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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재래시장에서 돼지머리를 볼 때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잘려나간 돼지머리와 웃는 표정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웃는 돼지머리일수록 값이 더 나갔다. 제 모가지가 떨어지는 고통을 짐승이라고 모를 리 없는데. 무슨 재간으로 삶은 돼지머리는 웃고 있는지 이상야릇했다.

웃는 돼지머리를 만들기 위해 삶을 때 주둥이에 막대기를 물린다는 둥, 삶은 후 굳기 전에 머리 근육을 주무른다는 둥 말이 많았다. 분명한 건 잘려나간 돼지머리에 웃는 표정을 생각해낸 건 바로 인간이었다. 혀끝에 감기는 씁쓸한 그 무언가가 자꾸만 입안을 텁텁하게 만들었다.

안토니오 타부키/ 이현경 옮김/ 문학동네
▲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 겉표지 안토니오 타부키/ 이현경 옮김/ 문학동네
ⓒ 우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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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타부키의 소설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를 알게 됐을 때, 시장에서 처음 돼지머리를 본 그 순간이 떠올랐다. 적나라하고 끔찍한 그 무엇을 처음 대면했을 때의 낯 뜨거움.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이 소설의 배경은 이랬다.

1996년 5월 7일 밤 포르투칼의 한 청년이 리스본 교외의 국가방위대 경찰서에서 살해됐다. 고문당한 흔적이 역력한 시신은 공원 근처에서 머리가 잘려진 채로 발견됐다.

타부키는 정치적인 문제에 적극 참여하는 '이탈리아의 행동하는 지성'으로 존경받는 작가였다. 소설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가 더욱 놀라운 것은 실제 범인들의 진술 내용이나 재판 과정이 소설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사건의 범인이 죄를 시인하고 형을 선고받자, 포르투칼 언론들은 내게 어떻게 재판 결과를 예측해서 소설을 썼느냐고, 혹시 점쟁이라도 되느냐고 물어보더군요." (안토니오 타부키)

리스본의 신문 기자인 피르미누는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숙소로 머물 하숙집 주인 도나 호자와 사건을 맡아줄 변호사 돈 페르난두가 그의 취재를 도와줬다. 피르미누는 전후 포르투칼 소설에 미친 비토리니의 영향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은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서사적 전개의 주인공인 피르미누의 존재감은 후반부로 갈수록 미약해졌다. 피르미누는 자기 마음대로 기사를 작성할 수 없었다. 특종 기사의 호외 판매부수를 고려해 대중에게 호감 살 만한 기사를 써야 했다. 신문사 사장의 특별한 요청 때문이었다.

작가는 역동적인 주인공의 활약상과 긴박한 사건 전개의 흐름 대신, 지시사항에 저항할 수 없는 나약한 월급쟁이 기자의 모습을 그려냈다. 사건 결과를 예측할 만큼 뛰어난 작가적 상상력을 가진 타부키는 소설의 집약적인 서사구조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소재의 강렬한 이미지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작가는 서사적인 긴장과 이완을 반복해나갔다.

이에 비해 변호사 돈 페르난두는 두 번째 주인공처럼 소설적인 존재감이 커져갔다. 변호사가 신문 기자를 공략하듯, 문학과 철학, 법률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유감없이 작가적 세계관을 드러냈다. 작가는 돈 페르난두를 통해 자신이 내세운 주인공의 위약함을 그려냄과 동시에 이 소설을 쓰게 된 작가적 동기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작가는 어두운 시대의 내면을 들여다볼 까닭을 돈 페르난두를 통해 설명한 셈이었다. 그것은 작가적 사명이기도 했지만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의무이기도 했다. 불행한 사람들을 변호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 자신이 불행했기 때문이었다. 개인의 불행은 시대의 모습과 별개일 수 없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개인의 행복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려면 먼저 과거의 진실부터 알아야 한다. "과거로부터 올 편지를 기다리는 사람"은 문득 "예전에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분명히 이해하게 될"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127쪽) 결국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서로서로 관련 있기 때문"에 촘촘한 "거미줄"처럼 엮여져 있다. "모든 길은 중앙으로 이어"져 있다. "바깥에서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세상은 "은밀하게 연결되고 비현실적으로 결합되고 이해할 수 없는 우연의 일치들로 이루어진 체계"이다.(129쪽)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의 "근본규범"이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머리를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타부키는 범죄 소설에서 흔히 사용하는 추리 기법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사회의 모순적인 실체를 밝혀내는데 중점을 뒀다. 서사적 주인공과 심리적 주인공을 따로따로 설정한 걸 보면, 소설의 서사적 흐름 역시 비합리적인 세상을 폭로하기 위한 암시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본질적인 실체를 보여주고 싶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상에 알려졌을 때 비로소 사건이 된다. 사건이 밝혀질 때의 과정은 피르미나가 밟아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먼저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돼야 하고,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누군가의 취향에 맞게 알려진다.

