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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알메달렌 민주주의 주간'(Almedalen Democracy Week)은 스웨덴 고유의 정치적 대화 문화를 잘 보여준다. 알메달렌은 스웨덴의 휴양지인 고틀란드(Gotland)섬의 비스뷔(Visby)라는 도시에 있는 작은 해안가 공원이다. 1968년 스웨덴 교육부 장관이었던 올로프 팔메(Sven Olof Joachim Palme)가 총리 지명을 받은 뒤 이곳에 왔다가 우연히 진행한 연설이 연인원 10만 명의 스웨덴 국민이 참여하는 대표적인 정치 행사가 됐다. 지난 6월 말, 공공상생연대기금의 알메달렌 탐방에 동행해 그 처음과 끝을 지켜봤다. [기자말]
알메달렌 공원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다양한 항공편이 있지만 직항로가 없어 두바이까지 9시간, 4시간 대기, 다시 7시간을 날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다시 국내선 공항으로 이동해 40분간 비행기를 타고 고틀란드섬으로 가, 택시를 타고 비스뷔시로 들어갔다. 이 험한 여정을 위로해 주는 것은 미세 먼지 하나 없는 우리의 가을 하늘 같은, 청명한 고틀란드의 날씨다.
  
알메달렌 주간은 매년 스웨덴의 여름 휴가철과 함께 시작하지만, 올해는 일주일 정도 당겨 열렸다. 개막을 하루 앞둔 6월 26일, 비스뷔시의 모습은 한산하기 그지없다. '이곳에서 바로 내일 세계적인 정치축제가 열린다고? 사기 아니야?' 누군가 농담처럼 던진 말에 웃어넘겼지만, 스멀스멀 불안감이 밀려왔다.

알메달렌 주간의 첫째 날인 6월 27일 오전, 드디어 거리에 사람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부스를 차리고 있는 이들도 눈에 띈다. 대규모 행사를 앞두면 며칠 전부터 공사를 하고 세팅을 끝내놔도 마음의 평안을 못 찾는 우리와는 달리,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모습에서도 당황스러움은 읽을 수 없다. 개막식이 오후 1시라지만, 5일 동안 진행될 세션이 2000개 넘는다는 말이 실감 나지 않았다.

점심이 다가오자 슬슬 분위기가 바뀐다. 조금씩 사람이 북적인다. 카페를 빌려 일찌감치 열띤 토론을 하는 곳도 보인다. 바로 하루 전 조용하던 거리는 순식간에 사람들로 채워졌다. 아직 거리에 익숙하지 않아 어느 작은 부스에 들려 개막행사 장소를 물었다.

"개막행사? 오후 5시에 바로 여기서 해."
"응? 개막식은 오후 1시에 알메달렌 공원에서 한다던데? 5시야?"
"아, 정치인들 하는 거? 그건 저쪽으로 가봐."


알고 보니 자기들 의제와 관련된 조촐한 개막행사를 5시에 그곳에서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정치축제라지만 분야가 다르니 '그건 그쪽 일이고'하는 투로 이야기하는 것도 흥미롭다.

세계적 정치축제의 개막식은 얼마나 멋질까? 헐레벌떡 알메달렌 공원으로 달려가 무대를 살폈다. 그늘 한 점 없는 공원 귀퉁이에 낡고 길쭉한 나무 의자가 전부다. 슬금슬금 사람들이 와서 의자에 앉는다. 냉큼 뒷자리를 차지했지만, 뜨거운 태양을 견디기 쉽지 않다.

북유럽에 속한 스웨덴은 한겨울엔 하루 3시간만 태양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대신 여름은 백야다. 그래서인지 스웨덴 사람들은 우리처럼 필사적으로 태양을 피하지 않았고 우리도 꿋꿋하게 따라 버텼다. 드디어 시작. 그런데 세계적인 정치축제의 개막행사치고는 너무 지루했다. 스웨덴 문화부 장관의 연설을 시작으로 주지사, 재단 회장들, 지역 의회 의장 등 7명이 주야장천 연설만 했다.

