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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도 없는 이 자리에서 5박 6일을 보냈다. 만남, 사건, 사고가 아주 많았던 곳으로 잊을 수가 없다.
 그늘도 없는 이 자리에서 5박 6일을 보냈다. 만남, 사건, 사고가 아주 많았던 곳으로 잊을 수가 없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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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요~ 한국인씨. 정신이 좀 드세요? 괜찮으세요?

함성이다. 축구경기를 보지 않고도 스페인의 승리를 알 정도로 현지인들은 함성을 질렀고 하늘에다 폭죽을 쏟아 부으며 그들의 축제를 벌였다. 다행이다. 이 캠핑장엔 프랑스인이 별로 없어서. 서유럽의 국가별 호감도를 따지면 프랑스보다는 스페인이 높으니 스페인이 승리한 오늘 밤, 많은 캠퍼의 속이 그리 불편하진 않을 테다. 현은 그 가운데서도 잠이 들었으나 쭈는 뒤척이다 가장 늦게 잠들었다.

한타임 자고 일어나니 밖에서 남편의 기척이 느껴졌다. 실비아네 집에서 4차까지 한 후 같은 구역 스페인 집에 축구를 보러 간다고 갔었는데 이제서야 왔나 보다. 술이 그의 이성을 잠식할 즈음 나오는 남편의 행동을 몇 차례 본 적이 있기에 나는 그냥 '밖에서 쓰러져 자기에 좋은 날씨지 ...' 그대로 자려는데 밖이 웅성웅성 소란스럽다.

술이란 것, 특히 이성이 술을 제어하지 못할 지경까지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에게 마누라의 잔소리는 본전도 찾지 못하는 쓸모없는 짓이란 걸 한국에서 깨달았다. 단, 술과 관련해 그에게 한 말이라고는 "술을 먹어도 좋다. 다만 나만 깨우지 마라. 대리운전을 해도 꼭 돈을 낼 정신은 갖고, 집 찾아올 정신은 갖고 있으라" 라고.

물론 어느 날은 집에 들어와 풀썩 쓰러지는데 많이 이르다 싶어 시계를 보니 10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그래서 하나 더 요구했다. "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게 어울리는 시간대다. 인사불성 고꾸라져 들어오는 게 말이 되냐? 앞으론 제발 10시는 넘겨 고꾸라지도록 해라. 동네 남사스럽다."

술에 의해 이성과 행동 통제 능력을 잃고 먹은 것을 토해 내는 것이 그가 술을 '만땅' 먹은 날의 패턴이었다. 한국이라면 내버려뒀겠지만 이곳은 해외다. 아우씨~ 내가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같은 나라 사람이 온정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사관도 먼데.. 한국인이 지금 스페인 북부 피게라스 어느 한적한 캠핑장에서 술을 엄청 먹고 몸도 못 가눈다는 민원이 들어가면 대사관 직원은 또한 얼마나 남사스럽겠는가!

여하튼 내가 텐트 지퍼를 열고 나갔을 시간에 남편은 캠핑 식탁에 앉아 있었다. 승리를 축하하며 간간이 술을 권했을 스페인 사람들 5명 정도, 네덜란드 아저씨 2명, 여인네, 아이 그리고 실비아가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스페인 아저씨가 의자 없느냐고 물었고 나는 실비아네 집에 있는 우리 의자를 냉큼 가지고 왔다. '우리도 의자 있거든요' 라는 말을 속도로 보여준 것이다. 

실비아는 그를 위해 더 편안한 릴렉스체어를 가져와 주었다. 스트레스가 없진 않겠지만 여하튼 모든 스트레스를 수다와 춤으로 풀어낼 것 같은 스페인 남자들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인지 걱정이 한가득이다. 일벌레로 불리는 네덜란드 아저씨들도 당황스러워 한다. 이럴 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어떤 말을 해서라도 안심시킬 수밖에. 그냥 이 상황은 그리 놀라고 걱정스러워 할 상황이 아닌, 극히 일상적인 일임을 말해야겠다.

