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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1년 전 미국 출장 중 사망한 '한국인 미군무원 박춘희 씨 의문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의 하나로, 미국 방문 중인 박씨의 남편 남학호 씨와 함께 현지 동행취재를 시도합니다.

남학호 씨는 이번 미국 방문길에 박 씨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사고 당시 박 씨가 이용한 택시회사와 경찰을 상대로 민,형사소송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 편집자주)


"이미 정부에 대한 신뢰를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려 보긴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결국 절망감밖에 얻을 게 없을 것입니다."

고 박춘희 씨가 의문사한 내막을 밝히기 위해 미국을 찾은 박 씨의 남편 남학호(42. 한국화가) 씨가 '국민의 정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난 6일(현지시각)로 미국 방문 이틀째를 맞는 남 씨는 이날 오후 미국 현지에서 이번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를 만났다. 3시간 동안 만남을 가진 남 씨는 이 자리에서 사건 발생 후 1년 동안 정부가 보여준 '안이한' 대응에 대한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국가의 한 구성원이 황당하게 사라졌는데도 외교통상부나 현지 공관은 사건 무마에만 급급합니다. 하지만 수출 하나 더 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자국민의 인권을 지키는 것이고 이것이 국가의 이익을 지키는 것 아닙니까." 대사관 관계자를 만난 남씨의 하소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실 남 씨가 자칫 자살로 결론이 날 뻔한 아내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보낸 1년이라는 세월은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곳이 머나먼 미국이었기 때문에 그의 '싸움'은 쉽지 않았다. 결국 평범한 국민으로 살아왔던 남 씨에게 국가의 도움은 어느 때 보다 절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 씨는 그 동안 관련 정부기관이 보여준 태도는 한 국가의 국민임을 부끄럽게 여기게 했다고 한다.

부검보고서 변경 내용, 두 달 후에야 전달 '약속'받아

지난 5월 4일 미국현지 영사관에서는 남씨에게 한 통의 인터넷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 내용은 박 씨의 사체를 부검한 부검의가 작성한 부검보고서의 내용이 일부 변경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변경사항을 받아보기 위해선 남 씨가 '직접' 부검의 사무실에 신청비 8달러와 함께 편지를 보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언어 소통의 문제 등으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남 씨는 신청비를 후불하는 방법으로 일단 변경내용을 받아보고 싶다는 답장을 현지 공관으로 보냈다. 그러나 남 씨의 기대와는 달리 이후 답변은 없었다.

물론 한시라도 빨리 변경된 내용을 살피고 싶었던 남씨는 외통부를 통해서 길을 찾았지만 이곳에서는 '현지 공관이 보내줄 것'이라는 막연한 대답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정처없이 두 달이 흘러 남 씨가 미국을 방문한 날, 현지 공관 관계자는 자신이 '직접' 편지를 보내 부검의 사무실에 연락을 해놓은 상태라면서 곧 그 내용을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결국 남 씨는 현지 공관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좀더 일찍 부검 보고서의 변경사항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 씨는 이 답변을 듣기 위해 두 달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고, 14시간이나 걸리는 미국으로 직접 와서야 그 약속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기다려라, 현지 사정상 어렵다'라는 말 이젠 지겹다"

물론 이것은 한가지 예일 뿐이다. 외교통상부 북미과, 주미 한국대사관, 그리고 청와대까지... 그가 최근까지 정부기관에 보낸 각종 탄원서나 진정서, 협조요청서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가 미국 방문을 위해 들고 온 가방 두 꾸러미에는 그가 직접 만들어 각 기관에 보낸 민원 서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 대한 대답은 여지없이 '기다려봐라', '현지 사정상 어렵다'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미국 방문을 결심한 동기가 된 현지 변호사 선임 문제에 대해서도 그의 답답함은 아쉬움을 넘어 분을 삭이지 못하는 정도이다.

지난달 20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은 외통부에 대한 질의 과정에서 <박춘희씨 의문사>를 거론하고 당국의 대책을 묻는 질문을 했다.

이후 외통부는 이 질문에 대해 "변호사 선임 문제와 관련해 유족들의 협조요청을 최근(6월 10일) 받았다"면서 "유족들이 수사결과에 대한 법적 대응을 위해 미국을 방문할 경우 최대한 협조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변호사 선임 문제 최대한 협조' 약속은 어디 갔나?

하지만 남 씨의 말은 다르다. 이미 지난해 8월 당시 사건이 발생하고 처음 미국을 찾았던 남 씨는 대사관 측과의 협의를 통해서 '일단 최종 수사결과를 지켜보는 한편, 유족 측에서 형사사건 전문 미국인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률적인 측면에서 적극 대응'하기로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내용은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지난해 8월 10일 외통부로 보낸 보고전문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지난 4월말 공식적인 수사결과가 나온 후 남 씨와 유족들이 변호사 선임과 관련해 계속적으로 요구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의사항과 국회 답변과는 달리 외통부와 그리고 현지 공관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일단 '최대한 협조'라는 선을 명확히 구분짓기 어렵지만 현재 관계기관이 변호사 선임과 관련해 하고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특히 변호사 선임과 관련해 변호사 물색 등에 대해서도 '외교적 마찰'을 이유로 어떠한 협조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남 씨는 말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관계기관이 '외교적', '미국적' 상황을 이유로 들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소를 낙관할 수도 없는데 굳이 할 필요성이 있을까요'라고 하더군요. 한 국민의 인권이 직결돼 있는 문제를 두고 이런 식으로 외면하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답답합니다."

비단 이러한 상황은 박춘희 씨 의문사뿐만 아니라 영국 이경운 씨 의문사 등 외국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건에서 쉽게 나타난다.

박춘희 씨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대사관 한 관계자는 "변호사 선임 문제와 재수사를 촉구하는 것은 외교적인 관계를 고려해서 대사관에서 직접적으로 나설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박 씨 사건의 경우에는 현지 경찰이 수사를 마무리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존중해야 한다"면서 "근거 없이 재수사를 촉구하는 것은 현지 경찰과 재외 교민들의 마찰을 유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 의문사와 관련해서 현지 경찰의 수사발표가 나온 단계에서 이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재수사를 촉구할 수 없다는 것이 현지 공관의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벌어지는 사례를 지켜보는 남 씨로서는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일본에서 한 여성이 미군 병사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일본 수상이 직접 나서서 미국 정부에게 사태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외교 마찰을 우려했다면 이런 게 가능하지 못하죠. 결국 인권을 존중해야 하는지, 외교적 위상이 낮은 것을 탓할 것인지 정부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편, 이와 유사한 사건의 발생에 대비해 조속한 대처와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법, 제도적 절차 마련이 시급할 것으로 보인다. 제2, 제3의 박춘희 씨 사건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부의 관심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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