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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미국에 있어서 신문은 가장 중요한 뉴스원이었다. 이 시기 미국신문들에서는 객관적인 저널리즘, 즉 진실보다는 편집자들 개인의 뉴스 해석을 내보내는 것이 일상적인 관행이었다. 보도된 내용이 부정확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혔다 할지라도 대중들은 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런 식의 영향력으로 인해 신문들은 막강한 정치적 힘을 휘둘러댔다.

이 시기 신문발행인들은 구독 부수를 높이기 위해 요란스럽고 무책임한 뉴스보도 방식을 부추기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남용해 나갔다. 이런 보도의 대표적인 신문이 유명 신문재벌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저널(The Journal)'과 오늘날 우리에겐 퓰리처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요셉 퓰리처의 '월드(The World)'지였다.

샌프란시스코지역에서 이그제미너라는 거대신문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던 허스트는 1895에 뉴욕으로 진출해 <저널>지를 인수한 후, 당시 최고의 판매를 구가하던 경쟁사인 퓰리처의 <월드>를 따라 잡기 위해서 쿠바에서 발생한 반스페인 소요사태를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

허스트는 제목은 시꺼먼 글씨로 굵직하게 뽑아내고 검은 바탕에다 현수막식으로 만든 자극적인 헤드라인(banner headlines)에다 센세이셔널한 내용으로 신문지면을 장식해 나갔다.

허스트는 요란한 만평과 커다란 전면사설, 심지어는 컬러종이까지 동원해가며 독자들의 눈을 끌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를 통해 <저널>지는 구독자수를 늘이고 라이벌인 퓰리처를 성공적으로 공략하게 된다.

당시 뉴욕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양대신문의 발행인인 이들 두 사람의 이름은 오늘날 언론학 교과서에 나오는 옐로 저널리즘, 즉 황색언론의 대명사로 통한다.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에 옐로저널리즘에 관한 정의는 이렇게 나온다.

"신문발행에 있어 섬뜩한 피처(얼굴)기사와 선정적인 뉴스를 통해 독자들을 사로잡고 구독부수를 늘이는 것. 1890년대 뉴욕시의 양대신문인 월드와 저널이 저돌적인 경쟁상황에서 사용한 계략들을 쓴 것을 일컫는 말"

요셉 퓰리처는 1883년 뉴욕의 일간지 <월드>를 인수해 컬러플하면서 선정적인 보도를 통해 정치적인 부패, 사회적 부정에 대한 일대 대결을 선언한다. 그의 주도권은 그러나 1895년 캘리포니아주 광산재벌의 아들인 윌리엄 허스트의 저널지 인수로 도전을 받게 된다.

허스트는 이그제미너지에서 일하던 수하의 글쟁이들을 데려오는 한편 퓰리처의 신문으로부터 기자들과 유명한 시사만화가인 리처드 아웃콜트를 스카웃해 온다. 당시 아웃콜트는 '더 옐로우 키드(The Yellow Kid)'라는 코믹만화를 일요판 <월드>지에다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한몸에 받은 인물이었다.

아웃콜트를 빼앗겨버린 <월드>지가 조지 룩스라는 새로운 만화가를 영입하면서 시작된 두 라이벌의 만화시리즈 경쟁은 독자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자극했다. 옐로 키드는 노란색 옷을 입고 등장하는데 이 옐로 키드를 두고 두 신문사가 벌이는 경쟁을 가리켜 사람들은 "옐로 저널리즘"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런 저돌적인 경쟁관계와 구독판매 확대를 위한 양사의 전면적인 격돌은 그후 많은 미국 도시들의 언론판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시기 언론의 내적 지향점은 한마디로 "드라마가 돈을 만든다"는 것이었고 독자들에게 제시되는 진실의 정도는 중요하지 않게 취급했다.

