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내삼문에서 바라본 종용사(칠백의총의 사당)
 내삼문에서 바라본 종용사(칠백의총의 사당)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도로명주소로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은 지번 주소로 금성면 의총리 216번지다. 도로명주소에도 지번 주소에도 '의총'은 한결같이 들어 있다. 국가 사적 105호인 칠백의총(七百義塚)이 있는 곳인 까닭이다. 정문 안내판의 '자기 소개서'를 읽어본다.

문화재의 이름(칠백의총), 등급과 번호(사적 105호), 주소부터 밝힌 안내판의 본문은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헌 선생과 영규 대사가 이끄는 의병이 왜군과의 싸움에서 순절한 700 의사의 묘이다'라고 시작한다. 이어 안내판은 조헌이 1592년(선조 25) 8월 1일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주성 탈환부터 설명해주는 칠백의총 정문 안내판

청주성 수복 기사는 <선조실록> 1592년 8월 24일에 실려 있다. 선조가 '청주를 다시 빼앗았다는 것이 정말인가?' 하며 기뻐하자 윤두수가 '조헌이 승장(僧將)과 함께 진격하여 함락시켰다고 합니다'라고 답변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2일 자 실록은 '영규와 조헌이 군사를 옮겨 금산의 왜적을 치다가 모두 싸움터에서 죽었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매우 애석해 하고 그들의 의기를 장하게 여기고 있다'라는 슬픈 기사를 전해 후세의 독자를 안타깝게 한다. 안내판을 계속 읽는다.

조헌 선생의 일기 <조천일기>(칠백의총 기념관 전시)
 조헌 선생의 일기 <조천일기>(칠백의총 기념관 전시)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18일에 호남순찰사 권율 장군이 이끄는 관군과 함께 금산의 적을 협공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권율 장군은 왜적의 기세로 보아 아군은 중과부적의 열세임을 탐지하고 작전을 바꾸어 (공격) 기일을 늦추자는 편지를 조헌 선생에게 띄웠으나 이 서한을 미처 받아보지 못한 채 출병한 선생의 의병 부대는 필사무퇴(必死無退, 죽어도 물러서지 않는다)의 결전을 벌이다 모두 순절하였다.

조헌 선생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은 싸움이 있은 4일 후 칠백의사의 유해를 한 무덤에 모시고 '칠백의총'이라 했다. 그후 선조 36년(1603)에 '重峰(중봉) 趙先生(조선생) 一軍(일군) 殉義碑(순의비)'를 세우고 인조 25년(1647)에는 사당을 건립하여 칠백 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현종 4년(1663) 사당에 종용사(從容祠)라는 사액(賜額, 임금이 현판을 내리고, 서원 운영 경비를 지원하는 일)과 토지를 내렸으며,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왔다. <현종실록> 현종 4년 7월 3일 1663년 예관(禮官)을 보내 충렬공 고경명과 문열공 조헌과 박사 유팽로에게 제사지내게 하고, 순의단(殉義壇)에 사액하였는데, 단은 금산군에 있었다. 세 사람은 바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자들이었다.

칠백의총의 사당인 종용사 내부
 칠백의총의 사당인 종용사 내부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종용사에는 칠백의사 외에 금산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 선생과 그 막좌(참모) 및 사졸, 그리고 횡당촌 싸움에서 순절한 변응정 선생과 무명의사(無名義士)들의 위패도 모시고 제향해 왔다(변응정의 전몰 장소와 날짜에 대한 이견은 <웅치 전적비 '노란 리본', 역사가 이어지는 감동> 참조).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종용사를 헐고 순의비를 폭파한 후 칠백의총의 토지를 강제로 팔아 경역(境域)을 황폐하게 만들어 항일 유적을 말살하려 하였다. 광복 후 1952년에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다시 지었고, 1970년에 묘역을 확장한 후 종용사와 순의비를 새로 지었으며, 1976년에는 기념관을 신축하여 순절한 칠백의사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이어받게 하고 있다."

