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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복사와 소안탑
 천복사와 소안탑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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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복사(薦福寺)와 소안탑(小雁塔), 이것은 당나라 무측천(武則天, 624~705)과 관련이 깊다. 천복사는 684년 그녀의 명령으로 창건되었고, 친히 사액을 내려 황실의 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안탑은 의정(義淨, 636~713) 스님이 천축국에서 가지고 온 불경을 보관하고 그것을 번역하기 위해 707년 건축을 시작했다. 이처럼 소안탑은 그녀가 죽은 지 2년 후 지어지기 시작했으나, 그것은 불교에 대한 무측천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의 결과였다.

무측천은 불교를 중흥시킨 대표적인 황제로, 그녀의 시대를 성세영불(盛世迎佛)이라고 표현한다. 성세영불이란 부처님을 영접해서 번성하게 한 시대라는 뜻이다. 천복사는 원래 중종 이현(李顯)이 황제로 등극하기 전 살던 집이었다. 683년 말 고종 이치(李治)가 승하하자, 무측천이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684년 3월 이현의 구택을 절로 바꾼 후 헌복사(獻福寺)라 불렀다. 그리고 그녀가 집권하고 난 690년 절 이름을 천복사로 바꾸고, 자신이 직접 쓴 사액을 내렸다.

의정대사 조상
 의정대사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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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5년에는 법을 구하러 천축국에 갔다 온 의정 스님을 영접해 대복선사(大福先寺)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역경사업에 착수토록 해 699년 <화엄경> 번역을 완료할 수 있었다. 706년이 되자 중종은 의정 스님을 천복사에 머물게 하고, 전문적인 역경원을 설치한다. 이때 불경의 보관과 역경을 위한 장소로 탑의 건축이 논의되었고, 707년 건축이 시작되었다. 탑의 완성은 2년 후인 709년쯤으로 추정된다. 이후 의정은 712년까지 56부 230권의 번역을 완료한다.

소안탑이라는 이름의 유래
   
소안탑은 709년 15층 전탑(磚塔)으로 완공된다. 여기서 전이란 구운 벽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전탑이란 구운 벽돌로 벽을 쌓아올린 다음 그 틈을 황토 진흙으로 접착시키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탑은 지하 3.7m 깊이의 지궁(地宮), 가로 세로 21.1m의 정방형 기단부, 가로 세로 11.38m의 1층 탑신부, 높이 3m 정도의 2~15층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졌다. 기단부와 1층 탑신부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전체 높이가 55~60m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안탑
 소안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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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이 완공되자. 중종은 궁중의 관리들을 대동하고 대법회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관리와 승려는 불법을 찬양하고, 소안탑의 웅장함을 칭송했다고 한다. 소안탑은 대자은사의 대안탑과 비교해 그 높이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소안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기러기는 날아갈 때 행렬을 짓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형제를 비유한다. 그러므로 먼저 지어진 자은사탑이 형인 대안탑이 되고, 나중 지어진 천복사탑이 동생인 소안탑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소안탑의 지궁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300과 안치되었고, 각 층에는 천축국에서 가지고 온 불경이 보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300년의 역사 속에서 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 탑은 현재 상륜부와 14~15층이 훼손되어, 13층 전탑으로 높이가 43.3m이다. 이처럼 탑이 훼손된 것은, 첫째 황소의 난 같은 전란 때문이고, 둘째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때문이다. 건물에 영향을 주는 지진은 진도 4 이상인데, 소안탑 건축 후 지금까지 진도 4 이상의 지진이 70회 정도 있었다고 한다.

지진으로 가운데가 갈라진 소안탑
 지진으로 가운데가 갈라진 소안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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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장 강력한 지진은 1556년 명나라 때 발생한 진도 8의 관중대지진이다. 이 지진으로 탑의 가운데가 상하로 균열되어 탑이 두 부분으로 갈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1563년 다시 지진이 나 갈라진 부분이 원래의 모습으로 합쳐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소안탑은 이처럼 지진으로 인해 갈라졌다 합쳐지는 일이 세 번이나 있었다고 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소안탑의 삼열삼합(三裂三合)이라고 부른다.

탑은 계단을 통해 기단을 올라가게 되어 있고, 1층의 남북에 있는 문을 통해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탑 안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최상층까지 올라갈 수 있다. 소안탑은 대안탑과 달리 중간에 전망창이 없기 때문에 13층까지 올라가서야 밖을 내다볼 수 있다. 이곳에 오르면 북쪽으로 명대성벽을, 남쪽으로 섬서성 체육장과 대흥선사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의정이 번역한 불경과 구법여행기

