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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前) '한국의 미래, 제3의 힘' 총무였던 이정우(서울대 법대 81학번) 변호사는 노진수(62년생, 서울대 법대 81학번, 82년 4월 실종) 씨와 대학동기이다. 이 변호사는 기자와 인터뷰 도중 노진수씨 실종과 관련해 의외의 설명을 했다.

 

"진수가 2학년 들어 계속 안보여서 친구들이 찾았습니다. 가족을 통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근데, 3학년 때였던가요. 진수가 전국을 방랑하다 부산 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의외였다. 이 변호사는 소문의 출처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소문이 돌았다는 사실과, 그 소문에 대해 자신은 금방 수긍하였다고 말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왜, 무엇 때문에 노진수 씨는 전국을 방랑하였고 변사체로 발견되었을까? 또 이 변호사가 수긍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자와 통화한 40여명의 대학 동기들은 '들어본 바 있다'거나 '처음 듣는 얘기다'라고 말해 엇갈린 진술을 하였다. 소문이란 말의 사전적 정의에 충실한다면, 노진수 씨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문에 무게중심을 둘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정우 변호사는 그 소문이 단순히 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아래는 지난 5월 23일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한 '한국의 미래, 제3의 힘' 사무실에서 이정우 변호사와 가진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노진수 씨와는 얼마나 친했나?

 

"진수는 개성이 강했고 사나이다운 의리도 있었기에 그를 좋아했다. 하지만 진수가 모두하고 잘 어울리지 않았다. 주로 재수, 삼수해 입학한 나이 먹은 동기들과 친했다."

 

-이 변호사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학생운동에 깊숙히 개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학생운동과 관련해서 노씨에 대해 주목할만한 것이 있나?

 

"진수가 학생대표를 맡긴 했으나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당시 법대는 선배가 얼마 없었던 사정으로 1학년이 서클을 만들어 집회를 하고 운동의 판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 과정에 진수는 참여하지 않았다."

 

-혹시 학내가 아니라 다른 선에서 학교로 투입될 가능성은 없는가?

 

"학내가 아니라면 또 다른 전위조직이거나 북쪽이라 이해되는데, 81년 당시에 학내 써클을 매개하지 않고 별도로 학생운동권으로 치고 들어올 가능성은 없다. 진수가 개인적으로 데모를 했을지 몰라도 '조직적'이라는 꼬리표는 붙일 수 없다."

 

-그러면, 실종과 관련해 짚이는 데라도 있는가?

 

"내가 3학년 때였나... 진수가 전국을 거지처럼 떠돌다 부산 앞바다에서 변사로 발견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처음 듣는 얘기다. 누구한테 들었나? 자세한 정황을 설명해 달라.

 

"아마 친구들에게 들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팩트의 진위와 상관없이 그 얘기에 금방 수긍하였다. 진수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진수는 시대의 고민을 누구보다 깊이 앓고 있었던 아이였다. 물론 그게 조직운동을 하며 '정권타도하자'는 실천성으로 귀결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게 앞의 말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아마 진수는 '불의한 시대'라는 대전제 아래 개인적인 고민이 더해져 괴로움이 커졌지 않나 싶다. 그는 그것을 제대로 풀지 못했던 것 같다.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 그 개인적인 고민이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아무튼 진수는 항상 고민에 차 있었고 그것을 술로 풀었다. 1학년 말 학생총회 땐가 잠시 본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술을 먹고 들어왔다.""진수가 전국을 떠돌다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결국, 그 친구는 고민을 그런 식으로 밖에 풀지 못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전국으로 다녔다는 말은 자유인이 되고 싶었던 것일 테고 그러다가 자괴감이 증폭돼 자살하지 않았을까..."

 

-개인적 고민이란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집안 사정도 이유가 될 것 같고, 노씨의 거처도 불안했다고 알고 있는데...

 

"맞다. 거처는 대단히 불규칙적이었다. 자주 옮겨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신림동에 '일미집'이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노씨는 거기서 거의 기거하다시피 했다. 술 먹다가 거기서 자고 그러다가 학교에 가고 그랬다. 주인아줌마와 친해져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였다. 집안 사정도 그리 넉넉한 편도 아니었고. 혹시... 노씨의 입학성적은 확인해봤나?"

 

-확인하려 했으나 학교측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관건이 될 수 있는지? 참고로, 노씨와 함께 재수했던 한 친구는 노씨가 서울대 법대 갈 실력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랬나?...81년도는 정원 미달이었다. 따라서 배짱 지원해서 학교에 들어온 이도 있었다. 그런 친구들 중에 학교 생활을 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진수의 지적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가 성적 미달인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진수가 학생대표를 맡겠다고 나섰던 당당함을 이후로 볼 수 없었다. 기자가 얘기한 게 사실이라면, 아마 정상적으로 학교를 들어오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 자괴감을 가졌고 이것이 개인적 고민의 큰 축이 되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대들을 찾아 나섭니다.
오마이뉴스는 민가협(의장 임기란, 총무 남규선)과 공동으로 그대들이 이 하늘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노진수씨(주민등록번호 620328-*******, 대구 남구 대명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법대 2학년에 휴학중이던 1982년 5월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서울대 앞 지하독서실에서 기거하던 중 한밤중에 방문한 세 남자와 함께 떠났다고들 합니다.

그로부터 17년, 가족과 학우들은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냈지만 그 누구도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안치웅씨(주민등록번호 631017-*******, 광주 동구 산수동 출생).
사람들은 당신이 서울대 무역학과를 1988년 2월 졸업한 후인 1988년 5월 26일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2년, 가족과 선후배들은 일간지에 '사람을 찾습니다' 광고를 내봤지만 당신은 연락해오지 않았습니다.

노진수씨, 안치웅씨 어디에 있습니까.

세월은 흘러 동시대를 살았던 당신의 친구들은 국회의원이 되고, 벤처기업 사장이 되고, 시민운동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아이 한둘에게 아빠 소리를 듣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대들은 정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어디로 떠난 것입니까? 

오마이뉴스는 3명의 특별취재팀, 그리고 1800여 기자회원들과 함께 당신을 찾아나섭니다. 

(노진수, 안치웅씨의 행방과 관련해 도움을 주실 분은 오마이뉴스 1면 우측에 있는 '기사제보'란을 이용해 주십시오.)  
 

 


#실종#노진수#안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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