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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에게 "동네에 자주 드나드는 단골책방 없냐"고 물었더니 "누가 요즘 책방에 가느냐"고 면박을 줍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책방은 계속 생겨나니까요. 심지어 심야책방, 책맥(책+맥주), 낭송회 등등의 문화도 선도해 만들어갑니다. 여러분의 취향저격 책방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편집자말]
2016년 헌책방 <뿌리서점> 앞모습
 2016년 헌책방 <뿌리서점> 앞모습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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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는 단골책방이 무척 많습니다. 전국 곳곳에 단골책방이 두루 있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한 곳만 꼽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아니,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이 어느 한 곳만 더 사랑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인천에서 나고 자라다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92년에 인천 배다리에서 처음으로 헌책방이라는 책터에 눈을 떴습니다. 책이 있어서 '책터'인데, 1990년대 첫무렵만 하더라도 고등학생은 교과서와 자습서와 문제집 빼고는 가방에 넣고 다니기 어려웠어요. 학교에서 소지품검사를 하면서 교과서 아닌 책을 빼앗기 일쑤였고, 참고서 아닌 책을 읽으면 시험성적이 떨어진다고 했어요.

학교에서 소지품검사를 하며 책을 빼앗든 말든 저는 늘 가방에 '교과서도 참고서도 아닌 책'을 늘 대여섯 권씩 챙겨서 다녔어요. 수업 사이 쉬는 때라든지 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 때에 이 책들을 한 권씩 꺼내어 읽었어요. 도시락을 먹으면서 읽고, 버스로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에 읽었으며, 버스에서 내려 학교로 걷거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읽었어요. 그러니 하루에 대여섯 권씩 가방에 챙기고 다녀도 그리 어렵잖이 다 읽을 만했지요.

책방 안모습.
 책방 안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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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말썽을 일으킨 조영남 님 책이 보인다.
 한때 말썽을 일으킨 조영남 님 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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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는 인천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만 다녔는데, 이듬해 1993년에는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가 보자고 다짐했어요. 서울은 땅도 넓고 사람도 많으니 책도 훨씬 많으리라 여겼어요.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자주 뵙는 '단골 어르신'한테 말씀을 여쭈어 '서울에서 가 볼 만한 헌책방'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았고, 이 가운데 가장 자주 말씀해 주신 '용산 헌책방'을 찾기로 했습니다.

전철삯을 모아 일요일에 가 보고, 또 방학에 가 보는데, 두 차례 헛걸음을 했어요. '용산'이라고만 알려줄 뿐 어디인지 또렷하게 알려주지 않았거든요. 1993년이 저무는 추운 겨울날 드디어 용산역 앞자락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서 골목 한쪽에 깃든 헌책방 <뿌리서점>을 찾았어요.

두 시간 남짓 온 골목을 누비면서 헤매다가 찾은 터라 얼마 못 있고 인천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인천하고 서울을 오가는 전철길은 일찍 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인천 시내버스는 더 일찍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1993년 추운 겨울에 처음 찾아간 <뿌리서점>을 두고 이듬해부터 아주 뻔질나게 드나들었어요. 저는 대학교를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었습니다만, 1994년에 대학생이 되어 다섯 시에 하루 수업이 끝나면 맨 먼저 헌책방으로 달려갔고, 대학교 학과나 동아리에서 술자리를 벌인다고 해도 언제나 슬그머니 빠져나와 헌책방에서 두 시간 남짓 책을 읽은 뒤에 다시 조용히 술자리로 돌아왔어요.

이해부터 한 주에 너덧 번씩 <뿌리서점>을 찾았어요. 자주 찾아와도 늘 새로운 책을 만날 수 있었고, 하루에 대여섯 시간이나 일고여덟 시간을 죽치고 앉아서 책을 읽어도 따분하거나 배고프거나 힘든 줄 몰랐어요. 새로운 책을 만나도록 이어주는 징검다리 책터로서 헌책방이라는 곳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가 하고 깨달았어요.

<뿌리서점> '큰아드님'이 '작은 사장님'이 되어 책방 앞에서 새로운 헌책을 손질합니다.
 <뿌리서점> '큰아드님'이 '작은 사장님'이 되어 책방 앞에서 새로운 헌책을 손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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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서점>은 책 아래쪽에 연필로 책값을 적어 놓습니다.
 <뿌리서점>은 책 아래쪽에 연필로 책값을 적어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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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전남 고흥으로 삶터를 옮긴 뒤로는 단골 헌책방을 '단골'로는 더 드나들거나 찾아가지 못합니다. 이제는 한 해에 한 번이나 두 번 겨우 찾아가서 인사를 합니다. 한 해에 한두 번 찾아가더라도 전남 고흥에서 서울 용산까지는 참 멀어서 고작 한두 시간쯤 책을 보기에도 빠듯해요. 그러나 이렇게 뜸하게 찾아뵈어 인사를 올리고 책을 살피는 동안에도 지난 스무 해가 넘는 나날이 머릿속으로 고요히 흐릅니다.