이쯤 되면 이것이 1890년대에서 미국의 현실인지 지금 한반도의 현실인지 분간이 쉽지 않다. 한국판 언론들은 오늘날 아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옐로 저널리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조중동이즘은 적자타령 빼고는 옐로 저널리즘의 복사판

옐로저널리즘과 국내 신문들의 관행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황색지들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선정적인 보도기법을 동원함으로써 막대한 물질적 성공을 구가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인 <월드>지의 퓰리처와 신문재벌 허스트가 신문사업을 통해 거대한 부를 모으는 것과 거대 언론재벌로 부상하는 일부 국내 언론기업들의 방만한 경영은 흡사하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국내 신문사들은 옐로저널리즘과는 달리 한두 개 신문사를 빼고는 한결같이 적자를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한두 해도 아니고 매년 적자를 보면서 길게는 수십년간 버틸수 있다는 것은 국내 옐로 저널리즘, 즉 조중동이즘(조선 중앙 동아 + journalism/조중동-ism))만의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그 실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조중동이 옐로 저널리즘에 한 가지 뒤지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이익창출 기술 부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신기한 사실은 허구한 날 적자타령을 하면서도 문닫는 언론사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조중동 저널리즘은 적자를 메꾸거나 그 폭을 줄이는 데 특별한 기술이 있거나 아니면 국가공기관의 세금납부를 조직적으로 회피하는 기술, 즉 국가제도에 대한 음성적인 학대기술이라는 측면에 있어 옐로들을 능가하는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자극적인 제목이나 내용으로 독자들을 현혹하는 것에서부터 왜곡보도, 확대 축소 자의적 보도, 저돌적인 구독자 확보 등 기업운영방식 측면에 있어서 한국신문들은 미국 옐로저널리즘의 완벽한 복사판이다.

역사적 요소들은 단지 돈벌이의 수단일 뿐 "전쟁 만드는 것도 마지 않겠다"

우선 역사적인 현실과 사건을 부수확장과 돈벌이 수단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간에는 이견이 없다. 그 결과는 역시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일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뉴욕의 양대 옐로 신문은 1898년의 미-불 전쟁(Spanish-American War) 발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이들이 스페인과의 갈등을 자사 신문의 구독자를 확대하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페인에 대한 반란소요가 일어난 쿠바 현지에다 특파원을 파견하고 일방적으로 왜곡된 기사를 내보냄으로써 갈등을 조장하는 데 앞장섰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한국 신문들이 오늘날까지도 남북의 갈등상황을 구독자 확보, 즉 돈벌이 수단으로 보고 갈등과 대결의식을 부추기는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이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들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것을 대비해 기사를 내보내고 성금을 모금한다든지 하는 등 한국 현대사에 있어 남과 북의 갈등을 조장한 보도사례는 옐로 저널리즘으로 하등 손색이 없다.

조중동 저널리즘의 이런 보도는 비단 '대외'적인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국내상황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정치권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사회적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것은 일상화되어 있다. 모든 사안에 대한 보도의 제목은 "여-어쩌구 저쩌구 하다. 야-어쩌구 저쩌구 하다"하는 식의 갈등제조형이다.

당시 미국의 옐로 저널리즘은 말이나 소문, 편지 외에는 독자들이 보도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시대적인 상황에 편승해 '제멋대로' 사실을 확대 왜곡 축소하는 일들을 일삼았다. 허스트와 퓰리처는 선정주의적인 반-스페인 감정을 자극하는 기사들을 동원해 미국인들의 애국정신에 호소했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기량을 가진 '창작' 작가들과 '작품' 만드는 데 세련된 기자들을 동원해 전쟁의 불꽃을 모락모락 지피고 있었다. 신문들은 국민들에게 스페인에 의한 쿠바인 반란군에 대한 증빙되지 않은 잔학성을 알림으로써 미국민들 사이에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그러나 쿠바인들에 의한 잔학행위는 일체 다루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사주들은 기자들에게 기사를 고무줄처럼 늘이거나(stretch) 왜곡(distort)할 것을 요구했고, 가장 지저분하고 폭력적인 내용을 부각시키는 기사들을 택했다. 이들은 스페인과의 전쟁이 신문을 팔아먹는 데(돈벌이) 가장 완벽한 주제로 봤기 때문이다.