우리가 전해 듣는 뉴스의 실체란 공원에서 발견된 머리 잘린 변사체와 같다. 어쩌면 우리는 '머리를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건의 현상은 드러나지만, 사건의 핵심은 좀체 밝혀지지 않았다. '다마세누 몬테이루'는 작가가 살았던 리스본 서민지역의 실제 지명이었다. 현상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본질은 현상에 파묻혀버리기 쉬운 혼돈의 시대.

다마세누는 중국과 수출입 무역업을 하는 회사의 임시직 배달사환이었다. 그는 수입한 물품이 보관된 컨테이너 안에 마약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갑작스레 야간 경비원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다마세누는 회사에 잠입해 마약을 훔칠 계획을 세웠다. 다마세누의 친구 레오넬 토호스가 함께 동행 했다. 창고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던 토호스는 낯선 무리의 사람들이 창고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낯선 무리의 사람들은 다마세누를 밖으로 끌어내 차에 태운 후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토호스가 몰래 뒤따라간 그 곳은 놀랍게도 경찰서였다. 그는 몰래 숨어 경찰서 안을 주시했다. '초록 귀뚜라미'의 별명을 가진 국가방위대 경위가 다마세누를 구타하고 있었다. 뒤이어 총성이 울렸다.

구타를 당한 상흔과 담뱃불에 녹아내린 살점, 그리고 왼쪽 관자놀이 부근의 총알구멍. 그건 "피 냄새를 맡은 잔인한 짐승"들이 남겨놓은 비인간적인 증거였다. 쓰레기로 뒤덮인 수풀에 "낡은 신발짝이나 구멍 난 냄비처럼" 버려진 의문의 변사체. 며칠 후 강가에서 시체의 머리가 발견되면서 범인을 추적하는 소설적인 흐름에 급물살이 퍼져갔다. 서로 다른 양측의 진술과 모순된 증언의 함정을 헤집고, 타락한 공권력을 엄중한 법의 잣대로 심판할 수 있을 것인지.

"한 개인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개인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지요. 인간적인 견지에서 모든 것은 그에게로 이어지고, 각 개인은 인류의 뿌리를 이룹니다. (중략)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의 죽음만을 경험할 수 있지요. 이 때문에 다만 죽음에 대해 상상하고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211-212쪽)

법정에서 변호사 돈 페르난두가 한 마지막 최후진술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절박한 호소였다. 우리가 목격한 죽음의 실체는 우리가 발버둥 치며 살아야 할 고통의 무게였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것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철거가 시작될 용산의 한 건물 위 망루에서 불타죽은 철거민 농성자들과 경찰. 바닷물 속에 잠겨버린 세월호에서 허무하게 죽어간 승객들. 그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어떤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부조리한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대면했던 우리들은 눈앞이 캄캄했다.

"존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무無"로 만들지 않기 위해, 그 푸르던 봄날 우리가 입을 모아 불렀던 노래도 어느덧 까마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9쪽) 잊지 않겠다는 슬픈 맹세만으로는 삶의 무게가 줄어들지 않을 모양이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이 억울한 죽음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소설 곳곳에 마련해놓은 녹록치 않은 작가적 세계관에 기대어 시대의 은밀한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덧붙이는 글 |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 안토니오 타부키/ 이현경 옮김/ 문학동네/ 값 11500원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 (반양장)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이현경 옮김, 문학동네(2016)


태그:#안토니오 타부키,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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