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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기념 당일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요?"

교사의 질문에 일부 아이들은 주위를 둘러보거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에 잠깁니다. 한 쪽에선 밝은 얼굴로 아이들이 4·19혁명일이라고 힘차게 외칩니다. 교사인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얘들아, 4월 혁명 기간 동안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4월 19일! 왜 혁명이 일어났지요?"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부정선거 때문에 일어났어요."

놀라운 일은 부정선거가 이승만 대통령을 또다시 당선시키기 위해서 일어났다고 답변한 사실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부정선거를 자행한 게 아니라고 하면 아이들은 뜨악한 표정을 짓습니다.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에도 나와 있지만 야당(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돌연 사망으로 이승만은 이미 당선이 확실시된 상황이었습니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자 김주열 학생의 죽음을 초래한 3·15부정선거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기획된 부정선거였습니다.

1960년 당시 한국 나이로 이승만 대통령은 86세의 고령이었습니다. 당시엔 60세 환갑을 맞은 분들이 환갑잔치를 성대하게 할 정도로 60세를 넘기는 경우가 축복이었고 70세는 희소하고 드물다 해서 '드물 희' 자를 써 고희(古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86세의 고령 이승만 대통령은 건강상 매우 위태위태한 나이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유고시에 대통령 권한 승계는 부통령에게 있었고 집권 여당인 자유당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부정선거를 획책했던 것입니다. 이미 1956년 대통령/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그 실패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황당한 사사오입개헌(1954)으로 세 번째 대통령에 출마한 이승만은 조봉암을 누르고 3선 대통령으로 당선되지만 부통령은 자유당 이기붕이 떨어지고 민주당 장면이 당선되었던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4년 내내 이승만 대통령은 부통령 장면을 부통령으로 대접하지 않았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전력이 있었기에 더더욱 부정선거 양상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이기붕을 중심으로 많은 대기업들로부터 불법정치자금 70억 환을 조성하였습니다. 거기다 사전 4할 투표와 그것도 모자라 투표함 바꿔치기, 3-9인조 공개투표, 경찰 등 공무원의 조직적인 선거운동 개입, 야당 참관인 축출 등 투개표 전 과정에서 국민 여론을 왜곡, 조작하였을 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질서 자체를 뿌리 채 뒤흔드는 상황을 연출하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186명의 어린 학생들의 고귀한 희생과 2천명에 이르는 총상자들의 숭고한 저항을 낳은 4월 시민 혁명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를 다시 깊이 뿌리박기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큽니다.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4월 19일을 비롯해 4월 혁명 전 과정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은 절대 다수 중고교생들이었습니다. 4·19혁명을 4·19학생혁명으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구 2·28데모,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대한 3·15 마산 1차 의거, 오른 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27일 만에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에 분노한 마산 2차 시위 모두 한결같이 고교생이 중심이 되어 독재권력에 대해 저항한 사건이자 역사적 항거였습니다.

특히 마산 2차 시위는 4/11-13일, 3일간 지속되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마산상고, 마산여고, 마산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는 비장하고 격렬했습니다. 남학생들은 울면서 돌멩이를 던지고 여학생들은 치마에다 돌멩이를 나르며 경찰의 총격 앞에서 울부짖으며 분노했습니다. 4월 마산 2차 고교생 시위의 불길은 이후 청주, 수원을 거쳐 서울로 번지면서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1천 명의 항의시위로 확산됩니다.

다시 아이들에게 1960년 '대구 2·28 데모'를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아는 아이들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분명히 1학년 때 한국사를 배웠을 텐데 시간이 너무 지나서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출판사의 검인정 교과서 <고등학교 한국사>를 펼쳐보았습니다.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가운데 특히 4·19혁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자 학생운동사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사건으로 평가받는 '대구 2·28데모'가 수록돼 있지 않았습니다. 생각건대 검인정 교과서의 한계입니다. 선진국처럼 교과서가 자유발행제였다면 당연히 실렸을 내용입니다. 역사 속 어린 학생들의 높은 자주성과 희생정신이 빛났던 역사적 사건을 누락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교사가 4·19혁명의 시발점인 '대구 2·28데모'를 설명하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할지라도 아이들은 관심 밖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시 교육 현실 속에서 교과서에 기술돼 있지 않으면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시험과도 무관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948년 이승만 제1공화국 탄생 이후 1960년 2·28데모까지 12년 동안 중고교생과 대학생의 자발적 시위는 전무했습니다. 국가 권력이 동원한 학생 관제데모나 반공궐기대회는 숱하게 있었어도 학생들의 순수한 정의감에 기초하여 일어난 시위나 데모는 없었습니다. 12년 극우반공 독재의 기나긴 침묵을 깨뜨린 역사적 사건이 바로 '대구 2·28 학생 시위'입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2년 만에 발생한 '대구 2·28데모'는 최초의 자발적 학생시위이자 불의에 항거한 역사적 쾌거입니다. 당연히 역사교과서에 기술하고도 남을 빛나는 사건이지요.

