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자라면...
서점 앞을 지나가다,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여러 잡지들에 한번쯤 눈길을 주곤 한다. 여자들의 미장심리와 구매욕구에 맞춘 수십가지의 패션잡지들. 고등학생을 위한 패션지에서부터 중년을 위한 패션지, 그리고 상류층을 위한 패션지 등, 각양각색이다. 잡지 또한 유명브랜드처럼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보그(VOGUE), 바자(BAZAR), 코즈모폴리탄(COSMOPOLITAN), 휘가로(FIGARO), 위드(WITH) 등 대부분이 미국, 프랑스, 일본에서 수입되어 한국판으로 출판되고 있다.

이러한 잡지들을 쭉 훑어보면, 잡지의 반이 광고다. 패션지의 광고는 의상과 잡화, 화장품 선전 등이 대부분이다. (패션계 사람들은 이런 잡지용 광고를 '비쥬얼 광고'라고 부른다) 말이 광고이지, 예쁜 모델들이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찍혀져 나와, 광고를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꼭 예술사진을 보는 것처럼...

그런데, 그 비쥬얼광고가 문제다. A 패션지 10월호에는 85개 정도의 의상브랜드 비쥬얼광고가 실려 있는데, 이 중 36개 광고가 국내브랜드고, 나머지가 수입브랜드다. 일명 '명품브랜드'로 불리우는 이러한 수입브랜드들의 비쥬얼광고에 '금발에 파란눈을 가진' 슈퍼모델들이 등장하는 것이 그리 어색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36개 국내브랜드 광고중, 단 3개의 광고에서만 한국모델들을 찾을 수 있고, 나머지 광고들은 수입브랜드 광고와 마찬가지로 외국모델들이 서로서로 비슷한 포즈와 옷차림으로 등장한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모든 광고가 수입브랜드를 선전하는 것으로 알 정도로 외국모델 일색이다. 그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슈퍼모델들도 몇 명 등장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한국모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잡지의 비쥬얼광고를 찍는 것은 그리 '돈'이 들어가는 작업은 아니다.
TV광고에 비교한다면, 탤런트 한 명에게 몇 억씩을 지불하며 광고를 찍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한 시즌에 10에서 20컷을 찍는 한국모델들은 얼마나 받을까?

보통, 모델계에 바로 입문해서 처음으로 비쥬얼광고를 찍는 모델들은 60만원 정도를 받는다. 그리고 몇 번 경험이 생기면 100만원 정도를 받고, 어느 정도 경륜이 생기면 200~300만원, 그리고 인지도가 많은 모델이면 500~800만원까지 받기도 한다. 물론 TV스타나 유명탤런트들은 몇 천만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비쥬얼광고는 사진작가와 함께 작업을 하기 때문에 프린트비까지 포함, 사진작가에게 들어가는 돈이, 300~400만원, 이렇게해서 보통 한 시즌의 비쥬얼광고를 찍는 데는 총 1000~1500만원의 비용이 들게 된다.

그렇다면, 외국의 모델들을 섭외해서 비쥬얼광고를 찍는 데는 얼마가 필요할까?

외국모델들은 뉴욕이나 파리, 밀라노에서 활동을 하기 때문에 그들을 모델로 쓴다는 것은 그들을 위해 어디든 달려가겠다는 말이 된다.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때문에 보통 그 모델이 소속된 에이전시를 통해서 계약을 하게 된다.

세계적인 모델을 쓸 경우, 그 모델과 작업을 많이 해서, 자신의 장점을 잘 표현해주고, 개인적으로 친한 사진작가까지 함께 계약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모델, 사진작가, 그 외의 스탭들에게 나가는 돈과 그들이 묶는 호텔비, 식사비 등, 부차적인 것까지 광고를 찍는 국내브랜드가 떠맡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한 시즌당 10컷 정도를 찍는 총 비용은 몇 천만원에서 시작해, 슈퍼모델을 쓸 경우 1~2억을 호가하게 된다. 결국, 외국의 유명모델을 기용해 찍을 경우는 한국모델을 찍을 때보다 10배 정도의 돈이 들어가게 된다.

① 왜 외국모델을 쓰는가?

'유'에서 '유팜'이라고 이름을 바꾼 이 브랜드의 광고를 보면, 카르멘이라는 슈퍼모델이 몇 개월 전 '나인식스뉴욕'이라는 브랜드의 광고를 찍은 것과 너무도 비슷하게 나왔다. 이 회사의 홍보담당자는 '유'에서 '유팜'이라는 브랜드로 리뉴얼링(브랜드를 다시 새롭게 이미지작업 하는 것)을 했으며, 브랜드의 이미지를 가장 잘 소화해 낼 모델로는 섹시하면서도 지적인 카르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모델, 카르멘이 아니면 안되었다는 이야기다.
carmen
▲ 2000년 '나인식스뉴욕' 봄시즌 광고의 카르멘(왼쪽)/2000년 '유팜' 겨울시즌 광고의 카르멘(오른쪽)
ⓒ visual photo

외국의 일류모델들을 쓰는 이유를 종합해보면, 첫째, 분위기가 좀더 멋지게 연출된다는 것이다. 둘째, 외국모델을 씀으로써 브랜드 자체의 이미지를 고급화하기 쉽고, 셋째, 그럼으로써 가격을 올려도 잘 팔린다는 것이다.

