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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인생에 대한 염증에 맞서는 최상의 치료제로서, 한 시간의 독서로 제거되지 못할 울적한 기분은 결코 없었다." – 몽테스키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시간여행을 경쾌하게 다뤘다. 주인공 길(오언 윌슨 扮)은 길을 잃고 헤매다 낡은 푸조를 얻어타고 '타임워프'에 빠진다. 그가 도착한 곳은 1920년대의 파리.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술을 마시며 교분을 나누는 길에게 파리의 낭만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이다. 물론 매력적인 파리지엔느 레아 세이두와 함께 말이다.

<책인시공>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
 <책인시공>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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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시공(冊人時空)>의 저자 정수복도 걷는 사람이다. 도시를 걷듯이 책 속을 걷는 그는 걸으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독자 권리 장전'으로 운을 떼는 이 책은 자못 비장하다.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는 독재정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유로운 독서의 권리를 제약해왔다. 학교와 가정은 그런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자유로운 책 읽기를 방해하고 특정의 책 읽기를 강요해 왔다. 이에 신성불가침한 독자의 권리를 천명하는 독자 권리 장전을 선포함으로써 독자의 권리에 대한 일체의 간섭과 규제를 배제하고자 한다."

책을 읽을 권리부터 자기만의 책을 쓸 권리까지 총 20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독자 권리 장전'은 마치 자기계발서의 핵심요약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한 해 도서관에서 1800권의 책을 열람하는 저자의 내공에서 나온 것이니 허투루 볼 것만은 아니다.

시민단체 활동가로, 시사 교양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활동하던 저자는 돌연 프랑스로 '자발적이고 정신적인 망명'을 떠난다. 그가 망명한 프랑스는 파리 센 강변의 부키니스트(bouquiniste)들과 아를과 오세르에서 고품격 서점을 만날 수 있는 그야말로 책의 천국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센 강변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눈에 띄는 재미있는 책을 발견하는 것을 즐기는데, 그런 책을 발견했을 때 '고기 한 마리 낚았다'는 표현을 쓴다. 어느 날 나는 강변의 부키니스트 상자에서 고기 한 마리를 낚았다. 중세역사의 권위자 자크 르 고프의 자서전이었는데 책 표지 다음 장에 저자가 누군가에게 해준 서명이 들어 있었다."

저자가 만난 프랑스 서점의 주인들은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그들은 계산대 앞에 앉아 손님이 골라온 책을 봉투에 넣어주고 돈만 받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축소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독자에게 어울리는 책을 전달하는 것을 자신들의 일로 삼는다. 서점을 찾은 고객들도 필요에 따라 서점 주인에게 책에 대한 의견을 묻는데, 그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손님이 '50대 남자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요즘 나온 책 가운데 그 사람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 있느냐'고 물으면, 서점 주인은 역사서로는 어떤 책이 있고 소설로는 어떤 책이 있다고 몇 권의 책을 추천한다. 고객이 책장을 넘겨보다가 그중에 한 권을 선정하면 서점 주인은 책 뒤표지의 책값이 인쇄된 부분에 작은 동그라미 스티커를 붙이고 예쁜 종이로 멋지게 포장해준다."(내가 선물받는 입장이라면 받자마자 스티커부터 떼었을 것 같다.)

저자가 10여 년간의 프랑스 생활에서 느낀 점은 이렇다. 파리 사람들에게 서점은 꼭 사야할 책이 있을 때만 가는 장소가 아니라 지나가다가 심심하면 들러보는 곳이다. 또한 프랑스 작가들이 성장기에 동네 서점 주인과 맺은 관계를 이야기한 글을 모아놓은 책도 본 적이 있다는데, 이는 한 사람이 책을 읽고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동네 서점 주인과의 관계가 매우 특별하고 중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강조한다(최근 우리나라에도 홍대, 해방촌, 광주, 대구, 부산 등지에서 분야별로 특화된 동네책방들이 생겨나고 있다는데, 고무적인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앞 문방구 한켠에 진열되어 있던 동화책에서 시작된 저자의 독서편력은 종로서적, 범한서적, 원서의 해적판을 만들어 팔았던 광화문의 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는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실물 책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서점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서점이라고 역설한다. 풀밭이건 병실이건 감옥이건 묘지에서건 어디에서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고 말이다.

지난 16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도서전에는 올랑드 대통령을 비롯 프랑스 정부관료들이 대거 참석해 반나절 동안 출판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한국-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맞아 주빈국으로 초대된 우리나라는 문화부장관은커녕 대사조차 참석하지 않아 빈축을 샀다.

정수복의 '독자 권리 장전'에 나온 것처럼 독재정권이라 자유로운 독서의 권리를 제약하기 위함일까.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서울국제도서전에 들러 무려 5권의 책을 사갔다. 그 책들은 유학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철학 서신들을 모은 <답성호원>, 소설 <이방인> 7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일러스트 이방인>, 로맹 가리의 데뷔작 <유럽의 교육>, 니체 철학 기반의 철학 치료 내용을 담은 <철학과 마음의 치유>, 정조와 홍대용의 문답을 담은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책들을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읽었다면 세월호와 국정교과서, 유승민의 탈당이 이뤄졌을까. '책인시공', 즉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은 <인터스텔라>처럼 다른 것인가 보다.


책인시공 -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

정수복 지음, 문학동네(2013)


태그:#독서, #책인시공, #정수복, #파리,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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