안내판은 2차 금산 전투의 시작과 끝, 칠백의총이 태어난 경과, 이곳의 사당 종용사에 모셔져 있는 선열들(고경명·조헌·유팽로·변응정 등), 경내의 시설(칠백의총·종용사·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기념관)을 알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안내판에는 경내의 전체 배치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지도도 그려져 있어 답사 순서를 잡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답사 순서를 잡는 데 큰 도움 되는 안내판의 경내 지도

외삼문인 ①의총문(義塚門)으로 입장한 후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②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가 있다. 순의비를 보고나서 내삼문인 ③취의문(取義門)을 통과하여 사당 ④종용사를 참배한다. ⑤칠백의총은 사당 바로 뒤에 있다. 순의비와 마주보고 서 있는 ⑥기념관은 나올 때 관람하기로 한다(전체 답사기는 분량이 너무 많아 이 기사에서는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까지만 소개한다).

칠백의총 정문을 들어서면 곧장 오른쪽에서 만날 수 있는 순의비와 비각
 칠백의총 정문을 들어서면 곧장 오른쪽에서 만날 수 있는 순의비와 비각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는 비각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물론 비각 앞에 순의비의 내력을 말해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것이야 당연하다. 안내판은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조헌 선생과 승장 영규 대사를 따라 일어난 의병들이 왜군으로부터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 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의 행적을 윤근수가 글을 짓고 김현성이 글씨를 써서 1603년 4월에 칠백의총 옆에 건립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순의비는 본래 칠백의총 옆에 세워졌다. 그런데 뒷날 제 자리를 떠나 이곳으로 옮겨졌다. 일본인의 만행 때문이다. 순의비가 세워진 것도 일본인 때문, 순의비가 옮겨진 것도 일본인 때문인 것이다.

본래 칠백의총 옆에 세워져 있었던 순의비

안내판은 '1940년 일제 강점기에 금산경찰서장 일본인 이시가와 미찌오(石川道夫)에 의하여 이 비가 폭파됐던 것을 인근 주민들이 뒷산에 묻어 두었다가 8.15 해방 후에 다시 파내어 보관 중 1971년 4월에 그 파비(부서진 비)를 붙여 세우고 비각을 건립'했고, '몸체(비신)와 머릿돌(이수)이 떨어져 분리되어 있던 비를 2009년 9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였으며, 비의 규모에 맞춰 비각을 목조 양식으로 개축'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 순의비의 비문을 지었을 무렵, 윤근수는 조선 시대 사법기관인 의금부의 수령 판의금부사로서 왕의 장인이나 국가의 1등공신에게 주어지는 부원군 칭호를 누리고 있었다. 이는, 그가 순의비의 비문을 쓴 일이 결코 그의 개인적 취미 활동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과연 윤근수는 빗돌에 무슨 내용을 새겨 넣었을까?

어떤 이유에서도 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 순의비를 '그림의 떡'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비문의 내용을 현장에서 육안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무리 한문에 능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비바람에 시달려 마모된 이 옛날 비석의 문장을, 그것도 비각 안에 격리되어 있는 상황에서 쉽사리 읽어낼 수는 없는 까닭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금산 지역 전투도
 임진왜란 당시의 금산 지역 전투도
ⓒ 칠백의총기념관

관련사진보기


그렇다고 해서, 순의비의 내용을 알아보려는 노력도 없이 이곳을 떠날 수는 없다. 그때, 비각 오른쪽에 서 있는 작은 빗돌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순의비의 내용에 대한 해설문을 새겨놓은 빗돌이 아닐까?

기대를 품고 다가서서 보니 '1971년 4월 이은상은 글을 짓고 서희환은 글씨를 쓰고 문화공보부가 세우다'라는 꼬리말을 달고 있는 칠백의총중수기념비이다. 이 비는 칠백의총을 가다듬은 기념으로 세운 빗돌이므로 순의비의 한문 비문을 우리말로 풀어서 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용을 읽어본다.   

