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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에 갔다. 명사십리 기나긴 백사장을 걷고 싶었다. 맘에 드는 시와 함께 걸으면 더 운치가 있겠지. 집을 떠나기 전 겨울바다에 어울리는 시를 검색했다. 네이버에 '겨울바다에 관한 시 모음'이 떴다. <겨울바다에 가는 것은(양성우)>이란 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말하듯 외우기도 쉬었다.

"겨울바다에 가는 것은 / ...... // 동굴 속에서 머물러 지내다가 / 푸른 하늘을 보러가는 것이다 // 겨울바다에 가는 것은 / 갈매기 따라 날고 싶기 때문이다 / 시린 바닷바람 가슴 가득히 마셔 / 나를 씻어내고 싶어 가는 것이다" 

광주에서 두 시간, 하늘 높이 바다를 향해 오른팔을 뻗쳐 든 장보고 동상을 스쳐 지나자마자 버스는 완도와 신지도를 잇는 신지대교에 올라선다. 신지대교주차장이 '명사갯길 1코스(10km)' 시작점이다. 오른쪽으로 멀리 완도타워가 아스름하게 따라온다. 바다낚시꾼들이 간간히 보이는 바위섬들, 수심 깊은 짙푸른 바다 물을 내려다보며 걷는 숲속 벼랑길이다. 물하태와 등대를 거쳐 명사십리 입구까지 이 십리, 두 시간 넘게 오솔길을 걸었다. 신지도 바닷바람은 시리지 않고 시원했다.

'겨울바다...... '의 시구가 쉽게 흘러나온다. "...... 고독을 만나러...... , 자유를 느끼기 위해...... , 푸른 하늘을 보러...... , 갈매기 따라 날고 싶어...... ", 그런데 이상하게 마지막 대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린 바닷바람 가슴 가득히 마셔'까지 잘 나가다 끝줄에서 꽉 막혀버렸다. 열줄 밖에 안 되는 시구 중 마지막 한 줄인데...... 가슴가득 바닷바람 마시고 무엇을 어쩌겠다는 말일까? 무얼 하겠다는 말일까.

시간이 가면 자연히 떠오르겠지... 메모를 보고 싶은 생각을 눌렀다. 벼랑길이 끝나자 시야가 확 트인다. 명사십리 백사장이 하얗게 눈부시게 펼쳐진다. 백사장은 정남향이다. 바다를 양 팔로 싸안아 그 중천에 한낮의 태양을 모셨다. 태양아래 바다는 푸른빛이 아니다. 온통 반짝이는 금빛이다. 금가루 물결같이 파도가 출렁인다. 찬바람 불어치는 한 겨울 백사장은 뜻밖에 쓸쓸하지 않다. 주말이라서 더 붐비는가, 방한복을 입은 걷기꾼들이 줄을 잇는다.

백사장 뒤편 솔숲에는 데크 길이 정성들여 만들어져 있다. 명사갯길 정규코스이다. 그 길은 여름에 걸으면 되지, 바닷물이 핥아대는 모래톱에 내려선다. 자디잔 모래들은 밀어오고 밀려가는 파도에 젖어, 걷기 좋게 다져져 있다. 차가운 날씨만 아니면 맨발로 걷고 싶다. 물결이 만드는 물과 뭍의 한계선을 걷는다. 조금만 바다 쪽으로 다가가면 물결에 신발을 적실 판이다. 그렇구나! 이 길이 세상 모든 길 중에서 가장 낮은 길이구나! 그래서일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쏴~아 철썩~ 촤악~ 처얼석~ 촤르륵~ 파도소리도 달리 들린다. 바다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바다가 백사장을 만나 소곤거리는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다. 수 천 수 만 년 전부터 저렇게 쉬지 않고 한결같이 얘기해왔을 터인데, 무슨 얘기일까? 이렇게 가까이에서 차분하게 들어본 적은 처음이다. 백사장 십리가 훌쩍 지나간다. 시구외우기보다 파도이야기 듣는 게 훨씬 재미있다.

메모를 보고 되살려낸 마지막 시 구절이 생각난다. "...... 나를 씻어내고 싶어 가는 것이다" 왜 이 구절만 그렇게 안 떠올랐을까? 생각해보니 '바닷바람으로 나를 씻어낸다'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아서였다. 수천 수 만년 파도물결이 모래를 씻어내는 겨울바다를 걷고 나니 이제야 실감이 난다. 파도소리가 가슴을 씻어낸다는 걸. 나에게는 바닷바람보다 파도소리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백사장이 끝나자 돌아갈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버스가 신지대교에 올라서자 하늘높이 손을 뻗친 장보고 동상이 우뚝 솟는다. '잘 돌아가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명사십리 파도들은 장보고 이야기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돌아오는 내내 파도소리가 귀에 남아 울린다. 내식으로 마지막 구절을 바꿔 불러본다. '겨울바다에 온 것은 / 파도소리 귀에 가득히 담아 / 가슴을 씻어내고 싶어서다'


태그:#명사십리, #파도소리, #겨울바다, #장보고, #명사갯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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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밥값을 하고 있는가'라는 화두를 풀기 위해 <길이 글인가2>를 발간했습니다. 후반부 인생에게 존재의 의미와 자존감을 높여주는 생에 활기를 주는 칼럼입니다. <글이 길인가 ;2014년>에 이은 두 번째 칼럼집입니다. 기자생활 30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eBook 만들기와 주역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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