'아, 이것이 연설과 토론, 대화에 익숙한 스웨덴과 한국의 문화적 감수성 차이인가'하고 버텨봤지만,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늘로 피하니 이미 다른 스웨덴 사람들도 일찌감치 그늘로 피신한 뒤였다. 문화는 달라도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

대화, 토론, 연설, 대화, 토론, 연설...
   해안가이지만 습도가 낮은 고틀란드의 날씨는 그늘만 있다면 금세 선선함을 느낄 수 있다. 알메달렌 공원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설치된 부스를 살폈다. 부스마다 빼곡하게 사람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세계적인 축제라지만, 세계인의 축제는 아니었다. 최종 진행된 2115개의 세션 중 영어로 진행하는 세션은 31개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스웨덴어로 진행했다. 그나마 영어로 진행하는 세션도 외국인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영국대사관이 주관하거나 토론자로 외국인을 초대한 경우다.

알메달렌 행사를 담당하는 고틀란드주의 미아 스투레(Mia Stuhre)에 따르면, 3명의 공무원이 일년내내 이 행사만 준비한다. 정치인들의 연설이 계기가 된 만큼, 스웨덴 8개 정당 모두가 기획 회의에 참여하고, 정당의 규모나 의석수와는 상관없이 모두 1인 1표를 행사한다. 처음에는 올로프 팔메 총리가 소속된 사회민주노동당이 중심이 된 행사였지만, 1982년부터는 스웨덴의 모든 정당이 알메달렌 주간에 참여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8개 정당이 협의해서 기획안을 올려도, 고틀란드주 정부에서 거부하면 다시 논의해야 한다. 즉, 최종 결정권은 고틀란드주에 있다. 왜일까?

"알메달렌의 재정구조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우선 4월 중순 이전에 세션을 신청하면 무료지만 그 이후에는 보통 300유로(43만 원)의 신청비를 우리에게 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싸지죠. 이렇게 모여진 돈이 대략 11만 유로(1억 5000만 원) 정도 됩니다. 그리고 부스 등 대관료 수입이 30만 유로(4억 원) 정도 되지요. 그런데 5일간 전체 행사 진행 비용에 60~70만 유로(8억 5000만~9억 9000만 원)가 들어요. 이 차이를 고틀란드주가 부담하죠. 그래서 우리가 결정하는 겁니다." (미아 스투레, 알메달렌 조직위)

조직위에서 특별한 주제를 기획하거나 제안하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롭다. 누구의 참여도 제한하지 않는 공익적이며 개방적인 프로그램이어야 한다는 것과, 폭력과 혐오적인 주제, 상업적인 프로그램은 배제한다는 원칙에 맞으면 누구나 프로그램을 신청할 수 있다. 그래서 알메달렌을 관통하는 여러 대화의 주제는 주최 측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함께 만든다.

거리마다 설치된 부스에서는 이미 다양한 주제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인공지능(AI), 토론문화, 기후 위기, 노동권, 아동 인권, 이민자 문제, 종교, 재택근무, 사냥권과 동물권, 건강과 복지, 패션산업, 부동산, 게임 등 2115개의 주제 속에 없는 것을 찾기 힘들다. 대부분의 토론장에는 간단한 커피와 음료, 다과를 준비한다. 천막으로 만든 부스도 있지만 인근 카페나 식당, 교회와 박물관, 선박, 웁살라 대학 캠퍼스에서도 토론이 열린다. 고틀란드 주 안내소 건물 앞 광장에는 매번 다른 주제로 참가자들의 연설회나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대화의 의제는 넘쳐나지만, 특별한 기법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미리 섭외된 토론자들이 작은 원통형 테이블 앞에 서서(유럽은 서서 토론하는 문화가 있다) 각자의 주장을 말하고 청중의 질문에 답하며 토론한다. 대화 축제라 불러도 무방한 알메달렌 주간의 특징은 어떤 뛰어난 대화의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로 단지 대화를 위해 모인 사람들 그 자체에 있다.

