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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4일(수) 구미평일산악회 정기산행으로 공주에 있는 국립공원 계룡산을 다녀왔다. 계룡산은 닭 계(鷄)와 용 룡(龍)자의 뜻을 그 이름으로 쓰고 있다.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를 보필하던 무학대사가 새로운 왕도를 찾으려 계룡산에 왔다. 무학대사가 계룡산은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라고 했다고 한다.
신원사 중악단과 고왕암 가는 길
 신원사 중악단과 고왕암 가는 길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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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을 등반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는 서쪽 신원사에서 출발해서 동쪽 동학사로 내려오는 길을 선택했다.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 시대인 651년 세워진 사찰이다. 고구려 스님인 보덕화상이 백제로 건너와서 신원사를 건립했다. 신원사에서는 중악단(보물 제1293호)이 있다. 조선시대에 묘향산, 계룡산, 지리산을 3악으로 정하고 묘향산에는 상악단을 계룡산에는 중악단을 지리산에는 하악단을 건립했다. 국가 차원에서 산신에게 국가의 명복을 빌었던 셈이다. 중악단은 불교양식이 아닌 궁중양식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신원사는 조선 말기 고종의 왕비였던 명성황후와 관련이 깊다. 명성황후가 아들을 낳기 위해서 계룡산 중악단에서 산신제를 빌었고,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고종이 근대적인 국가를 지향하면서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고칠 당시, 신원사의 한자 이름을 신원(神院)에서 신원(新元)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신기원을 연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순종은 망국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1897년 세워진 대한제국은 얼마 되지 않아서 일본에 의해서 국권을 빼앗겼다. 신원사에서 계룡산을 오르던 길에 고왕암이 있었다. 고왕암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 융이 당나라와 신라군에 잡힌 곳이라고 한다. 부여 융은 백제가 멸망한 이후 백제 부흥운동을 펼쳤지만, 끝내는 백제 부흥을 성공하지는 못했다.
비룡산 관음봉, 삼불봉, 천왕봉
 비룡산 관음봉, 삼불봉, 천왕봉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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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연천봉(738m)과 관음봉(766m) 그리고 삼불봉(775m)을 차례로 올랐다. 계룡산에서 제일 높은 봉인 천왕봉(845m)은 현재는 군사보호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아쉽게도 천왕봉은 등산객들에게는 개방되지 않고 있다. 연천봉은 산봉우리가 하늘과 맞닿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관음봉은 계룡산에서 산악인들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삼불봉은 동학사에서 바라보면 세 명의 부처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룡산 남매탑
 비룡산 남매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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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삼불봉에서 동학사로 내려가는 길에 남매탑을 마주했다. 이 탑은 남매였던 남자 스님인 비구와 여자 스님인 비구니의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성덕왕 시대에 상원스님이 계룡산 기슭의 한 암자에서 수도정진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큰 호랑이가 암자 앞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고 한다. 상원스님이 호랑이 입안을 살펴보니, 큰 가시가 있었다고 한다. 상원스님이 가시를 빼어주니, 호랑이가 한 여인을 업고 다시 상원스님을 찾아왔다. 호랑이가 나름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나 싶다. 상원스님이 여인을 보살펴주고 나서, 여인을 다시 집으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여인이 이는 하늘의 뜻이니 남매의 연을 맺고 함께 성불하자고 했다. 상원스님은 그 여성을 여동생 삼아서 남매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을 알고 있는 석공들은 이 남매탑을 정성스럽게 지었을 테다. 5층 석탑과 7층 석탑이 서로 의지하면서 우뚝 선 모습을 보니, 연인보다 깊은 남매의 따스한 정이 느껴졌다. 12월 추운 날씨 중 산행이었으나, 남매탑에 비친 따스한 햇살 기운을 머금고 동학사까지 내려갔다. 

덧붙이는 글 | 계룡산 산행 사진은 구미평일산악회(http://cafe.daum.net/iove.gumi)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태그:#계룡산, #신원사, #중악단, #남매탑, #관음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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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힘이 되는 생활 헌법(좋은땅 출판사) 저자, 헌법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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