'유'라는 브랜드는 처음 10~20만원대의 캐쥬얼 브랜드였으나, '유팜'으로 브랜드명을 바꾸고, 카르멘이라는 슈퍼모델을 비쥬얼 광고에 내보내면서 리뉴얼링, 70만원대의 고급 부띠끄 브랜드로 다시 태어났다. 이 밖에 VOV(Voices of Voice)라는 브랜드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국모델들을 기용한 캐쥬얼브랜드였으나, 외국모델들을 광고에 투입, 리뉴얼링해서 가격대도 올리고, 브랜드 자체의 이미지를 고급화했다. 결국 유명한 외국모델의 사진으로 브랜드와 가격대가 고급화되어 사업성도 향상된 것이다.

② 세계시장에 내보내는 광고가 아닌데도, 외국의 슈퍼모델을 꼭 써야 하는가?

세계적인 명품브랜드는 세계적인 슈퍼모델을 기용, 전세계에 같은 광고를 내보낸다.
그러나, 슈퍼모델이 등장하는 국내 대부분의 비쥬얼광고들은 국제용이 아니라 내수용이다. 단지 우리나라에서 돌고 도는 광고를 위해 몇 천만원에서 몇 억씩을 투자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③ 과연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일인가? 국가의 외화유출을 높이는 일인가?
trish goff
▲ 국내브랜드의 비쥬얼광고에 등장한 슈퍼모델 트리시 고프
ⓒ 라임

외국모델을 쓰면 브랜드의 이미지가 고급화되고, 디자인도 고급화되어 결국 세계화에 성공, 한국의 패션경쟁력이 높아진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외국모델이 얼마나 국내브랜드의 세계화와 고급화에 기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트리시 고프라는 모델은 자신이 한국브랜드의 비쥬얼광고를 찍은 줄도 모른다고 한다. 결국, 그 와중에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의 모델계이다.

의상디자인이나, 광고, 사진쪽은 세계적, 예술적으로 성장이 가능하고, 연출력이 발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체적 조건이 외국모델을 따라가지 못하고, 분위기가 전혀 다른 한국모델들은 결국 설 곳이 줄어들 것이다.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양계 모델들은 그 수가 매우 적다. 모델들의 노력여부에 관계없이, 일류 모델들이 갖추어야 할 신체적 조건과 얼굴선의 윤곽, 등 선천적인 부분에서 동양계 모델들은 흑인모델들보다 활동범위가 협소하다. 세계시장을 뚫기 어려운 현 상황에서 한국시장까지 한국모델들을 외면해 버리는 한, 그들이 설 곳은 더욱 더 비좁을 수밖에 없다.

소식통에 의하면, 뉴욕의 몇몇 호텔에서는 유명한 슈퍼모델들과 계약하기 위해 국내 경쟁사보다 더 많은 모델료를 제시하는 한국인 고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그러니 세계의 모델들과 에이전트들이 한국인을 봉으로 여기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매일 더 많은 모델료를 요구하고, 한국인들은 더 높은 액수의 모델료를 주고서라도 원하는 모델과 계약을 성사시킨다.

모델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는 금새한빛 씨는 말한다.
"한국의 고질적인 유행병과 경쟁심리 때문이지요. 세계시장이 국내시장과 엄연히 다른데도, 어떤 모델이 잘 나간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 모델을 기용해 광고를 찍고, 그런 소식을 들은 국내의 경쟁사들이 너도나도 그 모델에 버금가는 다른 모델들을 기용해 광고를 찍지요. 결국 국내브랜드들이 지나친 경쟁심에 젖어, 외화를 낭비한다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는 한국인의 인종주의도 한몫 한다. 동양인도, 흑인도 아닌, 백인모델을 써야 브랜드이미지가 고급화된다는 선입견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브랜드를 리뉴얼링해 고급이미지로 바꾼 회사의 비쥬얼광고에 동양인이나 흑인이 나온 경우는 극히 드물다.

결국, 많은 브랜드들이 고급화, 고급화를 부르짖으며 가격대를 올리는 이유는 요즈음의 소비심리가 "비싸야 더 잘 팔리는"것에 착안을 두지 않았나 싶다. 세계화, 고급화.. 그런 말들이 공허하게만 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기사 작성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패션계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적당한 한국어로 많이 바꾸었으나, 브랜드, 비쥬얼 등 바꾸지 못한 단어도 있음을 양해해주십시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