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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백의의 천사'를 꿈꾸는 간호대학생, 무술쇼를 벌이는 여경 특공대, 여성복 패션 남성 모델, 여성 직업 운전사, 그리고 15명의 여중생 축구단…. 오는 5월 19일 서울 정동에 가면 이들이 펼치는 축제 한마당을 볼 수 있다. 모두들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반기를 들고 새로운 대안 여성문화축제로 자리잡은 '제3회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의 주인공.

특히 올해 대회는 여성의 외모에 대한 수치화를 반대한다는 기존 개념을 더욱 확장시켜 직업활동의 가부장적인 시선을 거부한다는 의미까지 띠고 있다.

모든 '직업 경계선'을 무너뜨리겠다는 주최쪽의 이런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은 참가자들이 있다. 축구공 하나로 세상을 휘어잡겠다는 15명의 소녀들. 서울 신창중학교 여학생 축구단 선수들이다.

주장 김미애 양에게는 이번 대회가 어쩌면 중학교 시절의 마지막 추억이 될지 모른다. 이는 정주, 국화, 옥희 등 다른 6명의 3학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미스코리아 대회는 이쁘고 잘 빠진 사람만 뽑는데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는 개성을 뽐낸다는 게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면서 미애는 "울끈불끈한 다리 멋있지 않냐"고 되묻기까지 한다.

"굵은 다리, 개성 있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머리도 짧고 얼굴도 까무잡잡한 게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영락없는 남학생들 같다. 그 나이쯤이면 예쁜 머리핀에 교복에 맞춰 신을 양말 색깔까지 신경 쓰일텐데 이들에게 이런 고민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
"처음에는 머리도 길었는데 운동하다 보니 긴 머리가 너무 거추장스러워요. 땀이 차서 엉클어지고 불편하던 걸요."
정주가 단호하게 말을 꺼낸다.

많이 뛸 때는 하루에 운동장 30바퀴 정도를 돌기도 하고 평균 3~4시간을 학교 운동장에서 보내는 소녀들.

지난해 축구단이 만들어지고 한 번도 쉬지 않고 해온 일들이다. 처음부터 축구를 좋아했던 사람은 의의로 거의 없는 편이다.

아예 여자축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축구를 했던 1학년 유정이의 경우는 특별한 사례가 될 정도로.
"그냥 재미있어요. 체력운동할 때가 제일 힘들지만 우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해요."
'울기까지' 하면서 축구화를 신고 있는 어린 소녀들.

부모님들의 기대도 저버릴 수 없다. 변변한 합숙소도 없이 학교 특별활동실에서 지내는 이들에게 부모님은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들의 부모님들도 딸이 축구를 한다는데 돈 대주고 마음 대주며 밀어준 건 아니다.

억지로 허락은 했지만 다들 제 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다쳐가면서, 친구들과 수다도 떨지 못하면서도 지금까지 축구복을 입고 있는 자식들을 위해 지금은 돈 모아 봉고차도 사고 음식도 마련하며 성원을 보내고 있다. 특히 아이들에게 '회장님'으로 불리는 부주장 국화의 아버지는 서울 번동에서 '왕십리 곱창'을 운영하며 매일 반찬을 해 나르고 있다.

여자 축구도 애정갖고 지켜봐 주길

이런 부모님의 기대를 생각해서라도 아이들은 열심히 하고 싶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답답하기만 하다. 필드에서 뛴다는 자체만으로도 멋있다고 여기는 축구에 인생을 걸 수 있을지 확신을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중학교에 여학생 축구단이 있는 학교는 20여 개교. 200여 개가 넘는 남자 중학교에 비해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서울에는 창덕여중, 오주중 등 모두 3개교가 있다.

물론 실업팀과 국가대표까지 합하면 전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소녀들의 당찬 꿈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현실이다.

당장 서울 지역에 여학생 축구단이 있는 고등학교만 해도 위례정보산업고등학교와 현대고등학교밖에 없는 실정이라 이런 고민은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제발 여자 축구는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렸으면 좋겠어요. 조기축구회에서 활동하는 어른들부터라도 후원을 해주면 안 되나요?" 미애의 말이 가슴에 맺힌다.

지난해까지 오산여중에서 코치 활동을 하다가 올해 신창중학교로 온 김택중(41) 코치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왔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기량 보고 뽑지 않았어요. '여자가 무슨 축구'라는 시선 때문에 선수를 모집하기조차 어려운 게 여자 축구의 현실이지요. 제 발로 찾아온 아이들이라 힘들어도 훈련으로 모든 걸 이겨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죽을 때도 축구공에 깔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정주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여기에는 '자율축구'를 지향하는 이재철(43) 감독과 김코치의 공도 크다. 특히 이감독은 '편하고 소신 있게' 운동하라고 일러주는 편이다. 노는 것처럼, 경기에 나가도 상대방 선수들 다치지 않게 위하면서 하라고….

승부로 결정되는 경기판에서 이감독이 이런 생각을 갖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마음고생이 있었다고 한다.

"미쳤다고들 하더군요. 여학생 축구단을 만든다고 하니. 저는 여자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아이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었습니다. 축구는 이런 면에서 여성들에게 '틈새'가 될 수 있어요."

이감독은 미쳐서 헌신적으로 하지 않으면 여자 축구는 못한다며 축구감독으로 지낸 지난 11년의 세월을 꺼내기 시작했다.

지난 13일까지 경기도 이천에서 있었던 숭민배 축구대회에서 신창중 여학생 축구단은 10개 참가팀 가운데 5위를 차지했다. 우수한 성적은 아니지만 어차피 승리만을 위해 나간 경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 낙심하지는 않는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만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이다.

'나'를 딛고 일어서는 자리로

이제 며칠 후에 있을 안티 미스코리아 대회를 위해 연습해야 한다. 미애는 주장으로서 필드가 아닌 무대에서 보여줄 공연이 조금은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스트레칭을 음악으로 보여줄까 하는 생각도 있구요, 콤비 헤딩이나 리프팅도 보여줄 생각이에요."

평생 '축구' 곁에서, 축구를 직업으로 삼고 살 수 있을지 아이들이나 감독, 코치 모두에게 이 문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축구복을 입고 축구화를 신고 있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사회의 통념을 깨고 있는 사람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행여 이들의 땀방울이 '나 여자 아니야'라는 식의 사시로만 받아들여질까 걱정한다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 대회가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스스로 이길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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