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최장집 전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과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글을 색깔론으로 비난한 <조선일보>기자들이 이를 비판한 월간<말> 등을 상대로 낸 소송 항소심 결과에 대해 <한겨레>와 <조선일보>가 조금은 다른 기사를 내보냈다.

<한겨레> 18일자 '사상검증' 명예훼손 항소심, 조선일보기자 잇따라 패소라는 기사를 통해 서울고법 민사8부가 17일 '최 교수 비판 기사를 놓고 마조히즘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명예훼손'이라며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가 <말>과 정지환 기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400만원 지급을 명한 1심을 깨고 원고 판결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반면 <조선일보>는 18일자 최장집 교수 사상논쟁 관련 본사 이한우기자 승소라는 보도를 통해 서울고법 민사8부가 98년 '최장집 교수 사상논쟁'과 관련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가 월간 '인물과 사상' 및 전북대 강준만 교수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심대로 "강씨 등은 이씨에게 7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고 밝혔다.

물론 두 판결은 모두 사실이다. 어느 부분을 강조했는지가 다를 뿐이다.

한편 같은 재판부는 이날 <월간조선> 이동욱 기자가 "사디즘적 병리현상이 감지된다고 표현한 것은 명예훼손"이라며 <말>과 정지환 기자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도 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한 1심 판결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공수대원이 20년만에 부르는 '진혼가'

18일자 가판 일간지들은 대부분 80년 광주를 주요하게 다뤘다. 그 중에 주목을 끄는 기사는 <한겨레> 15면에 보도된 5·18 시민사살 공수대원, 20년만에 부르는 '진혼가'.

80년 3공수특전여단 11대 4지역대 하사였던 정규형(46) 씨는 1980년 5월 어느 날 광주교도소 앞에서 시민 2명을 사살했다. '보이면 발포'하라는 명령에 따라 말이다.

지난 10일, 정씨는 21년 만에 광주를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그 현장에 다시 서서 기억하기 싫은 그때를 떠올렸다. 정씨가 방아쇠를 당기자 2명은 쓰러졌고 그들을 급히 교도소 앞 야산에 묻었다. 이후 며칠 뒤 정씨는 전남도청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그리고 21년. 정씨는 제대뒤 서울지하철공사 역무원으로 근무하다가 결혼을 했지만 부인이 진 1억원의 빚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이혼했다. 그 후 '보따리 장사'에 손을 댔고 그것마저 다시 실패했다. 지금 정씨는 서울 을지로역, 시청역을 전전하는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다.

21년만에 광주 5·18공원묘지를 찾은 정씨는 끝내 통곡했다. 정씨가 통곡한 시민의 무덤 묘비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당신의 숭고한 뜻은 커다란 사랑으로 남아 바른 삶의 지표가 됐습니다. 못다 이룬 한을 훌훌 털고 가소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