡았고, 1902년 5월 강경 우체국이 도내에서 처음으로 설립되어 우체국 고유번호가 충남1번으로 강경 우편수취소로 출발하였다.
1909년에 지방법원 지원, 1922년에 경찰서, 1914년 강경면사무소, 1921년 전매서, 1932년 한전 지점등 대부분이 20년대를 전후해서 세워졌다.

*강경젓갈 이란

○ 소 재 지 : 충남 논산시 강경읍 대흥리, 염천리, 태평리 일대
○ 주요품목 : 젓갈(새우젓, 황석어젓, 멸치젓, 멸치액젓)

○ 개 요
- 1930년대 최대의 성시를 이룬 강경은 지리적으로 내륙 깊숙이 위치하여 해상과 육상교통의 요충지로서, 각종 수산물의 거래가 왕성하였으며, 전국 각처에서 강경의 젓갈을 구입하기 위해 성시를 이루었다.

- 현재 전국 최대의 젓갈시장이 자리잡고 있으며 대형 도·소매업소와 중소업소가 성업중으로 다양한 종류의 젓갈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 젓갈은 어패류의 근육이나 내장에 소금을 첨가하여 자연 발효숙성시킨 것으로 무기질, 단백질, 어지방, 아미노산 등이 함유되어 있으며,

- 새우젓과 멸치젓이 젓갈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까나리액젓, 조개젓, 황석어젓 등 다양한 각종 젓갈이 있으며 전통비법으로 제조되는 것이 강경젓갈의 특징이다.

- 강경젓깔은 영양분이 잘 보존된 상태에서 적당히 숙성 발효되어 진한 감칠맛으로 직접 먹을수도 있고 김치 등의 부원료나 자연조미료로써, 널리 이용되고 있으며 소화흡수가 양호하고 영양적 가치가 매우 좋은 식품이다.

- 강경에서는 재래식 토굴이 아닌 현대화되고 과학적으로 시설된10∼15℃정도를 유지할수 있는 저온창고에서 발효시킨다.

- 발효기간은 대체적으로 3개월정도 지나면 거의 발효가 된다.
- 이 기간은 우리 선조들이 땅에 묻거나 서늘한 곳에서 100일 동안 발효시켜 백일주를 담그던 지혜를 상기하면 저온에서 100일 동안의 발효기간은 과학적인 의미가 있다.

전통 맛깔젓 시장현황 및 소비동향

○ 1995년 까지는 해산물 판매업체수가 많았으나 1996년말 부터는 젓갈류 판매업체수가 증가하면서 1997년말 18개 업체에서 2001년 현재 60개 업체로 증가하면서 전국 소비량의 약60% 정도를 강경 젓갈시장에서 생산·판매하고 있다.

○ 따라서 젓갈류 판매업체당 종사자수가 2.9명이며 사업체당 매출액이 연 145백만원으로 매년 매출액이 증가 추세에 있으며 연간 젓갈 판매액 또한 300억원 정도이다.

○ 국내 젓갈류의 연간 생산은 1980년대 중반이후 급격하게 증가하여 1990년 19,000톤 수준에서 1996년이후 24,000톤 수준까지 증가하였다.

○ 젓갈의 종류별로는 새우젓과 멸치젓 및 명란젓의 생산비중이 전체 젓갈류의 77% 이상을 차지하고, 특히 오징어젓과 명란젓 같은 고가제품의 생산증가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 가공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양념 젓갈류는 1994년도 이후 생산 비중이 크게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있다.

Ⅴ.강경 전통 맛깔젓의 특징

강경젓갈은 옛 포구에서 다루던 전통있는 솜씨로 저온창고와 토굴 등에서 염장법과 10∼15℃로 발효시켜 품질좋고 맛좋은 젓갈을 만들며, 영양분이 잘 보존된 상태에서 적당히 숙성발효되어 진한 감칠맛으로 직접 먹을수도 있고 김치등의 부원료나 자연조미료로써 널리 이용되고 소화흡수가 양호한 영양적 가치가 매우 좋은 식품이다.