메인 이벤트, 8개 정당 연설
  
정당 연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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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우정
그래도 알메달렌의 본질은 정치 대화의 장이라는 점이다. 가장 큰 이벤트는 중앙 무대에서 진행되는 8개 정당의 연설회다. 초기에는 추첨을 통해 순서를 정했지만, 지금은 8개 정당이 순번을 정해 매년 로테이션으로 일정을 옮겨가며 진행한다. 5일간 매일 오전 11시와 저녁 7시에 알메달렌 공원 중앙 무대에서 정당 연설회가 열린다.

각 정당의 순서에는 당 대표자나 당 지도부가 마이크를 잡는데, 총리를 배출한 정당의 순서에는 총리가 직접 와서 연설한다. 현재 스웨덴 집권당은 중도 보수 정당인 '온건당'이다. 총리 연설이 가장 큰 이벤트이니만큼, 알메달렌 공원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스웨덴어 연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러 분야의 민생 문제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하고, 자기 정당의 비전을 밝히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6월 29일에는 1917년 이후 한 번도 1당을 놓친 적 없는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의 연설이 있었다. 당수인 마그달레나 안데르손(Eva Magdalena Andersson)은 전 총리이기도 했다. 안데르손의 연설에는 총리 연설에 버금가는 인파가 모였다. 번역기가 겨우 잡아챈 연설의 한 토막.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자입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학생이 안전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노인이 안전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안전하고 제대로 작동하는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싸울 것입니다. 우리에겐 그곳으로 가는 스웨덴다운 여정이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것을 위해 살아갈 것입니다."

8개 정당은 알메달렌 공원 구석에 동그랗게 모여 천막을 꾸렸다. 다른 부스에 비해 크지도 않을뿐더러 정당의 규모나 영향력과 무관하게 모두 같은 크기다. 정당 부스에는 간단한 기념품과 함께 여러 의제에 대한 의견을 담은 팸플릿을 비치해 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급진적인 좌파당은 수력발전에 찬성하며 원자력을 반대한다고 걸어 놓고, 우익정당인 민주당은 수력발전에 반대하고 원자력에 찬성한다는 의견을 내 건다. 그러면 중도 정당인 온건당이나 중앙당은 이렇게 걸어 둔다. "우리는 둘 다 필요해."

반세기의 전통, 누가 알메달렌에 오는가?
  특이한 것은 5일 동안의 정치축제 동안 백인이 아닌 사람이나 젊은 사람을 쉽게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스톡홀름에만 해도 택시를 운전하는 아랍인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고틀란드에서는 간혹 소규모 관광객이 눈에 띌 뿐, 대부분 백인 일색이고 중·장년층이 많다.

"돈 때문이죠. 여기는 휴양지예요. 비행기나 배를 타고 올 수밖에 없으니까 알메달렌에 참여하려면 돈이 들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아요. 청년 정치인들의 논쟁 프로그램 같은 것을 기획해서 젊은 사람들 참여를 유도하고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어요." (미아 스투레, 알메달렌 조직위)

배편은 조금 싸긴 하지만 항공료만 해도 휴가철에는 우리 돈으로 왕복 60~70만 원은 필요하다. 게다가 휴양지의 숙박비도 고려해야 하니 쉽게 올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래도 주최 측 추산 10만 명이 알메달렌 주간에 고틀란드로 모였다. 스웨덴 최대 노조(LO)의 알메달렌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고 있는 마린 헨릭손(Malin Henriksson)은 알메달렌에 참여한 이유를 '영향력'에서 찾고 있다.

