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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4년 전이다. 2007년 연초에 최팔근이라는 문제적 인물 관련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올린 바 있다. 식민지 시기 끝 무렵, 한국인이 한국어로 연주한 일본 전통음악 나니와부시, 이른바 조선어 나니와부시와 그 분야에서 당대 일인자로 꼽혔던 최팔근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관련기사 : 조선어 나니와부시, 수용인가 굴종인가?]

최팔근이 방송, 공연, 음반을 통해 불렀던 조선어 나니와부시에는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듯 친일적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인 지원병으로 처음 전사자가 된 이인석을 기리는 곡 <장렬 이인석 상등병> 등이 그의 대표 레퍼토리였다(노래 듣기). 때문에 최팔근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최팔근이 노래한 조선어 나니와부시 <장렬 이인석 상등병> 음반 딱지
 최팔근이 노래한 조선어 나니와부시 <장렬 이인석 상등병> 음반 딱지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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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문제적 행위는 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 기술이 가능할 만큼 파악이 되었으나, 그 신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았다. 언제 태어나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어디 출신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무엇보다 해방 이후 최팔근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2007년 기사에서도 그가 해방 조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았는지 아니면 일본으로 건너가 계속 나니와부시를 불렀는지, 의문으로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다.

14년이 지나는 동안 다행히 새로운 자료가 추가로 확인되었기에, 최팔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좀 더 알 수 있게 되었다. 고향은 아마도 대구인 듯하며(부산이라는 기록도 일부 있기는 하다), 1914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에서 나니와부시를 배웠는데, 생각보다 이른 1937년에 벌써 라디오 방송 출연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했던 최팔근의 해방 이후 행적에 관해서도 중요한 자료가 확보되었다. <국제신문> 1948년 10월 7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최팔근은 서울 오장동에서 술을 따르고 갈비를 구우며 선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 이름이 하필 만세관(萬歲館)이었기에, 취재를 한 기자는 '천황폐하 만세'가 연상된다고 비꼬아 쓰기도 했다.

당연히도 과거와 같은 공연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었으나, 조선어 나니와부시에 대한 최팔근의 애정(?)은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니와부시가 인도에서 기원해 중국을 거쳐 들어와 우리나라에서 타령이 되었고, 그것이 다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라는 나름의 이론을 기자에게 역설하는가 하면, 해방 이전 자신의 활동은 '민족문화 향상'에 일조하기 위함이었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최팔근은 언젠가 나니와부시로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나니와부시를 통해 이 나라 역사를 일반 대중에게 알리고 싶다는 포부를 안고, 인터뷰 당시에는 안중근 의사 일대기를 열심히 읽으며 연구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의 나니와부시 세계에서는 이인석이나 안중근이나 별 차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해방 이후 최팔근의 이야기는 아쉽게도 여기까지이다. 선술집 장사는 언제까지 했는지, 전쟁 기간은 어떻게 넘겼는지, 정말 일본에는 끝까지 안(또는 못) 간 것인지, 많은 것이 궁금하지만 알 길은 없다.

최팔근에 관한 마지막 기록인 <국제신문> 기사가 나온 1948년 10월은 공교롭게도 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던 때였다. '정신 나간 일개 가수' 취급을 받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가 반민특위 조사 대상이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반민특위나 <친일인명사전>에 포함이 되었든 아니든, 여전히 궁금하기는 하다. 조선어 나니와부시에 대한 최팔근의 진심은 도대체 어디까지였던 것일까?

태그:#최팔근, #조선어 나니와부시, #최영조, #장렬 이인석 상등병, #만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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