젓갈은 어패류의 근육이나 내장에 소금을 첨가하여 자연발효 숙성시킨 것으로 무기질, 단백질, 어지방, 아미노산 등이 함유되어 있으며, 새우젓과 멸치젓이 젓갈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까나리 액젓, 황석어젓 등 다양한 종류의 젓갈이 있으며,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는 각종 재료들 중에서 가장 좋은 재료만을 선별하여 발효시켜 만든 강경 전통맛깔젓을 위생적이고 깔끔하게 정리된 강경의 전통맛깔젓 시장에서 맛을 볼 수 있다.


새우의 크고 작은 기준보다는 껍질이 얇고 빛깔이 하얀 새우로 담근젓이 좋은 젓이며, 잘익은 새우젓은 약간의 붉은 빛이 나게 되는데 빛깔과 맛이 좋은 것이 당연히 좋은 새우젓이다. 크기는 15∼20cm 정도의 것이 좋다. 잘익은 것과 설익은 젓을 구분하는 것. 황석어 몸체가 부드럽고 구수한 냄새가 나는 것이 잘익은 것이다.

크기는 12∼16cm 정도 크기의 멸치로 저려서 살이 불그스레하게 삭고 냄새가 나야 하고 8월 한달에 걸쳐 추자도 근해에서 잡히는 추자멸치로 담근 추자멸치젓을 제일로 친다.

포도주와 같이 맑고 붉은빛을 띠고 냄새가 구수한 것이 좋다.

*젓갈의 구분

○ 젓갈은 크게 김장용 젓갈과 양념젓갈로 구분된다.
판매량이 가장 많은 새우젓을 비롯 황석어젓 멸치젓 멸치액젓 등이 김장용 젓갈에 속한다.

○ 밑반찬으로 먹는 양념젓갈은 명란젓, 창란젓, 꼴뚜기젓, 전어밤젓, 어리굴젓, 아가미젓, 오징어젓, 갈치속젓, 낙지젓 등 종류가 다양하다.

○ 새우젓만해도 생산시기에 따라 가격이 천차 만별이다.
새우젓의 제왕이라 불리는 육젓(6월에 잡은 새우로 만든 젓갈)은 한 드럼(250㎏)에 6백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 이보다 저렴한 오젓(5월에 만든 젓갈)과 추젓(가을에 만든 젓갈)은 한드럼에 20만∼1백50만원에서 판매된다.

○ 육젓은 빛깔이 곱고 살도 많아 쉽게 눈에 띤다. 오젓은 육젓에 비해 작다. 추젓은 내년 가을까지 먹을수 있고 묵은 것은 올해 김장용으로 적합하다.

○ 김장용 젓갈로는 새우젓에 3년이상 숙성시킨 멸치액젓을 넣는데 최고의 맛을 보장 한다.

*강경 맛깔 젓 축제*

옛 강경의 명성을 되살리고 전통 맛깔젓의 홍보와 판축을 위하여 97. 10. 11 ∼ 10. 12양일간 제1회 강경전통맛깔젓 축제를 시작으로 매년 10월 중순 경에 개최하고 있으며 금년도로 제5회 째를 맞고 있다

그동안 4회를 거치는 동안 강경 전통 맛깔젓의 브랜드화와 홍보판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현대화된 상점이 늘고 있으며 현재 60여개소가 영업을 하고 있다.

맛과 품질을 자랑하는 전통 젓깔시장에서 인절미, 수제비, 막걸리, 김치등 풍성한 먹거리의 무료제공은 강경의 훈훈한 인심을 말해주고있다.

잊혀져가는 3대 시장의 명성을 맛깔젓을 통해 되살리면서 시민의 화합과 관광객을 유치하면서 소득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 축제 행사개요
○ 기 간 : 2001.10.20(토)∼10.21(일)2일간
- 축 제 행 사 : 10. 20∼10. 21(2일간)
- 할인판매기간 : 10. 20∼10. 27(8일간), 행사장 및 젓갈시장

○ 장 소 : 강경 금강유원지, 젓갈상가

○ 주 최 : 논산시 KBS 공주방송국

○ 주 관 : 강경전통맛깔젓 축제 추진위원회 강경읍번영회

○ 행사종목 : 4개분야 33종목

2. 관광열차 운행

○ 김장철이 되면 관광열차외에도 전국에서 젓깔구입을 위해 관광버스를 이용 소비자의 단체방문이 1일 평균 100여대에 이르고 주말을 이용한 가족단위의 소비자가 날로 늘고 있다.