"보라 여기는 민족의 혼이 깃든 천추에 전할 거룩한 피의 제단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온통 도탄에 빠졌을 때 / 중봉 조헌 선생과 영규 대사가 뜻을 같이 한 7백 명 의사들과 / 금산성 밖 연곤평 너른 들에서 왜적에 항전 피나게 싸운 끝에 / 모두 다 옥쇄하니 8월 18일 의골을 모아 한 무덤에 모시고 / 칠백의사총이라 이름한 뒤부터 대대로 이 땅 겨레의 자손들이 / 마음의 예배를 바쳐 왔었다. 그러다 일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 분묘 사당 비들이 모두 헐리어 풍우 속에 버린 곳이 되었다가 / 해방 후 임진 6주갑 되는 해에 군민들의 성력으로 재건했더니 / 다시 박정희 대통령의 특지로 묘역 전체를 보수 정화함으로써 /마침내 새 면모를 갖춘 것이니 이는 실로 빛나는 큰 업적이라 / 만세에 영원히 전할지이다."

순의비의 내용을 풀어서 말해주는 빗돌은 칠백의총 옆에 세워져 있다. 순의비의 본래 위치가 칠백의총 옆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순의비가 이곳에 있으므로 비문의 내용을 여기서  읽어보는 것도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칠백의총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중봉 조선생 일군(一軍) 순의비'는 본래의 것이 아니다. 본래의 순의비는 외삼문으로 들어서자 마자 오른쪽에 있다. 임진왜란 종전 직후 칠백의총을 처음 조성할 당시 순의비는 묘 바로옆에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부수었다. 주민들이 파괴된 비를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해방 이후 복원하여 외삼문 안쪽에 세웠고, 의총 옆의 것(위의 사진)은 박정희 정부의 '정화사업' 때 건립된 것이다.
 칠백의총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중봉 조선생 일군(一軍) 순의비'는 본래의 것이 아니다. 본래의 순의비는 외삼문으로 들어서자 마자 오른쪽에 있다. 임진왜란 종전 직후 칠백의총을 처음 조성할 당시 순의비는 묘 바로옆에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부수었다. 주민들이 파괴된 비를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해방 이후 복원하여 외삼문 안쪽에 세웠고, 의총 옆의 것(위의 사진)은 박정희 정부의 '정화사업' 때 건립된 것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순의비에는 무슨 내용이 새겨져있을까

칠백의총 옆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 요약' 빗돌의 내용을 소개한다. 중종 조선생 일군 순의비 요약 빗돌도 '1971년 4월 13일 임창순 번역 요약하고 서희환 씀 문화공보부가 세움'이라는 꼬리말을 달고 있다(한문인 원문에 문단 구분과 띄어쓰기가 없으므로 빗돌의 번역문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단을 구분하고 띄어쓰기를 지켜서 소개한다).

"아아! 여기는 참판의 관직을 추증 받은 조 선생이 목숨을 바쳤고 부하 여러 동지들의 유체가 묻혀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에 전국이 적에게 유린됨을 보고 선생은 옥천에서 일어나 제자 전승업 김절 등과 충청우도로 달려가 선비인 장덕필 신란수 고경우 노응탁 및 참봉 이광륜 등과 모의하여 의병 1600명을 규합하고 7월 4일 공주에서 깃발을 올렸다.

8월 1일 승장 영규와 합세하여 적에게 빼앗겼던 청주를 수복하고 곧 임금이 계신 곳으로 달려가려 하다가 다시 금산의 적을 토벌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관군이 합세하였으나 순찰사의 방해로 부하의 군대까지 흩어지고 겨우 700명만이 남았다. 부장들은 진격을 반대했으나 선생의 충절에 감격하여 모두 따르게 되었다.

이에 앞서 호남의 권율 군이 와서 협공하기로 하였는데 시기를 늦추자는 권율의 제의를 미처 받지 못하고 8월 18일 영규의 승군과 함께 금산 10리 밖에 가서 권율의 응원을 기다렸다. 왜적은 후속 부대가 없음을 탐지하고 총공격전을 개시했다.

선생은 '오늘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의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하고 비장한 명령을 내리고 결사적인 전투를 감행하여 적의 공격을 세 번이나 격퇴하였으나 마침내 화살이 없어져 적에게 패했다. 부장들이 선생에게 피하도록 권유하였으나 '남자가 죽을지언정 구차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 하고 끝까지 독전하다가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아니하고 그대로 전사했다.

