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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은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오는 길에 마음의 추녀 끝에 풍경을 달았다"고 노래했지만, 와불을 친견하고 난 뒤 나는 마음이 쇳덩이처럼 무거워 더 이상 마음에 무엇을 매달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대웅전 추녀끝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운주사 그 밤, 천년의 쓸쓸함이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천년을 자리에 누워 있던 부처.
천년이 가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됐으나 미동도 않는 부처.

쌍계사 아래 백운장에서 일박하고 피아골 연곡사와 구례 운조루에 잠시 들렀다 저물녘에야 운주사에 도착했습니다.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여행자들은 눈에 띄지 않고 취로 사업 나온 사람들이 간벌을 하는지 절 주변 산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들립니다.

일주문으로 들어선 나는 절집은 먼 발치에서 한 번 건너다 본 뒤 바로 와불이 계신 산 속으로 향합니다.
암벽에 기대 서 있는 석탑들, 벼랑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부처들.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부처의 옷자락 한 끄터리나마 붙들어 보려고 나는 이 곳까지 달려 왔던 것일까요.

산 정상, 부처는 미동도 없이 누워 있습니다.
저 와불은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누워 있는 것일까.
도력 높다는 고승들처럼 서서 죽거나 앉아서 죽지도 못하고 부처는 저렇게 누워서 열반에라도 든 것일까. 혹여 선정에 든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면 오랜 고행 끝에 편안한 휴식의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아니었습니다. 그도 저도 아니었습니다.
이 고통 가득한 세상, 저 혼자 천년을 편안히 잠들어 있거나 선정에 들어 있는 부처라면 그것이 부처이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부처라면 진작에 망치로, 해머로 부서뜨려버렸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가짜 부처일 것입니다.
그것이 깨달은 자의 본 모습은 아닐 터이니 말입니다.

부처는 결코 선정에 들어 있지도 저 혼자 법열에 취해 있지도 않았습니다.

부처는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부처는 그렇게 몸져 누워 천년을 앓았고 다시 또 새 천년을 앓고 있습니다.

탐욕과 증오와 싸움으로 지새우며 허송해버린 지난 천년,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지 오래지만 부처는 일어설 생각을 않습니다.
이 깊은 어둠 속 부처가 그렇듯 나 또한 갈 곳을 모릅니다.
나는 와불 곁으로 다가가 가만히 눕습니다.
누울 자리가 불편하도록 등에다 돌을 고이고 눕습니다.

운주사에 천년의 밤이 깊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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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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