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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달리지 않으면 내일 걸어야 한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멈출 수도 있다.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고, 내일을 만드는 건 지금 이 순간이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비행기가 한반도 상공으로 들어섰다. 금세 한국이다. 참 가깝고도 먼 나라다. 숨 가빴던 히로시마에서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도전은 여행이고, 여행은 도전이다. 거기엔 늘 새로운 만남과 삶의 지혜가 있다.

짓보야마(十方山) 정상에서
 짓보야마(十方山) 정상에서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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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鈴. 곰을 쫓는 곰 방울이었다는...
 熊鈴. 곰을 쫓는 곰 방울이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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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회든 주최 측이 정한 필수장비가 있다. 필수장비는 레이스 중에 선수가 반드시 지녀야 한다. 이 대회도 필수장비를 공개했다. 우의, 비상 시트, 물통(1ℓ이상), 비상식량, 개인 컵, 헤드랜턴, 웅령(熊鈴). 목록은 의외로 단촐했다. 하지만 없으면 실격이다. 어, 그런데 웅령! 이게 뭐에 쓰는 물건이지. 곰 방울, 곰 목에 거는 방울인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네이버 검색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웅령의 용도는 오소라칸에 가서 금세 알 수 있었다.

2017년 5월 27일 오전 5시, 일본 국내외에서 모인 7백여 명의 선수들이 오소라칸 스노우파크 스키장에 모였다. 히로시마에서 차량으로 서북쪽 68km 떨어진 오소라칸의 겨울은 40년 넘는 전통의 크로스컨트리와 1990년대부터 스카이런 대회가 열리면서 큰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황량하기만 한 비수기 때의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자지체가 나서 전략적으로 이 대회를 준비했다고 한다. 출발신호가 떨어지자 각양각색의 한껏 차려입은 선수들이 가파른 스키장 언덕을 따라 오르다 모두 산속으로 사라졌다.

제2회 오소라칸 트레일런 대회 출발선상에서
 제2회 오소라칸 트레일런 대회 출발선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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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 여기가 히로시마.
 일본 열도. 여기가 히로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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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2회째를 맞은 '오소라칸 트레일런' 대회, 총 레이스 거리 64.5km, 누적고도 3720m. 레이스는 스노우파크 스키장을 출발해서 A구간 27.5km, B구간 27km, C구간 10km의 삼나무 가득한 오소라칸의 산악지역을 달린다. 마치 철인 3종경기의 바꿈터처럼 구간별 출발점과 도착점인 스키장을 오가며 전 구간을 15시간 안에 주파해야 한다. 컷오프 타임에 걸리지 않으려면 1천m가 넘는 10개의 산 정상을 찍으며 시속 4.3km 이상의 속도로 쉬지 않고 산악을 달려야 한다.

친절의 아이콘. 출발 전 에이코상과 한 컷.
 친절의 아이콘. 출발 전 에이코상과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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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의 역주. 그들은 64.5km 내내 지치지 않았다.
 선수들의 역주. 그들은 64.5km 내내 지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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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잔(聖山)을 시작으로 험준한 고봉들이 줄지어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수들은 기염을 토하며 험준한 산길을 오르내렸다.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 된 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전 7시, 다카다케(高岳 1054m)에 오르자 심장 박동이 절정에 달했다. 세이미즈우미(聖湖)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상에서 전열을 재정비했다. 레이스는 고되다. 상쾌함보다 물집의 고통이, 설레임보다 완주의 부담이 크다. 오전 10시, A구간 반환점인 스키장으로 다시 들어서자 에이코상이 엄지척으로 나를 반겼다.

내 몸은 그간 사막과 오지에서의 모든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다. 외부의 자극은 나를 더 흥분시켰다. 갈증과 허기만 채우고 B구간(27km)으로 들어섰다. A구간 반대편에 펼쳐진 B구간은 오소라칸야마(恐羅漢山 1346m)와 짓보야마(十方山 1319m)을 넘어 나스 마을로 이어졌다. 주로에 수북이 쌓인 삼나무 낙엽들이 세월의 흔적만큼 포근했다. 낙엽 주변에 조릿대, 조릿대 위로 삼나무와 신선한 공기 그리고 파란 하늘, 하늘 아래 주로, 주로 위를 달리는 선수들, 선수들이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가 곰을 쫓는 곰방울 소리와 어우러져 주로를 울렸다.