더구나 '대구 2·28데모'는 경북고교, 경북사대부고 등 대구시내 고교생이 연대하여 자유당 정권에 항거한 사건입니다. 당시 집권 여당인 자유당이 대구 수성천변에서 열릴 예정이던 야당 부통령 후보(장면 박사)의 선거유세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60년 2월 28일이 일요일이었음에도 공무원에겐 출근 지시를 내리고 대구 시내 일원 초·중·고교 학생들에겐 등교지시를 내렸던 것입니다. 학원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 간섭과 탄압이 빌미가 된 '대구 2·28데모'는 그렇게  4·19혁명의 역사적 발단이 되었습니다.

'2·28데모'를 모르고 자란 오늘의 10대와 20대에게 자율성에 기초한 자주적인 인간상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몇 년 전 아이들에게 <학생의 날>이 언제인지 질문을 던졌을 때 절대 다수의 아이들이 깜깜이였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아이들에게 11월 3일이 학생의 날임을 알려주면서 왜 학생의 날이 11월 3일인지 물으면 역시 돌아오는 답은 침묵 그 자체였습니다.

스승의 날이 언제인지는 초딩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다 아는데 정작 알아야 할 학생의 날과 그 날의 유래를 모른 채 학교를 다니고 있는 모습은 한국교육이 자주성을 길러주는 교육의 본질에서 한참 비껴나 있음을 확인해 주어 씁쓸합니다. 일제치하 노예교육에 항거한 항일운동의 백미! 광주학생운동(1929)의 정신이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드높인 4월 혁명(1960)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다시 반독재 민주항쟁인 광주민주화운동(1980)으로 면면히 계승되었습니다. 물론 그 저항의 중심세력 또는 참여세력으로 고등학생들이 존재했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교육과정상 절실히 필요합니다.

마치 오늘의 40대 이후 중장년들이 중고교시절 반민특위와 동북항일연군을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채 졸업한 연유로 자신의 현대사의 한 부분인 역사적 사실 앞에서 깜깜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선한 가치를 추구하고 아이들 마음속에 정의감이 살아 숨 쉬는 교육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기능적 지식으로 주입되는 입시교육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자주성을 키워주는 교육은 역사 속 선열들의 흔적을 이해하고 오늘의 교육 속에 올바로 계승할 때 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권 때 뉴라이트 세력들이 집요하게 없애고자 노력해서 사라진 한국근현대사 과목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 길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자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안내하는 첫 걸음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행 검인정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교과서 체제로 바꾸려는 권력의 불순한 시도부터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국가 주도의 교육과정 편성과 교육을 정치의 도구로 규정한 권위주의적 교육행정이 과거 일본 군국주의 질서 하에서 가미카제 특공대 등 무모한 희생과 얼마나 끝없이 인간의 가치를 저락시켰는지를 회고해 본다면 그 자체로 역사로부터 얻는 값진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주성을 길러주는 교육은 아이들 스스로 인격체로서의 존엄과 자율성을 존중받는 교육환경 속에서 가능합니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주적 인간형은 기능적 지식을 머릿속에 쉼 없이 주입한다고 형성되는 게 아님은 자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학교교육과정으로 자주성을 길러줄 수 있는 교육활동을 제안합니다. 4·19 혁명 기념일의 경우 4·19 혁명 관련 다양한 기념행사(4월 혁명재판/퀴즈 대회/축구 대회/마라톤 대회/선배 고교 열사 추모대회 등)를 학교단위나 교육청 단위로 개최하는 전통을 수립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거의 하지 않고 지나치는 4·19 혁명! 박제화 된 이 날을 학교교육과정의 하나로 편성하여 다양한 행사를 통해 4·19 혁명 정신과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경험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자주성을 길러주는 교육의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자주성#교육의 본질#4월 혁명#교과서 국정화#대구 2,28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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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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