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과거와 미래에 발목 잡혀 현재를 무겁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 하나에서 7.5톤 트럭으로 불어난 살림살이

16년 전 큰 가방 하나 들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던 것이 엊그제 일 같다. 물론 책이나 당장 필요하지 않은 옷가지는 뱃짐으로 부쳤지만. 그렇게 우리는 단출하게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그 때는 우리집 아파트가 운동장 같았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것이 십리 길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집 상황은... 이번에 이삿짐 견적을 받았더니 7.5톤이란다. 한국에 정착할 때에 비해 짐이 10배 이상 불어난 것이다. 이사 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번에 과감하게 필요없는 물건을 버리기로 한다.

다행히 헌옷과 헌책을 수거하는 분의 도움을 받았다. 작아진 옷과 안입는 옷,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읽었던 책, 신발장에 가득한 운동화, 우리의 한국살이랑 나이가 똑같은 컴퓨터와 20대 딸아이가 중3 때부터 썼던 노트북. 다 합해서 일만 오천 원이었다. 

사장님은 많이 못 준다며 미안하다는 듯 겸연쩍어하셨지만, 수거해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그냥 생활쓰레기로 버리지 않고,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유통된다는 사실에 지구에게 덜 미안했다. 

이번에 처분한 물건 중에 결혼 생활 내내 나를 졸졸 따라다닌 물건이 있었다. 새색시 한복. 결혼식 폐백을 드리고, 시댁에서 한두 번 입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옆지기 따라 일본으로 갈 때, 한복을 데리고 갔었다. 그것도 속치마, 덧버선, 꽃신까지 말이다. 외국 생활에 한국의 문화를 알릴 기회가 있으려나 싶었던 것이다. 딸아이 유치원 행사에서 딱 한 번 입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것도 모자라 그 한복 세트는 또다시 우리를 따라 한국으로 귀국했다. 대한해협을 두 번 건너, 16년간 장롱에 고이 모셔진 것이다. 이제나 저제나 옷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 번도 바깥 공기를 쐬지 못한 채, 이번에 헌옷 업체 사장님께 수거됐다. 왜 이렇게 입지도 않을 한복을 25년이나 가지고 다녔을까. 

추억은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이 훨씬 가볍다

여전히 벽장과 책장 속에 쓰지않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아이들의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물건을 간직하고 싶어했다. 딸아이는 고등학교 때, 수학 문제를 푼 수십 권 노트를 신줏단지처럼 모셔놓았다. 또한 한국사를 좋아하고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문제집조차 버리기 아까워했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들을 남겨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다보니 16년 동안 장난 아니게 물건이 늘어나 있었다. 집에 물건이 사는 건지, 사람이 사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이번에 이사를 계기로 큰 맘 먹고 그 추억의 물건들을 버리기로 했다. 
 
 딸아이가 초중고시절 썼던 책장(왼쪽)과 벽장 속 책장(오른쪽).
딸아이의 추억의 물건으로 가득했는데, 말끔하게 싹 버렸다.
딸아이가 초중고시절 썼던 책장(왼쪽)과 벽장 속 책장(오른쪽). 딸아이의 추억의 물건으로 가득했는데, 말끔하게 싹 버렸다. ⓒ 박미연

지금 생각해보니, 물건을 남겨 놓는 것만이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인가 의문스럽다. 실제로 그 물건을 뒤져보며 추억을 곱씹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은 풍경이기 때문이다. 한복에 곰팡이가 슬었을지 모른다고 걱정했을 때조차 한복을 꺼내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이들도 벽장을 열어 추억을 더듬지는 않더라. 추억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 아닐까.

우리 집 가구는 대부분 한국 정착 당시에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이다. 장롱, 서랍장, 아이들 침대, 책상... 몇 개의 책장은 사은품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다 처분하기로 했다. 다시 받은 이삿짐 견적은 5톤! 처음에 7.5톤이었던 것에 비하면 다행이었다. 추억의 물건을 싹 다 버린 댓가로, 이삿짐을 2.5톤이나 줄인 것이다. 

물건을 잘 처분하면 숨막힐 일도 없다

"이렇게 버리고 나니 속이 후련하지?"
"응!"


이럴 때는 옆지기와 나, 찰떡 궁합이다. 그동안 왜 그렇게 쌓아놓고 살았던지 모르겠다. 이제와 그 이유를 헤아려보면... 현재를 살지 않았던 때문인 것 같다. 과거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미래에 필요할지도 몰라서, 현재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첩첩이 쌓아놓고 살았던 거다. 물건에 파묻혀 숨이 막힐 지경까지 말이다. 

아, 물건이 많아짐에 따라 숨이 차오르는 게 비단 주부들 뿐일까. 함께 정리하던 둘째 아이가 숨이 막힐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고 내게 묻는다. 살림에 대해 관심이 없으면 숨이 막힐 일도 없겠다. 그러나 살림 전반을 떠맡고 있는 엄마들에게 있어서 짐은 항상 골칫거리다.  

이제는 필요 없는 물건은 그때 그때 처분해야겠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에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염두에 두며, 오늘의 삶이 무거우면 되겠는가. 물건을 잘 처분하는 것에서부터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고 싶다. 

가벼워진 짐, 후련한 마음, 이사할 날이 기다려진다. 두 달 보름 전, 집주인의 입주 통보와 전셋값 두 배 상승으로 자다가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는데. 어찌저찌 이사 날짜와 견적까지 받아놓으니, 평화와 함께 기대감이 밀려온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지혜까지 덤으로 말이다. 큰 가방 한개만 들고 이사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제는 이사가 기다려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이삿짐#추억의 물건 처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