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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통령의 방미 정상회담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중이다. 부시 취임식만 지나면 빠를수록 좋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년 봄으로 예정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등 남북간 현안을 진전시키기가 어렵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 공화당을 막론하고 동맹국 정부의 정책을 따르는 게 미국의 기본입장이어서 대북 포용정책을 통해 한반도 화해.협력과 북한의 개방.개혁을 유도하고 있는 한국 정부를 계속 지지할 것이다."

둘 다가 우리 정부당국자들이 했다는 말이다. 조지 부시의 당선과 클린턴의 방북무산을 놓고 우리 정부 당국이 보인 이 두 가지 반응은 우리 대미외교 역량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는 우리 대미외교의 수준이 아직도 과거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대통령이 새로운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만나자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취임 전에 있는 상대방에 대해 만남을 '애걸'하는듯한 인상을 줌으로써 우리 외교는 또 다시 철학부재와 냄비근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미국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남북간 현안을 진전시키기가 어렵다"는 식의 사고는 대체 어디서 나온 논리인가.

정부 당국의 이런 대응은 미국을 동등한 대화 상대로 보려하기보다는 우선 미국의 의중부터 떠보는 전형적인 눈치외교의 전형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취임도 하기 전인 상대국 대통령에 대해 "만나달라"고 안달하는 것은 외교관례나 국가위신상 있어서는 안 될 저자세 외교, 사대외교의 전형이다. 뭐가 그렇게도 급하다는 말인가.

외교당국자들의 발상은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여전히 미국이 우리의 '동맹국'이라고 스스로 믿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더 가관인 것은 "동맹국 정부의 정책을 따르는 것이 미국의 기본입장"이라고 믿고있는 정도의 수준이라는 점이다.

정부당국자들은 과연 미국이 한국 정부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인가. 미국이 한국 정부와 보조를 맞추는 일이 있다면 그것만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할 때일 것이다. 미국은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한국 정부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해 '동맹'이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한국이 미국을 '동맹국'으로 믿는 것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다. 우리 정부당국자의 말대로라면 "미국 정부는 '동맹국'인 한국 정부의 정책을 따르는 것"이 관례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지금 부시행정부의 집권과 클린턴의 방북무산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믿지 못할 '동맹국'도 다 있는가.

지구상에서 미국을 동맹국으로 믿는 나라는 서유럽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보기 힘들다. 유럽과 일본이 미국의 동맹임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이 자신들의 안보와 이익을 대신해서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그 동맹관계는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표피적 제스처'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그래도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침해하려 할 경우 단호하게 '노'라고 말하는 입장이다. 그것은 그들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최소한의 대등한 권리를 확보하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들에 있어 미군의 주둔 역시 자신들의 이권을 계속 지켜나가기 위한 일종의 무력시위인 셈이다.

그러나 제3세계 국가중 미국이 아직도 자신의 동맹국이라고 철저하게 믿는 나라는 우리 한국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상대방에 자신들의 이익을 여지없이 강요하는 초강대국이 어찌 자신의 '동맹'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가? 우리가 미국을 동맹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과연 '가진 자' 나라이고 유럽이나 일본처럼 기득권을 누리는 나라인가?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우리는 여전히 미국으로부터 실속을 못 차리는 입장이다. 만약 우리가 미국과 가까이 하지 않고 일찍부터 적절하게 중국과 러시아, 유럽 등 다른 나라들을 적재적시에 활용하는 균형잡힌 외교정책을 구사해 왔으면 미국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봤을 것이고 한국은 지금보다 크게 다른 나라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젠 좀 현명해지자. 미국이 진정 우리 '동맹국'이라면 그 동맹국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반대급부란 과연 무엇인가? 주한미군? 안보? 경제적 배려? 과연 그것이 한국을 위한 안보이고 상대의 이익을 배려한 동맹국의 '선행'인가? 미국은 오히려 한국의 경제적인 도약과 자율적인 안보능력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알레르기를 보이는 나라이다. 미국은 한국을 결코 자신들의 잠재적인 경쟁자로 자라나는 것을 묵과하지 않는 나라이다.

IMF사태 이후 자신들의 잠재적인 경쟁자인 국내 자동차산업에 대해 감행한 무차별 공습을 통해, 과거 박정희의 자주국방 노력을 무자비하게 제압하는 대한반도 정책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똑똑하게 경험했다. 미국이 지금도 IMF를 통해 한국에 대해 구조조정을 촉구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보다 통일된(unified) 코드가 필요해서일 뿐이다.

미국은 한국과 더 나아가 통일 한국이 자신들의 우산 아래 있지 않을 것이라면 결코 한반도의 통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남과 북이 궁극적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성취하는 것은 순전히 스스로의 의지와 세계여론에 달렸을 뿐이다. 미국의 '도움'으로 이를 이룩하겠다는 것은 엄연한 공상이다. 엄밀히 말해 미국은 오히려 그 반대입장에 서 있다고 해야 옳다.

지금 미국이 한반도 정세를 놓고 얼마나 치열한 수읽기에 몰두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정부당국자들이 "동맹국" 운운하며 자기 상상대로 해석하는 자세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미국을 붙잡고 설득하려는 모습은 외세인 당나라의 힘을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해 보려는 신라의 의도와 하등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한국 정부는 미-일과의 공조를 통한 대북정책의 구현이라는 신라적 환상에서 하루속히 깨어나야 한다. "한국과 일본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대북정책을 펴나가야 한다"는 것은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미국정부가 어김없이 내놓는 단골 메뉴이다. 신판 당나라인 미국과 일본이 신라, 즉 한국의 이익을 생각해 줄 리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익을 위해서 한국을 끌어들일 뿐이다.

이젠 미국에 질질 끌려가는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은 그만두어야 한다. 정상적인 관계라면 정상회담을 요청해야 할 쪽은 사실 미국측이다. 우리가 답답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또 미국의 공화당 신임 정부가 설득한다고 해서 먹혀 들어갈 정부도 아니다. 미국이 따라가는 것은 어떻게 손보기가 힘든 현실의 흐름일 뿐, 우리의 의도가 아니다. 그 힘의 흐름을 확인해 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과거 10년동안 미국이라는 환상에 빠져 거의 파탄상태로 치달은 러시아가 이제서야 푸틴이라는 한 탁월한 지도자의 등장과 함께 제목소리를 냄으로써 국가위신을 되찾아가고 세계 무대에서 강대국으로 다시 살아나는 이유를 우리는 주목해야 하며, '교만한' 미국에 대해 서슴없이 경고장을 날리는 고르바초프의 혜안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우리 정부는 그 길고 긴 사대외교의 끈을 이제는 끊어야 한다. 그렇지않다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미래란 없다. 부시행정부의 등장은 그것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미국을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더 이상 미국의 눈치나 보고 끌려 다녀서는 안된다. 우리 길을 눈치보지 말고 간다면 오히려 두려워 할 쪽은 미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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