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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정치인들, 무늬만 다를 뿐, 통일을 보는 시각은 '아전인수'격이다.

평생을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쓰다 가신, 늦봄 문익환 목사의 삶은 되새기면서 이 땅을 사는 우리가 통일에 관해서 최소한의 자기 철학은 가져야겠다는 마음으로 늦봄 선생의 업적을 조명하려고 한다.

90년 초에 원불교 서울회관에서 열렸던 '민족의 통일과 화해를 위한 종교인 천인선언대회'에 참석한 선생은 동석한 범교파 지도자들과 '파안대소'를 했다.

당시의 흥겨웠던 분위기는 국악인 신영희 씨의 만담에 의해서였는데, 기자는 6.15 정상회담 때, 이 사진을 보면서 만담이 아닌 역사의 환희가 도래하리라는 기대를 잠시나마 가져 보았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는 오히려 역행하는 듯한 기미를 보이고 있다. 소외된 곳에는 어김 없이 나타나셨던 선생의 모습을 하나 한나 더듬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어마 어마한 이벤트성 남북접촉 보다는 소박하나마 모든 이산가족들이 참여 할 수 있는 서신교환 등의 점진적인 방법이 오히려 절실한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늦봄 문익환 목사 약력

1918.6.1
만주 북간도에서 아버지 문재린, 어머니 김신묵의 맏아들로 태어남

1924. 
명동소학교에 입학

1932.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재학중 신사참배 거부로 중퇴

1937. 
광명중학교에 입학

1938. 
동경에 있는 일본 신학교 입학

1943.

만주 봉천신학교로 옮김(학병거부) 만보산 한인교회 전도사

1944.6.17
박용길과 평생가약을 맺음

1945~46
신경 한인교회 전도사로 시무

1946.11.17
맏아들 호근 태어남

1947.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 받음. 을지교회 전도사

1948.7.7
맏딸 영금 태어남

1949.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 유학

1950.3.3
둘째아들 의근 태어남

1950~53.
6.25전쟁 중 판문점 및 동경 UN군 사령부에 근무

1953.5.28
세째 아들 성근, 동경에서 태어남

1954.8
재차 도미, 프린스톤신학교 신학석사학위 받음

1955~70
귀국후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한빛교회 목사로 시무

1965~66
미국유니온신학교에서 1년간 수학

1968~76
신구교 공동 구약 번역 책임위원

1976.3.1
"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첫 투옥

1977.
25일간의 옥중 단식(전주교도소)

1977.12
형집행정지로 22개월만에 출옥

1978.10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

1979.12
형집행정지로 15개월만에 출옥

1980.5.17
"내란예비음모죄"로 세번째 투옥, 광주교도소에서 23일간 단식

1982.12.8
형집행정지로 31개월만에 출옥

1983.1-"
고난받는 사람을 위한 갈릴리 교회" 담임목사

1985-"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1985.5-5.
3인천항쟁 사건으로 네번째 투옥

1987.7.9
형집행정지로 26개월만에 출옥

1987.12
부정선거 항의 단식

1989.1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1989.3.25
방북. 김일성 주석과 두차례 회담하여 통일 3단계 방안원칙 합의

1989.4.13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겠다는 위협에도 귀국, 구속(다섯번째 투옥)

1990.10
형집행정지로 19개월만에 출옥

1991.1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

1991.6.6
민주활동 하다가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여섯번째 투옥)

1992.1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1993.3.6
형집행정지로 21개월만에 출옥

1993.4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운동 제창

1993.8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1994.1
통일맞이 사무실을 개소하고 "새로운 통일운동체"결성을 위해 전력하던 중, 18일 오후 8시 20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
 
 약력 제공  -늦봄 선생 추모사업회- 


'통일의 아버지 늦봄 문익환 목사의 흔적을 찾아서'는 관련 사진과 함께 5부작 정도를 올릴 예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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