○ 운행기간 : 10∼11월에 축제기간과 김장철 운행
○ 운행구간 : 전국 주요역 ↔ 강경역
○ 운행규모 : 1회당 500명내의 무궁화호 7량 규모

2.관광객을 위한 할인판매
○ 기 간
- 2001. 10. 20 ∼
10. 27(8일간)
○ 판 매
- 가격의 20%할인
○ 장 소
- 축제 행사장 및 젓갈상회

3. 황산포구 주막집 운영
○ 기 간 : 2001. 10. 20 ∼ 10. 21
○ 장 소 : 축제 행사장 (강경 금강유원지)
○ 먹거리 : 젓갈백반, 돼지고기, 막걸리등 무료시식

Ⅷ.강경의 전통과 문화의 체험

전남일보> 임원식 사장은 세무관료 출신으로 <전남일보>가 대주주인 '900 컨트리클럽'의 사장을 겸직하고 있다. 임 사장은 <전남일보>에 '소원의 골프여행'이라는 칼럼을 연재하면서 이름 대신 '900컨트리클럽 대표이사'라는 직함을 사용하고 있다.


임이정

강경읍 황산리 95번지에 임이정이 있다. 임이정은 1626년(인조 4년)에 창건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거유이며 도학자인 사계 김장생 선생이 건립하고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학하던 건물이다. 임이정은 본래 黃山亭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건축양식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양식의 팔각지붕으로 한 한식기와집이다. 장대석을 이용하여 1단의 가단을 구축한 뒤 주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고, 정면의 3칸은 등간격으로 만들었는데, 왼쪽의 2칸은 通間으로 하여 대청마루이며, 오른쪽의 간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임이정은 조선후기의 목조양식을 잘 표현한 건물로서 무연의 수려한 처리와 날렵한 처마의 반전이 인상적인 건물로 1976년 6월9일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임이정 뒤에는 대나무숲이 있었다고 하며 굽이돌아 흐르는 금강물과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함께 호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서있다.

천정에는 한시가 있는데 이 시는 송구봉선생이 사계선생의 정자인「임이정」을 두고 축하하며 칭송한 「황산정운」의 한시이다.

팔괘정

강경읍 황산리 86-1 번지에 팔괘정이 있다. 팔괘정은 인조때에 우암 송시열선생이 건립한 정자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선생을 추모하여 강학하던 장소이다.

팔괘정은 낮은 산의 정상부에 가까운 곳의 경사면을 깎아 평평한 대지를 조성한 후에 금강을 앞에 두고 서향으로 건립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간 2칸으로 초익공양식의 팔작지붕한식 기와집이다. 장대석을 이용하여 장방형의 기단을 구축한 뒤 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방바닥은 마루형을 취하고 있는데 정면에서 볼 때 왼쪽의 2칸은 통간으로 대청마루를 만들었고, 오른쪽의 1칸은 온돌방으로 꾸며져있다. 문은 사방에 있는데 띠살문과 판문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팔괘정도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으로 특히 처마는 겹처마로 부연의 처리가 매우 수려하다. 1978년 3월 31일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팔괘정의 북쪽바위 벽에는 푸른 풀언덕이라 한 청초암(靑草巖)이 있고, 꿈에 정자가 바위벽에 걸려있다는 몽패벽이 있다. 또한 팔괘정 주위에 삼계리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고 일감당(一鑑塘)이라는 연못과 평주도(平 島)라는 섬이 있었다고 하며 도영암(倒影巖)이라는 바위도 있었다 한다.


죽림서원

강경읍 황산리 101에 위치한 죽림서원은 인조4년(1626)에 서원을 짓고 문성공 율곡, 이이와 문간공 우계 성혼을 모신후 황산서원이라 하였다.

그뒤 사계 김장생을 추배하고, 현종 6년(1665) 죽림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후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추배하였다.

고종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철되었다가 1946년 유림들에 의하여 단소가 설치되었다. 1965년 사우가 재건되었고, 유림에서는 매년 음력 3월15일과 9월15일에 모여서 춘추로 제향을 행하고 있다.

