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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황리 앞산으로부터 저녁이 옵니다.
한여름같이 뜨겁던 낮의 열기를 식히며 차고 서늘한 기운이 산아래 마을로 성큼 내려옵니다.

우리는 일을 마치고 마당 한켠에 불을 피웁니다.
잔솔가지에서 시작된 불길이 천천히 마른 장작으로 옮겨 붙어 이내
큰 불기둥으로 솟아오릅니다.
벗과 나는 큰 컵 가득 막소주 한잔씩을 따라 고단한 육신을 달래 줍니다.

이제 돌집 짓는 일도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낮에 혼자 흑 속에 파묻힌 돌들을 파내서 나르고 있는데 느닷없이 먼데 사는 벗이 찾아와 일을 거들어 오늘은 일의 진척도 빨랐습니다.

혼자서 고무다라로 돌을 나르다 벗과 둘이서 담가로 나르니 일이 수월했지요.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일을 함께 한다는 것은 일꾼 한사람이 보태진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다만 한 사람이 늘었을 뿐이지만, 일은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네 배 더 많이 할 수 있었으니 말이지요.

기세좋게 타오르던 불길이 사그라들고 그 끝에 나온 숯불 위에 석쇠를 올리고 딱돔 몇 마리를 굽습니다.
멀리 천등산 박달재 아래 산촌에 사는 벗이 바다 건너 왔으니 모처럼 좋은 안주에 술 한 잔 해야지요.
굵은 소금을 뿌려 불에 올린 딱돔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습니다.

사실 딱돔은 도미란 이름이 붙었어도 감성돔이나 참돔처럼 횟감으로 쓰이지 않아 육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생선입니다.
하지만 딱돔 구이나 탕은 천하일미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지요.
오죽하면 이곳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샛서방 고기라 부르겠습니까.

워낙 맛이 좋아 서방 몰래 숨겨두었다가 샛서방에게만 먹였다는 샛서방 고기.
딱돔 구이를 안주 삼아 한 잔, 또 한 잔, 차고 맑은 소주를 마시다 우리는 아주 기분 좋게 취합니다.

밤이 깊어 한 시절 산문에 머물기도 했던 벗이 맑은 목청으로 법성게를 욉니다.
그 사이 귀밝은 보름달이 뒤 안 대숲을 빠져 나와 경을 듣습니다.
벗의 아름다운 게송에 답할 법력이 없는 나는 그저 옛시인의 시 한 구절 읊조리며 벗에게 화답합니다.

"대나무 그림자 뜰의 계단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 바퀴 물을 꿰뚫어도 수면에는 흔적조차 없다."

제대로 이룬 일 하나 없이 그저 여기저기 흔적이나 남기고 다니느라 분주한 생애가 오늘밤만은 모든 것을 벗어놓고 장엄하게 취해 봅니다.

더구나 달까지 이 먼 섬에 찾아 와 주었으니 세상의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진객을 맞이한 벗과 나는 달을 앞세우고 정자에 오릅니다.
둘이서 소리 없이 마신 술이 어느새 보해 막소주 한 되를 다 비우고도 모자랍니다.
나는 유자술 한 되를 차 주전자에 더 걸러 옵니다.
이제부터는 달과 셋이서 마십니다.

청나라 사람 장조는 "정월 대보름엔 모름지기 호탕한 벗과 술 마시고,
단오에는 고운 벗과 잔 나누며, 칠석에는 운치 있는 벗과 잔 질하고,
추석에는 담박한 벗과 술잔을 나누며, 중구절엔 뜻 높은 벗과 술을 마신다"고 했지요.

사월 보름, 달이 먼저 취해 서산 너머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벗과 나는 술잔을 놓을 줄 모릅니다.
오늘 밤, 나는 어떤 벗과 술을 마시고 있는지요.
오늘 밤, 나의 벗은 또 어떤 벗과 잔 나누고 있는지요.
어느새 먼동이 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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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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