구독자 확보 무한경쟁에선 차라리 조중동이 '옐로'의 한수 위

광기어린 구독자확보 경쟁에서도 조중동과 옐로 양자간에는 별 차이가 없다. 허스트는 저널인수 후 신문값을 단돈 1센트로 내리고 지면을 늘이면서 무한경쟁으로 치달았다. 그는 퓰리처를 모방하면서 값으로 승부하려 했다. 퓰리처도 이에 뒤질세라 같이 1센트로 내리고 대응했다.

국내 중앙일간지들이 거의 다 월1만원에 부당 400원(20센트)이라는 천편일률적인 구독료를 받는 것도 다 옐로 '선배'들이 밟았던 전철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는 조중동식이 옐로 저널리즘을 능가할지도 모른다. 조중동식은 아무리 불공정 경쟁을 자제하자고 말해도 돌아서면 끝이다. 구독자 확보를 놓고 판매요원들간의 살인이라는 세계언론사상 전무후무한 사건까지 선보인 것이 조중동식의 경쟁관계가 아니던가. 경품제공이나 강매 등 조중동 언론의 눈물겨운 구독자 확보 경쟁은 더 이상 뉴스가치도 없는 상황이다.

왜곡보도 면에 있어서는 두말할나위 없다. <저널>지는 스페인 지배자들의 학정에 반대한 지역반란군들에 대해서 열렬하게 지지를 선언했다. 한심한 것은 허스트는 스페인측 소스로부터 나오는 뉴스는 아예 게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란군 정보원들만이 신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저널리즘의 기본원칙, 즉 객관성에 대한 파괴는 '보수적'인 언론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현실은 먹혀들어갔다.

이것은 독자들에게는 흥미진진한 읽을거리였고 사람들은 <저널>지에 나오는 반란군의 주장을 듣기 위해 뉴스판매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 내용은 '스페인 악당'들과 '쿠바인 영웅'에 대한 단순한 묘사에 불과했지만... '허풍이라도 어쨌든 신문은 팔린다'는 것, 즉 '드라마가 돈은 만든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사라져간 망령, 우리에겐 현재 진행형

미국의 옐로저널리즘과 조중동이즘이 또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옐로저널리즘이 미국에서는 스스로 꼬리를 내린 과거형이지만 국내에서는 아직도 진행 중인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퓰리처가 월드를 인수한 것이 1883년이고, 허스트의 등장과 함께 옐로저널리즘이 1890년대 말에 창궐하다가 1900년대 초반 새로운 세기의 도래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한국의 옐로 저널리즘은 192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 지금 2000년를 넘긴 시점까지 치닫고 있는 중이다. <조중동이즘>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2000년대 초반으로 접어들기 전까지 조중동이즘으로 상징되는 한국판 옐로저널리즘은 승승장구를 구가했다.

이제 정론지들의 잇단 창간과 인터넷의 등장 등은 한국판 옐로 저널리즘의 실체를 서서히 드러내게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조중동이즘이 남긴 흔적은 우리 사회의 언론문화 각 부문에 깊숙히 절여져 있다.

현수막(banner)같은 대형 제목에다 갈수록 컬러화되는 화려한 일러스트레이션 등 이들이 남긴 보도기법에서 상당수 언론들이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다수 국내 일간지들은 얼마 전부터 현수막식 제목달기 방식에서 탈피하고 있으나 여전히 조중동 언론이 하는 것처럼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달아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중동이즘은 여전히 이 사회의 흐름을 주도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미국에서 옐로 저널리즘은 정론지들과의 경쟁에서 결국 이겨나지 못한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옐로 저널리즘이 엉뚱하게도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보기에는 너무나 무참하다. 광주민중항쟁을 '폭도'로 전한 조중동이 지금은 '대정부 투쟁'을 말하며 '언론민주화'의 기세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조중동이즘>의 '신화'는 언제 가야 과거 한 시대의 옐로 저널리즘쯤으로 회자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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