옥녀봉

강경읍 북옥리에 강경산이 있는데. 옥녀봉이라고도 부른다. 금강변에 있는 강경산은 풍치가 아름답고 봉우리가 매우 수려하여 마치 옥녀가 단정히 앉아 있는 모양이라고 하며 옥녀에 대한 전설이 서려있기도 하다. 산 아래로 금강이 흐르고 있어 강경포가 있으며, 산위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산꼭대기에는 용영대, 포영대, 해조문이란 큰바위가 있고 수백년이나 묵은 느티나무가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이산 정상에 오르면 사면이 확트여 강경읍내와 산아래로 굽이치는 금강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산아래로 흐르는 강물이 어찌나 맑았던지 고기가 지나가는 것도 보였고 물속에 깔려있는 조약돌들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고 한다.


강경의 특징

2대 포구 3대시장의 신화를 간직한 강경은 근대사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한 도시중 하나이다.

현재는 퇴락된 모습이지만 그 속에 감춰진 수많은 시간의 축적으로 강경이 가지는 역사성을 가늠할 수 있다. 강경을 역사도시로 호칭하며 보존하고 활성화시키려는 이유는 강경만이 가질 수 있었던 독특한 역사의 흔적과 무한한 가치가 있기때문이다.

강경의 근대건축물은 19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강경천의 호안공사가 완료되면서 세워지기 시작했다. 시가지에는 상업도시 구조에 적합한 각종 상점, 금융건물 그리고 점포병용 주택들이 세워졌는데 일본인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즉 강경의 상원은 1910년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잡고 있었는데, 1899년 일본상인 오카쥬사쿠(岡壽作)가 수산물 도매상을 개설한 것을 필두로 강경에 몰려들어 1905년에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심상고등소학교를 상(上)강경에 세우는 등 그들만을 위한 근대건축물을 1900년대부터 세우기 시작했다.
강경은 문화시설 보급도 빨라
1920년대 도내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고, 강경읍만의 전기공급을 위한 화력발전소가 대흥리(현 동광상회)에 1백평 규모로 세워졌다. 수도도 이때 놓여졌고, 호남지방 최초로 강경극장도 세워졌다.

주요 관공서도 일찍부터 강경에 자리잡았다. 1902년 5월 강경우체국이 충청남도에서 최초로 설립되어 우체국 고유번호가 충남 1번으로 강경 우편수취소로 출발하였다.
1909년 지방법원 지원, 1914년 강경면사무소, 1920년 강경상업학교, 1921년 전매서, 1922년 경찰서, 1932년 한전지점 등 대부분이 20년대를 전후해서 세워졌다.

강경의 유명 요리

강경 놀뫼나루에는 나루의 성쇠에 아랑곳 하지않고 80년을 이곳에서 황복과 위어 요리를 전문으로 이어온 소문난 음식점들이 있다. 이들 전통음식점들은 놀뫼나루 앞 전망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를 이어오며 식당을 경영하고 있다.

황복찜은 5월중순에서 6월초순까지 산란을 해 금강을 거슬러오는 황복을 잡아 요리한 찜이다. 바다에서 잡히는 복이 쫄깃쫄깃한 것이라면 민물을 먹은 황복은 살이 연해져 부드러워진다.

황복찜요리는 삶거나 찌지않은 상태에서 향이 강한 미나리, 양파 등의 야채와 양념을 섞어 매콤하게 볶아 내는 것이 그 특징인데 얼큰하고 감칠맛이 나며 뒷맛이 진하다.

위어는 4월과 5월 역시 산란을 위해 강으로 올라오는 넙치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크기는 약30센티 가량이며 은백색을 띠고 있다. 동작이 느려 홀치기 낚시질에도 잘걸려 나오는 이 물고기는 바닷물에서 자랄때는 억센 뼈 때문에 먹기 힘들지만 민물로 올라오면서 뼈가 연해져 회로 먹기에 적합하다.

위어회는 잘게 썰어 양념에 무쳐 요리한 것인데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그러나, 금강하구둑이 생기면서 어로를 막아 황복이나, 위어는 이제 이곳 놀뫼나루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 논산시청 공보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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