적군도 많은 사상자를 내어 시체를 수습하기에 사흘이 걸렸고 곧 다른 곳으로 달아나버렸다. 이로 인하여 호서, 호남이 보호되고 국가는 오늘의 평화를 보게 되었다. 선생의 전사를 듣고 정부에서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를 추증하고 아들 완도는 태능참봉을 시켰다.

아아! 학자가 평소에는 큰소리를 치다가도 자신에게 해가 미치는 일에는 뒤로 물러서는 자가 많다. 선생은 과거에 글월을 올려 국정을 비판하고 간신을 물리치겠다 하여 곧은 신하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제 국난에 생명을 바쳐 그의 충직을 증명하였다.

조헌 선생이 사용했던 화살통
 조헌 선생이 사용했던 화살통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선생의 이름은 헌, 자는 여식이며, 호는 중봉이다. 정묘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집이 가난하나 효성이 극진하였고 학문에 열중하면서도 꼭 실천을 앞세웠다. 순절한 이튿날 선생의 아우 범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가서 선생의 시체를 업고 옥천으로 옮겨갔다.

한꺼번에 전사한 의사 칠백 명은 모두 선생의 의기를 사모하여 감화를 받은 사람들로 충의를 위하여 일시에 목숨을 바친 분들이니 이번 전란은 물론 과거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그 중 뚜렷한 사람은 장교로 활약한 이광륜 임정식 김절 이려 변계온 양응춘 곽자방 김헌 강충서 강인서 박봉서 김희철 김인남 이인현 이양립 정원복 황삼양 박춘년 한기 박찬 등과 선비로 종군한 박사진 김선복 복응길 몽조 등이다. 아들 완기는 전세가 불리하자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고자 하여 화려한 관복으로 위장하고 싸우다 죽었다.

적이 퇴각한 뒤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 전승업이 7백 의사의 유골을 모아 한 무덤을 만들었다. 뒤에 제자인 민욱이 지방인사와 상의하고 관찰사와 군수까지 협조하여 비석을 세우게 되고 송방조의 청으로 윤근수가 비문을 지었다. 끝에 붙인 가사의 몇 구절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장렬하도다 온 진영의 순국이여! / 부서졌을망정 완전한 것이며 죽어도 영광스러웠다 / 침략자를 소탕하고 남방의 지역을 방어하였으므로 / 국가는 비로소 평화가 깃들었다. / 구름은 뭉게뭉게 새들도 구슬피 우는데 / 장렬한 넋은 한 구덩이에 잠들었도다 / 천추에 이르도록 이 비문이 읽힐 터이니 / 여기에 묻히신 영혼이여! / 영원히 살아계시는 듯하여라!

정문 안내판,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 안내판, 칠백의총중수기념비,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요약 빗돌의 글을 두루 읽었다. 덕분에 조헌 의병장과 영규 대사의 활동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이제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내용을 알아볼 차례이다.  

조헌 의병장과 영규 승병장의 활약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8월 1일 조헌 기사는 '의병장 조헌이 청주성을 회복하였다.'로 시작된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 선비)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공주와 청주 사이에 가서 장정을 불러 모으니 응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었다. 그러자 순찰사와 수령이 관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갖가지 방법으로 저지하고 방해하였다.'(관리들이 의병 모집을 방해한 까닭에 대해서는 <조선 관료들은 왜 의병 활동을 방해했을까> 참조)

임금으로부터 왜적을 물리치라는 교서를 받은 조헌이 1592년 7월 4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그 결의를 다지는 <토적 맹약도>(칠백의총 기념관 게시물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다름)
 임금으로부터 왜적을 물리치라는 교서를 받은 조헌이 1592년 7월 4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그 결의를 다지는 <토적 맹약도>(칠백의총 기념관 게시물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여러모로 다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조헌은 순찰사를 찾아가 거사에 협력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순찰사도 어쩔 수 없었는지 조헌의 말에 그대로 따랐다. 하지만 청양현감 임순이 백여 명의 군사를 데리고 와서 조헌을 돕자 순찰사는 본래대로 돌아갔다. 순찰사는 임순이 법을 어겼다면서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군사의 이동은 자신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문책이다.

