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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의 잘못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당시 면직처분을 받아 퇴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퇴사했는데 5년이나 지난 후 6억원을 변상하라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말단 직원에다 여성이라 모든 책임져야 하는가요?"

지난 96년 '한국은행 구미사무소 9억원 사기인출' 사건으로 면직 당했던 백아무개(40. 대구 달서구) 씨는 요즘 6억원을 변상하라는 한국은행(이하 한은)의 요구에 할말을 잃었다.

"이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그 일이 다시 문제가 되니 답답하기만 하고... 제가 말단직원에다 여성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의구심만 들죠."

96년 한은 구미사무소 9억원 사기대출사건

백씨는 한은 대구지점에서 17년 간 일하다 6개월 동안 구미사무소로 파견근무를 지시받고 출납담당으로 근무하던 지난 96년 2월 17일. 당시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토요일 오후, 백씨는 대동은행 직원을 사칭한 남자 2명에게 지급준비금 9억원을 인출해 줄 것을 요구받았다.

당시 2명의 남자가 백씨에게 건네준 지급준비예비금 수표(한은 당좌수표)에는 9억원이 명기돼 있었고 대동은행 구미지점 이아무개 대리가 발행인으로 기입, 인감도장도 찍혀 있었다. 백씨는 당시 대동은행 직원을 사칭한 사람으로부터 '미정사(신권이 아닌 것. 은행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 9억원을 준비해 달라'는 전화까지 받은 터라 별 의심 없이 '인감대조를 한 후' 구미사무소 김아무개 대리 전결로 현금 9억원을 2명의 남자에게 지급해 줬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날 오후 대동은행 구미지점은 한은 구미사무소로부터 지급준비금 잔고 통보를 받고 사기 인출이 있었음을 확인했고 경찰에 신고, '구미사무소 사기인출'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경찰조사에 따르면 백씨가 받았던 수표는 이미 대동은행 구미지점이 분실했던 수표로 밝혀졌다. 하지만 범인으로 지목 받은 남자 두 명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고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미궁으로 빠졌다.

이 사건은 당시 대동은행 구미지점이 수표 관리가 허술했다는 점을 인정해 피해액 9억원을 자체 해결(회계장부상 가지급 처리)했다. 한편 한은 쪽도 백씨에게 수표상의 위조된 인감도장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책임으로 면직처분 및 실명제법 위반으로 500만원의 과태료 처분을 내리고 당시 구미사무소 석아무개 소장은 면직 처분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대동은행 파산이 다시 문제를 확대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된 것은 대동은행이 지난 98년 파산선고를 받고 난 후에 발생했다. 대동은행 파산관재인이 99년 4월 한은을 상대로 '지준예치금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법정싸움으로 비화됐다. 사법기관은 한은의 일부 패소 결정을 내렸고 한은은 대동은행에게 이자를 포함한 12억원 손실금 중 6억원을 지급하기에 이르게 됐다.

이에 따라 한은 쪽은 작년 2월 출납담당자였던 백씨 명의로 돼 있던 아파트 등 재산 가압류조치를 취하게 되고 그 후 감사원의 감사 결과(감사원법 제31조 5항 '변상판정집행절차에 관한 규칙')에 따라 백씨에게 변상판정을 내리게 됐다.

면직처분을 받고 퇴사한 후 심적인 안정을 찾았던 백씨는 다시 사건이 불거지고 재산에 대한 가압류 처분 조처까지 받게 되자 망연자실하고 있다. 또 백씨와 가족들은 이번 한은 쪽의 '책임추궁'에 대해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백씨,"왜 나에게만 변상 책임이 있는가"
한은,"감사원 감사결과 백씨 변상해야"


우선, 백씨가 항변하고 있는 점은 당시 구미사무소에서 관행화된 지급준비금 업무처리 과정을 문제삼고 말단 직원이었던 자신에게만 변상을 요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백씨의 남편인 엄아무개(44. 강사) 씨는 "일선 출납담당으로 인감대조의 실수는 인정할 수 있다치더라도 당시 관리 감독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구미사무소 대리, 과장, 소장 등에게는 변상 책임을 묻지 않고 유독 아내에게 변상을 요구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당시 구미사무소는 출납과정에서 소장 결제까지 거쳐야 하는 중요업무를 대리전결로 처리하고, 사건 당일에도 각종 이유를 들어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있었다. 결국 관행화된 출납과정의 책임을 백씨에게만 묻는 것은 억울하다는 말이다. 또 엄씨는 "당시 구미사무소엔 일선 은행에도 갖춰져 있는 CCTV 등 보안시설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아서 사후에 범인을 검거하는 데도 어려움을 빚게 해 한은 쪽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백씨 쪽은 대동은행 파산관재인이 소송을 제기한 후에도, 한은 쪽은 당시 '사기인출' 사건의 당사자인 백씨에게 재판에 대해 알리지도 않았다는 점을 문제삼고 있다.

한은 대구지점 박재익 총무과장은 이에 대해 "한은 담당 변호사가 법률검토를 한 후 굳이 백씨에게 알리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또 한은 입장과 백씨의 입장이 동일한데 특별히 통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백씨는 "당시 일선에서 업무를 본 사람이 적극적으로 반론을 했다면 소송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는 것 아니냐"면서, "자신의 반론기회도 상실시키고 조용히 수습하려 했던 한은 쪽의 의향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각서 한 장이면 해결됐다. 5년이 지난 지금 왜 그러냐"

무엇보다 백씨와 가족들은 사건발생 후 한은 쪽이 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해 문제가 자신에게까지 확대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백씨는 "96년 사건이 발생하고 대동은행장이 직접 책임을 대동은행이 지겠다고 약속했는데도 한은이 각서를 제대로 받아놓지도 않았다. 결국 대동은행이 파산하고 한은이 소송에 패소해서 6억원을 물어줘야 되자 5년이 지난 지금에야 자신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은 쪽은 "당시 회계상에 가지급 처리하겠다고 대동은행이 확인해 줬다"면서 "굳이 각서를 써달라고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백씨는 감사원의 감사결과에 대해 재심 청구를 요청한 상태에 있다. 만약 재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관할 세무서로부터 변상액 6억원에 대해 재산 강제처분을 받게 되고 갚지 못할 시엔 앞으로 5년(소멸시효)간 재산권에 대한 제약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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