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을입니다.

길고 지리했던 무더운 여름이 가고 어느새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씨가 성큼 다가왔습니다. 비 한방울 내리지 않고 맹위를 떨치던 무더위도, 정직한 시간의 흐름은 어찌하지 못하는지 이 곳 텍사스에도 가을이 찾아 왔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오가는 캠퍼스에 나무만큼이나 많은 것이 다람쥐입니다. 무슨 할 일이 그리도 많은지, 강의와 일에 치여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저보다도 더 바빠 보입니다. 쉴새없이 나무를 오르락 내리락하거나 잔디밭에 무엇을 떨어뜨린 양 하루종일 바닥을 뒤지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바로 며칠전에는 아주 중요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한 다람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입에 물고 있던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땅에 묻고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그 곳에 가서 땅을 파헤쳐 보았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하루 시간을 내어 아주 작정을 하고 카메라와 땅파기용 나뭇가지를 준비한 후 다람쥐를 기다렸습니다. 역시 기다린 보람이 있게 다람쥐는 예상 출몰지역에 나타나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람쥐가 얼마나 겁이 많은 녀석인지 가까이 다가가기라도 할라치면 쪼르륵 나무로 올라가 버리거나 어딘가로 숨어 버리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 조명신
학교를 오갈땐 멀찍이 지나가도 쳐다보지 않던 다람쥐들이 낯선 관찰자에게 이상한 징후를 느꼈는지 좀처럼 일상생활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제일 만만하고 바빠 보이는 한 녀석이 제 사정권에 들어 왔습니다. 오랜시간의 숨박꼭질 끝에 녀석은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바쁘게 뛰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무심한듯 지나치며 녀석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지요.

녀석은 먼저 어디에선가 가져온 나무 열매의 껍질을 입으로 뜯어내더니 그 속의 하얀 알맹이를 입에 물고 이리저리 돌아 다녔습니다. 마음에 드는 장소라도 발견했는지 갑자기 두 손 - 발이라고 하기엔 너무 손처럼 사용하더군요 - 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 조명신
만족할 만큼 땅이 파졌는지 입에 물고 있던 하얀 열매를 그 구덩이에 넣고 꾹꾹 누른 후 다시 흙으로 묻었습니다. 주위에 흩어진 나뭇잎과 나뭇가지로 적당히 위장을 한 후 녀석은 유유히 사라져 갔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숨어 사진을 찍다가 행여나 그 위치를 다시 놓칠까봐 재빨리 그 곳으로 가보았지요. 역시! 녀석의 솜씨는 감탄할만 했습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마무리를 해 놓은 그 솜씨.




ⓒ 조명신
그러나 한 번 속지 두 번 속겠습니까. 머리 속에 각인시켜 놓았던 바로 그 장소를 정확히 공략했더니 그 속에서 문제의 하얀 열매가 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 조명신
그렇다면 이 열매는 과연 무엇일까요? 문제는 항상 그 출발에 답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처음 그 녀석을 보았던 나무로 가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나무에는 무척이나 많은 바로 그 열매가 달려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다람쥐가 그 껍질을 벗기기 전의 상태인 연두빛의 껍질이 붙어 있었다는 것이지요.

ⓒ 조명신
그리고 그 나무 밑에는 얼마나 많은 다람쥐들이 오고 갔는지 아니면 그 녀석 혼자 그렇게도 부지런히 다닌 것인지 무수히 많은 그 열매의 껍질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 껍질만 보더라도 이 나무가 그 녀석의 작업 대상이라는 확실한 증거 아니겠습니까?




ⓒ 조명신
그러나 나무 열매에 대한 경험이 일천한 제게 누군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지요. 우선 나무 열매를 몇개 채집한 후 한 미국아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피칸(pecan, 북미산 호두나무의 일종)이라고 하더군요. 가을이 되어 열매가 완전히 여물면 겉의 껍질이 벌어지면서 안의 열매가 저절로 땅에 떨어진다는 설명과 함께.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녹색의 껍질은 코르크 층과 비슷한 섬유질이고 그것을 벗겨내면 아직 덜 여문 하얀 열매가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피칸이라네요.

ⓒ 조명신
자, 이제 그 녀석의 간첩과도 같은 괴이한 행동의 비밀이 풀렸습니다. 다름아닌 겨울을 나기위한 월동준비입니다. 베짱이와 같이 노래 부르며 가을을 탕진하지 않고 땀흘려 겨울양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묻어 놓은 그 수많은 피칸의 위치를 다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루종일 땀 흘려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그 작은 생명 앞에서 경외감을 느꼈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계절이 바뀌는지 겨울이 오고 있는지 무감각한 제게 다람쥐의 바쁜 하루는 큰 교훈이 됩니다.

여러분은 겨울을 준비하시고 계시나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