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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레띤 씨, 안녕하세요?

따뜻한 5월의 봄날, 지금 당신은 서울의 어느 공장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겠죠? 사출공장 이라고 하셨던가요? 제가 확실히 기억을 못하고 있는 것은 당신과 만나서 나눈 시간이 짧기도 했지만 그날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 그럴 것입니다. 어때요, 잘 그리고 건강히 지내고 있죠?

그날.... 얼마전 토요일 밤 당신은 서울을 올라가던 제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죠. 겁도 없이 아무나 태워주길 좋아하는 저는 그날도 차를 세웠습니다. '어디까지 가세요?'하고 물었더니 '예, 형님! 용인갑니다'하며 더듬더듬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말하는 대답을 듣고서야 외국인노동자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땐 좀 당황했습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지 몰라서 말이에요. 밤 10시가 가까워지는 늦은 시간 그렇게 당신을 만났습니다.

베트남이 당신의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 전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차 끌고 나오기 바로 전에 베트남에 관한 기사를 읽고 나오던 길이었거든요. 전 차분히 몇 가지 말을 건넸죠. 베트남인이라는 호기심에... 또 지난 과거의 상처에... 당신에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당신이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애초 용인에서 더 떨어진 신갈 지나서 화성시 동탄면까지 데려다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학에서 한국어를 공부한 당신은 역시 한국어가 그런 대로 유창했습니다. 보통 노동자들이 2년 정도 계획으로 온다고 했죠? 당신은 1년이 넘어서 2년차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금 있는 회사는 돈도 제 때에 주고 잘 해준다고 말해서 전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습니다.

사실 아무리 낙관적인 시각으로 이 나라를 쳐다본다 해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학대하고 참혹하게 대우하는 비양심적인 고용주들이 많거든요. 제가 부드럽게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니 어느덧 우리 사이엔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없어졌고 아주 편한 대화를 나눴드랬죠.

자꾸 날 호칭할 때 <형님!> <형님!>해서 아니 얼마나 현장에서 한국인들이 하대하면 아무나 <형님>이라 부를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은 73년생이라고 했죠? 그러면 내가 형님이 아니라 레띤 씨가 형님이라고 하니까 그렇다고 하면서도 또 어김없이 <형님>이라고 호칭하는 레띤 씨에게 가족, 형제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지도 못했네요. 대학 졸업하고 한국에 돈 많이 벌러 왔다는 당신의 눈빛엔 앞날에 대한 희망과 가족과 떨어져 있는 외로움이 함께 녹아 있더군요.

내가 어느 즈음엔간 당신께 말했죠? 이 나라 사람들이 예전엔 당신의 나라에 가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했는지 알고 있냐고 말이에요. 참으로 선한 레띤 씨는 알고 있다고 했죠. 하지만 그것은 미국이 시킨 것이고 지금은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지 않냐고 오히려 날 위로했죠. 당신의 외가쪽 친척들 중에서 두 명인가 죽었다면서도 당신은 이젠 지난 옛날 얘기고 많은 사람들이 잊었다고 내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나를 경계하는 의미에서의 의례적인 겉치레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난 당신께 용서를 빌고 싶었습니다. 베트남의 독립전쟁에서 우리가 많은 당신의 동족들을 참혹히 학살했으니까요. 그래서 전 당신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레띤씨! 미안해요. 제가 우리나라를 대신해서 사과할게요. 그때 전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당신들의 고통을 이제야 알게 되었거든요. 제가 사과할게요!>라고 말이죠. 그때 제 용서를 받아줘서 나무도 감사했습니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저이기에 그런 고백을 했던 것이 더욱 잘한 일임을 확신했습니다.

난 당신의 국민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거대한 제국주의 세력이었던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중국까지도 싸워 이겼으니까요. 아시아의 어느 국가가 그러한 자존심을 가지고 싸웠던가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우리의 한국군인들도 그때는 군사독재에서 선택의 기회가 없었고 또 눈과 귀를 막았었기에 참혹히 당신들에게 지극히 감정적인 상처를 입혔습니다. 우리가 일본에게서 똑같이 고통을 받고도 당신들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전 알고 있습니다. 일본에게 과거를 사죄하라고 외치기 전에 우리 스스로도 베트남 당신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일본의 극우적 시민들의 과거사반대의 시위를 작년 <미안해요 베트남>캠페인을 벌였던 한겨레신문사 사옥 앞에서 똑같이 목격할 수 있었으니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레띤 씨! 정말 죄송합니다. 베트남!

먼거리도 아닌데 1시간 반가량 걸려서야 당신의 반가운 친구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 데려다 주게 되었죠.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었더라면 더 빨리 당신의 친구들과 만나게 해줬을텐데 정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오히려 내게 감사했죠. 밤 늦게 차도 없을 시간에 친구들과 만나게 해줘서 고맙다구요. 아니요, 오히려 제가 고마웠습니다. 과거의 치욕의 역사를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말입니다.

제 핸드폰 번호 잘 입력해뒀지요? 한국의 여러 곳을 알고 싶고, 문화를 만나고 싶으면 연락달라고 내가 얘기한 것 잊지 않았죠? 저도 당신을 통해서 더 많이 베트남이라는 멋진 나라, 아름다운 나라의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부디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건강히 돈 많이 벌길 바래요.

한국의 발전상을 부러워한 당신이지만 한국의 병폐도 많이 있다는 것 잊지 마시고 고국에 돌아가면 멋진 베트남 사업가가 되길 바랍니다. 항상 행복하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칩니다. 이 글을 당신은 받진 못하겠지만 전 마음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2001년 5월 당신의 한국 친구 이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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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평화의 도시, 일본 히로시마에 유학을 와서 우물쭈물하다가 일본과 한국을 함께 바라보는 경계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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