대리만족. 나스 마을 할머니의 관망.
 대리만족. 나스 마을 할머니의 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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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여정을 완주한 선수의 환희
 고난의 여정을 완주한 선수의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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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쁜 호흡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누적고도 수치가 급상승할수록 선수들은 더욱 곤혹스러웠다. 허벅지 경련으로 다리를 절고, 복통으로 배를 움켜쥔 선수까지. 오후 내내 5월 햇살이 나뭇가지에 걸려 옅은 그림자를 드리운 숲속에서 삼나무가 발산하는 피톤치드에 취해 나도 휘청거렸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마지막 힘을 쏟아 우치쿠로도오케(內黙峠) 고개를 넘어 오후 3시 5분 스키장에 다시 발을 들였다. 이제 모두 지쳤다. 그럼에도 스키장에 도착한 전사들은 토이시사토쿄(砥石鄕山) 정상이 버티고 있는 마지막 C구간(10km)을 향해 피치를 올렸다. 나도 멋진 피날레를 상상했지만 촉박한 일정과 발목부상으로 C구간 진입을 접어야 했다. 에이코상은 고개 숙인 나를 여전히 격려해 주었다.

고행의 끝자락에서
▲ 나는 나의 길을 간다 고행의 끝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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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갖고 간 한지공예 작품. 현지 자치단체 관광국장에게 선물 증정.
 내가 갖고 간 한지공예 작품. 현지 자치단체 관광국장에게 선물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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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럽 청년이 일본 배낭여행을 하다 외진 시골 여관에서 하루를 묵고 떠났다. 여관 주인아주머니는 청년이 떠난 방을 청소하다 작은 빗과 소소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아주머니는 혹시 그 청년이 깜박 잊고 놓고 갔을 거라는 염려에 수소문 끝에 청년의 유럽 집주소를 알아내서 빗과 물건을 그 집으로 보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청년은 그냥 버리고 온 물건을 편지까지 동봉해 보내준 아주머니의 정성에 감동했다. 그후 청년은 전 세계를 여행하며 그 친절한 여관 아주머니 일화로 일본을 홍보했다고 한다.

대회장을 뒤로한 채 시간에 쫓겨 전날 전야제가 열렸던 오소라칸 마을회관을 거쳐 히로시마 시내까지 어제 왔던 동선을 되밟았다. 에이코상은 이동 내내 매사를 챙겨주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모습에서 20여 년 전, 출근길 버스 안에서 흘러나온 '어느 친절한 일본 여관 주인 아주머니'에 관한 라디오 방송이 떠올랐다. 아련한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난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함없는 일본인의 친절과 배려에 놀라서인가 보다.

영국 친구 폴과 조촐한 만찬. 오소라칸 인근 여관에서.
 영국 친구 폴과 조촐한 만찬. 오소라칸 인근 여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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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빈손으로 갔던 2박 3일의 짧은 여정에서 값진 보물을 안고 돌아왔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 혼신의 힘을 쏟는 선수들, 응원 나온 나스 마을 주민들의 환호, 히로시마 공항터미널부터 히로시마 공항터미널까지 시종 함께해준 에이코상 그리고 '오르막 없는 정상은 없고, 자연만한 큰 스승은 없다'는 것. 나이는 스승이고 경험은 지식이다. 언젠가 내 의지와 이성이 나약하고 희미해질 때, 내 몸이 기억하고 있을 히로시마에서의 투혼과 용기는 다시 나를 강하게 이끌어 줄 것이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땀 흘린 만큼 성장한다.


태그:#사막, #오지, #김경수, #내 인생의 사막을 달리다, #히로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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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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