예전에 이 책꽂이에 어떤 책이 꽂혔는가를 떠올리고, 그 많은 책이 얼마나 많은 책손들 손으로 옮겨 가면서 사랑받았는가를 떠올립니다. 내가 이 작은 헌책방에서 얼마나 많은 책을 만나서 마음을 살찌울 수 있었나 하고 그리고, 오늘 새롭게 만나서 기쁜 웃음을 짓도록 북돋우는 책을 되새깁니다.

헌책방 <뿌리서점> 사장님은 1970년대부터 용산에서 헌책장사를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언제나 혼자 책방을 건사하셨어요.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책방을 열었어요. 설날도 한가위도 늘 문을 여셨어요. 명절이나 한식에는 조상님 무덤을 찾아보신 뒤에 저녁에 느즈막하게 문을 여셨지요.

이곳 단골이라면 누구나 알 텐데, <뿌리서점> 사장님이 조상님 무덤을 찾아보신 뒤에 돌아올 적에는 책방 문에 쪽글을 붙여요. 단골들은 다들 이 쪽글을 보면서 책방 언저리에서 한두 시간을 서성여요. 때로는 둘레 밥집에 들러 밥을 먹고 돌아오고, 다른 책방을 찾아가서 책을 보다가 이곳으로 돌아오지요.

단골인 수많은 책손이 용산 골목마을 한쪽에 깃든 작은 헌책방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을까요? 헌책방 단골인 분들은 저마다 책을 좋아하거나 사랑하기 마련이라, 몇 시간 동안 책방 사장님을 기다리면서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나누곤 했고, 단골이라면 으레 가방에 책 몇 권씩 있으니, 가방에서 다른 책을 꺼내어 읽으며 기다려요.

손님들한테 한 잔씩 드리는 커피.
 손님들한테 한 잔씩 드리는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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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나날 책방을 지켜 온 두 손
 오랜 나날 책방을 지켜 온 두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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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도 쉬는 날이 따로 없이 책방을 열고 닫는 <뿌리서점> 사장님이지만, 이제 나이도 몸도 여러모로 고단하시기에 책방 일은 큰아들이 물려받습니다. <뿌리서점> '큰 사장님'은 큰아이들을 '작은 사장님'으로 두면서 옆에서 물끄러미 일을 지켜보는 자리에 섭니다. 눈도 많이 나빠지셨고, 무릎도 허리도 이제는 많이 지치신 탓에 책꾸러미를 섣불리 나르지도 들지도 못하신다고 해요.

저는 대학생일 적에 한 주에 닷새 즈음 <뿌리서점>에서 너덧 시간씩 책을 파면서 '내가 고등학교를 마칠 적까지 얼마나 책을 몰랐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인천에 있는 몇 군데 안 되던 구립도서관에는 그때까지 책도 얼마 없었는데, 이 헌책방에 깃든 책은 그즈음 인천에 있는 모든 도서관에 있는 책보다 훨씬 많았고, 가짓수는 더욱 많았습니다. 그러니 끼니를 건너뛰며 온갖 책을 읽었지요.

일제강점기 책도 읽고, 1950∼1960년대 책도 읽고, 영어로 된 책도 읽었어요. 이렇게 책방 한쪽 구석진 곳에 조용히 깃들어 책을 읽다 보면 <뿌리서점> 사장님은 한 시간에 한 번씩 커피를 타서 마시라고 주셨어요. 제가 커피잔을 너덧 번쯤 받을 무렵 책방 사장님은 "배 안 고프나? 책만 보고 밥은 안 먹어도 되나? 나도 배고픈데 혼자서 시켜 먹기는 그렇고, 같이 짜장면 시켜서 안 먹을라나?" 하고 여쭈시지요.

2000년 어느 날. <뿌리서점>이 아직 이웃 건물 지하로 옮기기 앞서.
 2000년 어느 날. <뿌리서점>이 아직 이웃 건물 지하로 옮기기 앞서.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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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어느 날. 1970년대부터 자리를 잡은 이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야 했다.
 2002년 어느 날. 1970년대부터 자리를 잡은 이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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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로서는 때와 곳(시대와 장소)을 넘나드는 어마어마한 책을 이렇게 멋진 책터에서 기쁘게 읽을 수 있고, 더욱이 값싸게 장만해서 집에서 다시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헌책방 사장님이 '짜장면 함께 먹자'고 하실 적에 너무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네 시간쯤 책을 보고 나서는 '아차, 또 사장님이 밥 사신다고 하면 안 되지' 하고 생각하면서 서둘러 책값을 치르고 나오려 했어요.