조헌은 편지를 보내어 다시 순찰사를 책망한 후 의병 모집에 나서니 모두 1600명이 모였다. 공주목사 허욱이 의승(義僧) 영규에게 승군을 거느리고 조헌을 돕게 했다. 세력이 커지고 사기도 충천해진 조헌 의병군은 곧장 청주 서문으로 육박했다.

임진왜란 당시 사용되었던 창살(칠백의총 기념관 소장)
 임진왜란 당시 사용되었던 창살(칠백의총 기념관 소장)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처음에 적은 성밖으로 나와서 싸우기도 했는데, 패하여 도로 들어간 뒤에는 조용하기만 했다. 조헌은 군사를 지휘하여 성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서북쪽에서부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 천지가 캄캄해지고 사졸들이 추워서 떨었다. 조헌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

조헌은 맞은편 산봉우리로 군사들을 퇴각시킨 다음 성 안을 내려다보았다. 성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적들이 밤새 화톳불을 피우고 깃발을 세워 군사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는 그대로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조헌이 성에 들어가니 창고의 곡식이 그대로 있었다.

방어사 이옥이 와서 "이것들을 남겨두어 적의 배를 다시 부르게 할 수는 없다" 하고는 모두 태워버렸다. 조헌은 군사를 먹일 양식이 없었으므로 여러 군사들에게 각자 흩어져 식사를 해결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조헌 군의 금산 전투 장면을 그린 <금산 혈전 순절도>(칠백의총 기념관 게시물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실물과는 여러 모로 다름)
 조헌 군의 금산 전투 장면을 그린 <금산 혈전 순절도>(칠백의총 기념관 게시물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실물과는 여러 모로 다름)
ⓒ 칠백의총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조헌은 북쪽으로 가서 임금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온양에 이르렀을 때 순찰사가 사람을 보내왔다. 편지는 '서원(청주) 전투에서 공의 능력을 익히 알았으니, 앞으로는 공과 생사를 함께할 것을 맹세하오, 그런데 금산의 왜적이 고초토(高招討, 고경명)의 순절 이후 더욱 창궐해 향후 호서(충청)와 호남을 침범하려 한다는 사실을 공은 아시오?' 하고 말문을 열었다.

순찰사는 '만약 적이 호서와 호남을 침탈한다면 국가는 다시 중흥할 희망을 잃게 될 것이며, 공을 따르는 사졸들도 자신의 집을 생각하게 될 터이니 어떻게 안심하고 북쪽으로 갈 수 있겠소? 작전을 변경하여 금산의 적을 토벌한 뒤에 나와 힘을 합쳐 근왕(勤王, 임금을 지킴)을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청주성 탈환하고도 관료들의 방해로 군사 수가 크게 줄어든 조헌

그러나 '순찰사의 의도는 단지 조헌 일행이 북쪽으로 가는 것을 막는 데 있었고(特泥其北行而已), 또 조헌의 군대를 저지시킴으로써 사졸들의 마음이 점차 흩어지리라 계산한 결과일 뿐이었다(計士卒漸散).' <임진전란사>의 이형석도 이 대목에 대해 '조헌이 행재소(行在所, 임금의 임시 거처)로 가서 자기가 우유부단했던 것을 선조에게 아뢸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그런 술수가 획책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순찰사의 그같은 계산을 조헌의 수하 장수들이 짐작할 리 없었다. 게다가 순찰사의 제안은 액면 그대로만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에 조헌의 장사들도 조헌에게 "순찰사와 조화를 이루어 먼저 금산의 적을 토벌하는 계교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라고 했고, 조헌도 공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조헌의 휘하에는 단지 700 의사만 남게 되었다.

칠백의총
 칠백의총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칠백의총 답사기는 분량 관계로 나눠 게재합니다. 계속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태그:#칠백의총, #조헌, #고경명, #변응정, #유팽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