천복사 중심법당 대웅보전
 천복사 중심법당 대웅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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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은 구마라집(鳩摩羅什, 334~413), 진제(眞諦, 499~569), 현장과 함께 불경을 번역한 4대 역경가에 속한다. 그가 번역한 대표적인 불경이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공작왕경(孔雀王經)><약사칠불경(藥師七佛經)><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根本說一切有部毘那耶)> 등이다. 그중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는 율장에 관한 책으로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 나오는 다섯 가지 계율은 다음과 같다. 1. 살생하지 마라. 2. 도적질하지 마라. 3. 삿되고 음탕한 마음을 품지 마라. 4. 망언을 하지 마라. 5. 술을 먹지 마라. 그리고 이러한 오계(五戒)뿐 아니라, 승려가 지켜야 할 아주 구체적인 실천강령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정법사가 거주하는 동안 천복사는 율종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의정은 또한 법현, 현장, 혜초와 함께 입축구법여행기를 쓴 4대 여행가에 속한다. 그는 해로를 통해 25년 동안 동남아시아와 천축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대당서역구법고승전>과 <남해기귀내법전>을 썼다. 이들 책에서 의정은 불법을 찾아 천축국을 찾은 당나라와 해동의 승려 60여 명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다녀온 30여 국의 역사와 지리, 문화와 풍속, 항해와 기후, 정치와 경제 등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로부터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중국 땅에는 많았다. 법현법사는 처음으로 거친 길을 개척했고, 현장법사는 그 가운데 왕도(王道)를 열었다. 그간 보랏빛 자욱한 변방을 지나 서쪽으로 외로이 떠나고, 푸른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홀로 사라져갔다. 이들은 불교의 성스러운 유적을 생각하며 온몸을 다 바쳐 순례하고 돌아왔다.

물러서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네 가지 은혜(四恩)에 보답하고자 희망을 품고 장도에 올랐다. 그러나 난관이 많고, 보배로운 인도 땅은 아득하고 멀어, 10명도 넘는 사람이 출발했으나, 결실을 맺는 사람은 하나도 안 되었다. […] 오호라. 그 정성이 아름답고 기쁘기 이를 데 없도다. 이에 그 분들의 향기로움을 책으로 전하고 싶어, 보고 들은 바에 근거해서 간략하게나마 행장(行狀)을 찬하려고 한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상권 서문)
             
자료전시관에서 알게 된 신라인 장보고와 최치원

무측천과 중종 그리고 천복사
 무측천과 중종 그리고 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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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소안탑을 지나 장경루(藏經樓)로 간다. 이곳에는 원래 의정스님이 천축국에서 가져온 경율론 삼장이 보관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 경전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지금은 천복사와 소안탑 유물전시관이 되어 절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패널과 사진 자료를 통해 이 절과 탑이 무측천과 중종 때 만들어졌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주석했던 스님들의 행적과 초상화도 볼 수 있었다.

의정 법사는 중국의 율종을 완성하고,  법장(法藏, 643~712) 화상과 살차난타(實叉難陀: 652~710) 스님은 중국의 화엄종을 열었다. 대흥선사에 주석했던 세 스님 선무외, 금강지, 불공삼장도 처음에는 이곳 천복사에서 활동했다. 혜초 스님도 중국에 유학와 이곳 천복사에서 금강지 스님을 만났다. 또 한 세기 후인 838년 일본의 스님 옌닌(圓仁, 795~864)이 견당사(遣唐使)를 따라 당나라 산동성으로 들어왔다. 그는 오대산에서 천태종을 공부하고, 840년 장안의 대흥선사로 간다.

천복사 주초석 연화대
 천복사 주초석 연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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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러 차례 천복사를 방문한다, 당시 천복사는 여러 가지 불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847년 완성한<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礼行記)>에서 천복사 경험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842년 10월 회창법난(會昌法難)이 일어나 외국인 승려 추방령이 내려지자, 옌닌은 이듬해 5월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옌닌이 중국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뱃길을 도왔던 이가 바로 신라인 장보고(張保皐)였다.

"부처님 치아사리가 있는 누각에 올라 불치사리를 친견했다. 머리를 숙여 예배했다. 그리고는 번경원(翻經院)에 들어가 의정삼장의 진영을 보았다."

장경루의 비천상
 장경루의 비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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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찬한 법장화상전: 왼쪽
 최치원이 찬한 법장화상전: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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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전시된 문화유산으로는 주초석과 장대석 그리고 비석이 있다. 주초석 중 정교한 것은 연꽃무늬가 선명하다. 비석으로는 '대천복사 중수탑기(重修塔記)'가 눈에 띈다. 비의 끝부분에 '대송 병신 정화 6년 5월27일 이서기(大宋丙申政和六年五月二十七日李壄記)'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1116년 이서가 찬한 비석임을 알 수 있다. 비석 아래는 비천상이 있는데, 정교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장경루를 나온 우리는 그 앞 대웅보전으로 간다. 그러나 대웅보전 역시 더 이상 불전이 아니다. 그나마 절과 탑에 있던 불상과 석사자 등이 있어 이곳이 불교 건축임을 짐작케 한다. 여기서 나는 천복사 출신으로 화엄종을 연 법장 현수(賢首)국사의 전기를 신라인 최치원이 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제목이 '당대천복사 고 사주 번경대덕 법장화상전(唐大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尙傳)'이다. 당시 최치원의 직책은 시강(侍講) 겸 한림학사 승무랑(承務郞)이었다.


태그:#대천복사, #소안탑, #의정 법사,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장보고와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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