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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장렬한 분신은 기억합니다.
그러나...

최정환씨(당시 나이 37세) 는 척수장애와 교통사고로 인한 장애등급 1급 1호의 중증 장애인이었다.

중도 장애로 서울 마천동 다른 장애인과 움막 생활을 하며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최씨,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아 생활보호 대상자로도 지정받지 못했다.

지난 94년, 한 쪽 다리밖에 없는 최씨는 양재동 전철역 부근에서 단속반원에게 떠밀려 넘어지는 바람에 남은 왼쪽 다리마저 부러지고 말았다.

이에 구청은 보상과 치료비는커녕 고소하면 장사를 아예 못하게 하겠다는 협박을 받았고 생업이 막막하기만 했던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소도 포기해야 했다. 날이 갈수록 구청의 단속은 심해지기만 했고 최씨는 하루 한끼 먹기도 버거웠다.

최씨는 참다 못해 경찰서에 진단서와 함께 고소장을 제출하였으나 묵살되었고 이에 대한 보복이었던지 95년 3월 5일 서초구청의 단속으로 생계수단이던 스피커와 밧데리를 빼앗기는 일을 당했고 약 한시간 뒤 구청에 담당자를 만 나게 해달라고 사정하였으나 강한 모멸감을 받았을 뿐이다.

그때 이미 최정환씨의 품에는 마지막 절규를 담은 1ℓ짜리 시너통이 감추어져 있었고 결국 그는 구청 앞에서 분신을 기도하였다. 분신 당시에도 왼쪽 다리 깁스를 풀지 못한 상태였다.

강남병원으로 실려온 후 "복수해 달라", "4백만 장애인을 위해서 라면 내 한목숨 죽어도 좋다"고 절규하며 분신 19일만인 95년 3월 21일 마침내 들풀 같은 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은 그의 힘든 삶만큼이나 순탄치 못했다.

연세대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던 장례식은 경잘의 시신 탈취로 경찰 뒷마당에 한 시간 반이나 방취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죽어서도 영면하지 못했던 그의 죽움은 그러나 오늘날에도 해결되지 못한 우리사회 장애인 문제의 '현재'이다.

95년 10월에 잇은 이덕인씨 의문사 사건,96년 장애인 노점상 이동재씨 분신사건 등 생존권을 박탈당한 수많은 분신과 비관자살이 그 뒤를 이었다.

최근에 정부에서는 대기업의 의무 고용율을 2%로 올리고 고용부담금도 대폭 인상한다고 밝혔으나 지금 정부의 의무고용율은 0.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4월 29일 행해진 노동절 집회에서 장애인들이 가장 앞에 나와 사람들을 향해 외쳤던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때문이 아닐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열악하고 가장 치열하지만 아무도 투쟁하지 않았던 장애인 생존권과 노동의 문제...

장애인들에는 실업이란 없다.
왜냐면 고용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장애인 노동의 현실이다.

mayday. 벌써 노동자의 인권을 외친 지 110주년이 되었다. 자본가들의 억압과 착취에 참다 못해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정당한 목소리를
세상에 알렸던 아름다운 날이다.

1972년에 허울좋은 '노동법'의 화형식을 거행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분신으로 저항 했던 전태일 열사를 우리는 모두 기억한다.

지금,이 정도면 많이 나아진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하는 노동자의 현실, 그렇지만 아직도 기본적인 노동할 권리조차 찾지 못해 전태일만큼, 아니 그보다 더 처절하게 분신하는 많은 장애인 노동자들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장애인 노점상이 분신이라는 이름으로 쏘아올린 작은 공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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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eduable.jinbo.net) 사무국장을 맡아 장애인들의 고등교육기회확대와 무장애배움터 실현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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