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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 앞에 앉은 회사 후배의 전화통이 바쁩니다.

“있잖아. 내일 아무개가 전북 부안에서 결혼을 하는데….”

친구의 결혼 소식을 다른 친구들에게 알리는 전화였습니다. 한 5분 가량 계속된 전화는 다시 서너 군데 더 이어졌습니다. 통화 내용은 대부분 축의금을 알마나 낼 것인가를 두고 흥정을 하듯 이어졌습니다.

결혼하는 친구가 대학 친구들에게 15만원 정도를 만들어달라고 한 모양이었습니다. 앞에 앉은 직원은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상의했고, 결국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은 5만원씩, 취업이 안 된 친구들은 3만원씩 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습니다.

전화 통화 중간에 잠시, 돈을 꾸어 달라는 얘기를 한 모양이었으나 앞에 앉은 직원은 꿔줄 돈은 없다고 이어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배 직원의 전화 통화를 들으면서, 몇 달 전 어느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읽었던 ‘주례사의 조건’이란 글이 떠올랐습니다. 그 교수는 다름 아닌 현재 한겨레21에 논단을 쓰고 있는 대전대 정외과 권혁범 교수.

권교수는 50년대에 태어났으니 아직 주례를 설 상황은 아니지만, “제자들 중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주례를 요청하고 있어 몇 년 후에는 이 역할을 맡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미리 그 조건을 홈페이지에 적어 두었습니다. 그 글은 말 그대로 ‘내게 주례를 부탁하려면 이런 조건에 동의해야 한다’는 사전 공지사항이었습니다.

200자 원고지 5매 분량이 채 못 되지만, 이 ‘주례사의 조건’은 결혼을 앞둔, 혹은 결혼을 할 예정인 이들이 반드시 한번쯤 생각해볼 내용들이 대체적으로 망라되어 있습니다.

즉 결혼(식)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녀남차별적', 환경파괴적, 소비지향적 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더욱이 결혼식에서는 감히 ‘불경’스럽기까지 한 “이혼”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권교수가 밝힌 주례사의 첫번째 조건인 “결혼식은 검소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준비되고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누구나 고개를 끄덕거릴 말이니 넘어가도 무방할 듯 싶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조건 네번째인 “결혼 후에 되도록 검소하게 독립적으로 살며 생태계와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얘기를 듣고 보면 단순한 검소함만을 강조한다기보다는 친환경, 친생태적인 삶을 살 것에 대한 주문으로 해석할 만합니다.

북적대는 결혼식과 의례적으로 내는 축의금이 싫어 결혼식을 자주 가진 않지만, 가끔씩 참석해 들어 본 어느 주례사를 보아도 “사회적 약자의 권리”, “생태계”를 운운하는 주례 선생을 본 일이 없으니, 내 오지랖이 좁아서일까요.

아니면 결혼식이 새로운 삶의 출정식이긴 하지만, ‘좋은 게 좋고, 보편적인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게 주례사여야 한다는 통념적인 습관 때문일까요.

만일 후자라면, 이 통념을 깨는 주례사는 계속 이어집니다.

권교수의 ‘조건’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대목은 결혼식에서 발생하는 의례적인 '녀남차별'을 없애자는 내용입니다. 이는 신랑은 단독 입장, 신부는 아버지와 입장하는 기존 결혼식의 절차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권교수의 주례 조건은 “(신랑 신부) 둘 다 단독 입장하거나 아니면 양쪽 다 부모님과 함께 입장”하는 것입니다. 폐백 역시 아예 하지 말든가 양가에 모두 올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음 ‘조건’은 결혼식 후의 생활로 이어집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형태의 성차별에 반대하고 서로 평등하고 대등한 인격적 관계를 유지할 것을 맹세”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가사노동을 50대 50으로 분담할 것, 딸/아들 구별하지 말 것, 처가와 시가를 차별하지 말 것 등이 제시됩니다.

주례사의 조건은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도 그런 대로 받아들일 만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음 조건을 읽다보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집니다.

권교수는 신랑 신부가 “당연히 평생 사랑하고 백년해로 할 것을 맹세해야”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염두해 두라고 말합니다. 즉 “불행한 결혼생활보다는 이혼이 낫다”는 것.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에 결정적 파경이 왔을 때는 흉기나 주먹을 사용해서 희망 없는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지 말고 서로 재산문제를 공평하게 해결하며 깨끗이 헤어질 것을 맹세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사랑은 영원해야 하고 결혼은 한번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겐 청첩장 돌리는 마당에 불온한 기운이 잔득 묻은 듯한 ‘이혼’이란 말이 들어 있으니 기절할 만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권교수의 답은 간단합니다.

“사랑은 자유다!”

아직 권교수의 주례사를 들어본 일이 없는 관계로, 이런 권교수의 ‘조건’이 현실에서 얼마나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봄, 아직 결혼식을 해보지 못한 이들이나, 다시 한번 결혼식을 해볼 예정인 이들은 결혼 상대방을 고르는 만큼은 아닐지라도 한번쯤 심도 있게 생각해볼 대목이라 생각됩니다.

권교수가 제안한 ‘주례사의 조건’이 적어도 결혼생활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니까. 아니, 그 조건을 모두 받아들인다 해도 결혼은 충분히 기쁘고 즐겁게 치를 수 있으니까요.

아! 이 글을 쓰고 나니 제게 두 장의 청첩장이 배달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권혁범 교수는 대전대에서 ‘환경평화정치론’ ‘성과 문화의 정치학’ 등‘괴상한’ 정치학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근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이란 책을 펴냈습니다. 대전여민회 자문위원, 민화협 정책위원 , [당대비평]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권 교수의 홈페이지 주소는 http://dragon.taejon.ac.kr/~kwonhb입니다.

이 글은 2001년 2월 7일에 오마이뉴스에 올린 '다시 서른 살 사랑, 당신에게 묻는다'와 류의, 결혼에 대한 여러 생각에 대한 한 가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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