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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들어온 남편과 아내가 서로 떨어져 앉는다. 강의를 들으러 온 부부가 살갑게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거리가 멀다. 21쌍의 부부가 들어왔는데 어느 하나 말이 없다. 묵묵히 앞만 쳐다 볼 뿐이다.

간혹 한두 마디 내뱉는 부부가 있다. 하지만 이내 낯빛이 어두워진다. 함께 한 공간에 있지만 따로 떨어져 있는 부부들... 이 부부들의 적막은 무서운 암흑과도 같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와 있습니다. 이런 순간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삶과 자녀들의 삶이 달라질 겁니다."

부부상담 전문가인 박응식 위드심리상담센터장이 강의를 시작하자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다.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기만 하는 부부들, 그들은 이혼을 결정한 부부들이다.

최선의 선택 '이혼', 자녀에게도 최선인가?

우리나라 가정법원은 협의이혼 과정에서 부부가 겪는 심리적 혼란과 갈등을 해소하고 미성년 자녀의 양육에 대한 부모의 합리적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기 위해 '협의 이혼 후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18일 저녁 파주시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센터장 조순일)에서 진행된 강의는 이혼을 선택한 부부들이 숙려기간 동안 반드시 수강해야 하는 프로그램 중 자신이 원하는 1가지 강의를 선택한 것이다.

▲부부상담 ▲부부의사소통 ▲자녀양육 등 3가지 프로그램 중에서 '자녀양육'을 선택한 이 부부들은 80% 이상이 30대 혹은 40대였다. 다문화가족도 간혹 섞여 있었다.

"여러분은 아마도 지긋지긋하게 부부싸움을 했을 것입니다. 힘든 과정을 거쳐 여러분은 최선을 선택했겠지만 그 결정이 우리 자녀들에게도 최선의 선택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린 이혼하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

이혼 과정에서 부부가 겪는 심리적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하지만 그 자녀들도 부모 못지않은 아픔을 겪는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나 건강하지 못한 이혼은 자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순종해야 한다는 강박, 죄책감 등 다양한 부정적 사고를 각인한다.

"이혼으로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자녀들은 부모에 대한 분노와 불신을 키우고 이런 감정은 자녀의 성격 형성에 나쁜 영향을 줍니다. 특히 자신과 떨어져 살게 되는 엄마 혹은 아빠에게 더욱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공격적이지 않은 자녀들은 반대로 무한 순종파가 된다. 나를 키우는 아빠나 엄마마저 나를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무조건 양육부모의 말을 따르거나, 부모의 재결합을 바라며 착한 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이 그것이다.

자녀가 부모 중 한쪽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어떤 초등학생 딸은 장보기를 도맡아 하고 어떤 초등학생 아들은 전구를 갈아 끼운다. 주로 첫째 아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동생들은 첫째 아이에게 매달리는 경향을 보인다.

이 때문에 박응식 센터장은 이혼을 결정하면 자녀들에게 이를 잘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

"성격이 안맞아서 엄마와 아빠는 이혼하기로 했는데 이 결정은 절대 네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란다. 이혼하더라도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따로 떨어져 살게 되는 아빠가 자주 와서 너를 돌봐줄거야."

자녀를 위해 협력할 것인가, 갈등할 것인가

갈등의 부부관계는 이혼 후에는 협력의 관계로 전환돼야 한다. 아직도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남편 혹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분노가 치밀어 오르겠지만 이제 이런 감정은 정리해야 한다.

특히 자녀에게 "네 아빠는 아주 나쁜 사람이다"와 같은 말로 배우자에 대한 원망을 전달하거나 혹은 "너만 낳지 않았어도..."와 같은 말로 이혼의 책임을 자녀에게 전가해선 안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양육을 도와주는 경우에도 자녀들이 있는 곳에서 며느리 혹은 사위를 비난하지 않도록 당부해야 한다.

그보다는 '엄마와 아빠는 맞지 않아서 이혼했지만 아빠(엄마)는 너에게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이혼한 배우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이혼에 이르게 된 갈등에는 배우자 뿐만 아니라 나도 기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고 그래야 상대방을 아이의 부모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출석률, 최고의 집중도 그러나 길은 달랐다

평일 저녁에 무려 4시간 동안 진행되는 강의는 어느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협의 이혼 후견 프로그램'은 파주시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진행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 중 출석률과 강의 집중도가 가장 높은 프로그램이다. 특히 강의 만족도도 최상위권에 속한다.

이혼을 결정하고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이 듣는 교육은 이들에게 많은 의미를 남긴다. 이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분노, 불안, 수치심, 두려움, 우울 등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다. 특히 이혼을 생각하면 늘 눈앞에 아른거리는 자녀문제가 그렇다.

"후견 프로그램 강의는 늦은 시간에 오랜 시간하는 교육이지만 실질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강의 집중도가 매우 높습니다. 거기다 참석하지 않으면 이혼할 수 없기 때문에 출석률도 높습니다."

강의가 끝났다. 그동안 박응식 센터장은 "아직 함께 사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와 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던졌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보통 강의는 공감과 호응이 높아갈수록 뜨거워지지만 이 강의는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떤 남편이 아내를 힐끔 보더니 먼저 강의실을 나섰다. 아내도 남편의 뒤를 따르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들이 센터를 나선 길은 달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기다문화뉴스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태그:#이혼, #파주시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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