2002년 어느 날. 스물다섯 해 남짓 지키던 자리를 떠나 새 자리에 깃들며 책꽂이를 새로 짜던 모습. 이때 큰아들이 일손을 많이 거들어 주었다.
 2002년 어느 날. 스물다섯 해 남짓 지키던 자리를 떠나 새 자리에 깃들며 책꽂이를 새로 짜던 모습. 이때 큰아들이 일손을 많이 거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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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어느 날. 새로운 곳에 이제 막 새롭게 자리를 잡으려 하던 때 모습.
 2002년 어느 날. 새로운 곳에 이제 막 새롭게 자리를 잡으려 하던 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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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 돌아보니 <뿌리서점> 사장님은 어릴 적에 신문배달을 하며 살았다고 하셨어요. 그때 ㄷ일보 배달부로 일하셨다는데, 지국 합숙소에서 다닥다닥 붙어서 잤고, 1960년대에는 총무나 지국장한테 얻어맞으면서 신문을 돌려야 했다고 했습니다. 저

는 1995∼1998년 사이에 신문배달 일을 하면서 신문배달 자전거를 이문동에서 용산까지 이끌고 와서 책을 읽고 샀어요. 저는 그무렵 ㅎ신문 배달부였기에 얻어맞는 일은 없었지만, 1992년에 ㅈ일보를 돌리며 살림돈을 보탤 적에는 지국장한테 따귀라든지 발차기를 맞았습니다. 툭하면 배달부를 때리며 괴롭혔어요.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 집을 떠나 혼자 서울에서 살려고 할 적에 다른 신문사 지국에서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일삯은 적게 받아도 얻어맞지 않는다'고 하는 ㅎ신문 지국에 들어갔어요. <뿌리서점> 사장님은 이녁이 어릴 적에 신문 배달부로 일할 적에 배고프고 얻어맞은 아픈 생채기가 떠올라 저한테 조금 더 잘 해 주시면서 짜장면까지 사 주셨을는지 몰라요.

1959년에 처음으로 한국말로 나온 <독서술>
 1959년에 처음으로 한국말로 나온 <독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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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어느 날
 2009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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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숲을 이룬 사랑스러운 쉼터에서 마음을 쉬고 다리를 쉬며 몸을 쉽니다. 생각을 쉬고 꿈을 쉬고 사랑도 쉽니다. 이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쉬고 나서, 천천히 불을 지펴요. 마음을 지피고 생각도 꿈도 사랑도 지펴요. 느긋하게 쉰 다리와 몸에도 새로운 기운을 북돋웁니다.

헌책방 한 곳은, 용산에 깃든 조그마한 헌책방 <뿌리서점> 한 곳은 그야말로 작은 책터라 할 만합니다. 용산역을 이루는 백화점이나 전자상가는 어마어마하게 크지요. 사람들 발길도 끊임없고요.

2009년 어느 날 책꽂이 모습
 2009년 어느 날 책꽂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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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어느 날 책꽂이
 2010년 어느 날 책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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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눈부시게 번쩍거리면서 커다란 백화점이나 전자상가에는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천천히 발길을 옮겨 작은 헌책방으로 갑니다. 갓 스무 살이던 때처럼, 또 서른 살을 넘나들던 때처럼, 한 번 이곳에 깃들면 너덧 시간은 가볍게 책읽기와 생각읽기와 삶읽기로 즐거이 보낼 수는 없지만, 한 해에 한 번이나 두 번씩 어김없이 찾아와서 책방 사장님한테 인사를 올립니다.

수많은 책손이 이곳을 단골로 삼을 수 있도록 새로운 헌책을 꾸준하게 건사하며 갈무리해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작은 헌책방 작은 불빛에 이끌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할는지 모르나, '틀림없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작다 크다 많다 적다를 떠나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찾아서 마음에 담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즐겁게 있다'고 느껴요.

숲에서 자라는 나무를 베어 종이를 얻어요. 종이가 된 나무는 처음에는 숲을 이루었어요. 작은 헌책방을 채우는 책은 바로 '숲에서 온 나무'라고 할 수 있어요. 오래된 나무(오래된 책)가 있고, 새로운 나무(새로운 책)가 있어요. 오래되거나 새로운 나무가 저마다 재미나게 얼크러지면서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길어올려요.

<뿌리서점> 큰 사장님은 부디 튼튼하게 몸을 건사하시면서 오랫동안 책터를 가꾸어 온 슬기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새로운 책손한테 들려주실 수 있기를 빕니다. <뿌리서점> 작은 사장님은 부디 아버지한테서 또 여러 단골 이웃님들한테서 '책터를 야무지고 알차며 기쁘게 꾸리는' 씩씩한 손길을 익혀서 살림을 넉넉히 지을 수 있기를 빌어요.

책방 앞에 모인 손님들
 책방 앞에 모인 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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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방 작은 불빛이 지키는 작은 마을 이야기
 작은 책방 작은 불빛이 지키는 작은 마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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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 하나를 만나요
 아름다운 책 하나를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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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서울 용산 〈뿌리서점〉
02) 797-4459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21길 25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지하



태그:#뿌리서점, #단골책방, #단골서점, #헌책방, #책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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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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