"알메달렌 주간에 참여하는 기업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우리 노조도 여기에 대응하려면 알메달렌에 와서 우리의 의제를 알리고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만나야 해요. 앞으로도 노동자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더 큰 규모로 계속 참여할 계획입니다." (마린 헨릭손 LO 알메달렌 프로젝트 매니저)

2115개의 세션 중, 기업들이 만든 세션은 대략 30% 정도 된다. 이들은 보통 부스를 따로 만들지 않고 호텔이나 카페, 식당을 빌려 세션을 연다. 제공하는 다과의 질도 평균보다 높다. LO 다음으로 많은 조합원 수를 보유하고 있는 스웨덴 전문직노조(TCO)의 사무총장 미카엘 쇼베르그(Mikael Sjöberg)는 알메달렌에 오는 이유를 '로비' 때문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로비 때문에 오는 거죠. 여기에는 총리도 오고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도 많이 모여요. 여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책을 알리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사귀어 놓으면 나중에 노동자에게 중요한 정책을 통과시킬 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미카엘 쇼베르그 TCO 사무총장)

알메달렌 주간에는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이들을 통해 영향력을 키우거나 행사하고 싶은 사람들도 모인다. 여러 세션을 통해 자신들에게 중요한 의제를 적극 알리고 과제를 토론한다. 특별한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반세기 동안 쌓여온 대화의 정치 문화다. 물론 TCO가 개설한 세션 중 하나의 제목처럼 스웨덴의 대화 문화도 '점점 더 트럼프화되어 가고 있다'라는 자조 섞인 평가도 나오는 모양이다.  

알메달렌, 한국에서도 구현할 수 있을까?

매우 정치적인 축제인 알메달렌 주간은 반세기 동안 지속하면서 여러 나라에 영감을 줬다. 북유럽에서는 알메달렌과 같은 정치축제가 여럿 열린다. 우리도 알메달렌 같은 정치축제, 대화와 토론의 문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한국에서도 알메달렌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많은 정치인이 다녀갔고 몇 번의 시도도 있었다. 귀국 전 스톡홀름에서 만난 스웨덴 린네대 최연혁 교수는 한국에서 알메달렌 모델이 실패한 이유를 '겉모양만 따라 한 것'에서 찾는다.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와서 알메달렌을 보고 갔어요. 한국에서도 해보려고요. 그런데 돌아가서 하는 걸 보면 지방정부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획하고 설계하려고 해요. 알메달렌은 참여자들이 내용과 형식을 만들고 주최 측은 공간만 열어 주는 방식이에요. 한국에서는 반대로 했죠."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 교수)

불확실성을 못 견디는 한국 공무원의 특성상, 참가자들이 내용을 만들고 채우는 알메달렌 방식을 쉽게 수용하기 어려웠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 알메달렌과 같은 방식은 꽤 오랜 시간, 아니 세월이 필요하다. 작은 한 차례의 연설로부터 시작한 알메달렌이 문화와 축제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경험과 문화가 쌓이고 쌓여야 했다.

그래서 알메달렌 주간의 특별함은 바로 그것에 있었다. 특별한 토론 기법이나 특출한 기술, 또는 사람을 끌어모으는 재미난 공연이나 퍼포먼스가 아니라 생각이 다른 사람과 마주할 수 있는 정치 문화, 매년 같은 시기에 자연스럽게 찾아갈 수 있는 정례적 공간, 그곳에 가면 누구나 자신의 의제를 알리고 영향력을 확대할 방법을 찾을 기회가 공평하게 제공된다는 믿음. 우리가 쌓아가야 할 것들이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알메달렌을 모방할 필요는 없다. 우리만의 방식과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대화보다 압수수색이 더 익숙한 우리의 현실에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이기는 하지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공공상생연대기금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손우정 기자는 공공상생연대기금을 비롯한 공익재단의 제안으로 한국판 알메달렌을 만들기 위한 '솔라시(Solidarity of Labor and Civic Society) 포럼'의 추진단장입니다.


태그:#알메달렌, #정치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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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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