나: 걱정 마세요. 그냥 휴식이 필요할 뿐이에요. 이건 한국에선 노말한 일이에요(순간 일본에서도 노말하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다 얍삽한 물귀신 작전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 이 높은 도덕성).
스페인남: 이번이 처음인가요?
나: 아니요. 많아요(많다고 말했다가 순간 대한민국의 국격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얼른 수정) 아니 몇 번 있어요. 헤헤.
스페인남: 물을 많이 마셔야 하거든요. 도움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정말 괜찮아요?
나: 네, 네. 쉬면 됩니다. 쉬면서 토하면 괜찮아져요. 헤헤

나의 호들갑 때문에 그는 한 달에 한 번 토할 정도로 술을 먹을까 말까한 사실을 남겨 두고 한 달에도 여러 번 일상적으로 토악질을 해대는 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남편을 옆에 두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남편의 고통을 일상적인 일로 치부해버리는, 인간성이 결여된 냉혈인 같은 여자가 되었다. 웃지나 말았어야 했는데.. 헤헤

난 그가 토한 자리를 등불로 비춰가며 3리터 들이 물통으로 물을 세 번이나 떠다 부었다. 이제 그도 누웠고 남편이 자리에 눕기까지 곁에서 도와준 실비아도 누웠을 테고 나도 누웠다. 자고 싶은데... 이미 남편이 피운 약간의 소란이 '어제 있었던 일'로 넘어간 시간임에도 이것들은 폭죽을 새벽 1시까지 터트리며 놀았다.

언뜻 본 폭죽은 한국의 그럴 듯한 축제에서 쓰는 규모였다. 비쌀 텐데. 그런 것들을 수도 없이 터트리고 있었다. 혹시 대출 내서 저 폭죽비를 대다가 스페인 국가 경제까지 어려워졌나 싶다. 2:0으로 이겨 새벽 1시까지 쐈지 4:0, 5:0으로 이겼더라면 잠도 못 잘 뻔 했다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술은 벨기에팀이 취하도록 먹이고 마지막 잔을 준 죄로 스페인팀은 있는 내내 미안해했다. 물론 한국인의 음주문화에 대해 황당해 했음은 물론이고.
 술은 벨기에팀이 취하도록 먹이고 마지막 잔을 준 죄로 스페인팀은 있는 내내 미안해했다. 물론 한국인의 음주문화에 대해 황당해 했음은 물론이고.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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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 날 사람들이 우리만 봐!

어느덧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쌍훈,  나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잖아. 이곳에 동양인이 두 집 있으면 말도 안 해. 딸랑 한 집 있는데. 내가 돌아다니면 그 남자의 여자구나 짐작할 텐데... 나까지 이게 모니?"

오후가 되어 말이 안 통하는 실비아가 역시 말보다는 행동으로 냄비를 쭉 내밀었다.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물놀이를 하려고 옷을 챙겨 입던 참이었다. 현이 한창 수영을 배우고 있는지라 음주 후 안 좋은 컨디션임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욕심을 부려 보는 듯 했다.

실비아가 내민 첫 번째 냄비엔 말로만 듣던 프랑스식 달팽이가 마늘, 올리브유, 향신료를 몸에 감은 채 누워 있었다. 달팽이 특유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으며 부드럽게 넘어갔다. 두 번째 냄비엔 마요네즈를 넣고 삶은 달걀, 올리브, 오이피클, 붉은 파프리카 조금 그리고 참치를 넣어 버무린 요린데 참 먹던 중 적당한 간이 느껴진다(느끼한듯하면서도 올리브와 오이피클 때문에 상큼한 맛도 함께 느껴졌다).

다음엔 감자 범벅인데 후추만 살짝 뿌렸지 소금 간을 하지 않았다. 다음엔 올리브유를 비롯해 무언가를 넣어 새콤하게 만든 샐러드다. 에이구야. 실비야가 준 맛난 것들 못 먹었더라면 나의 음식 세계관이 아시아에 갇혀 있을 뻔 했구나 하는 창피함이 몰려온다.

옆집에서 닭볶음탕 레시피를 나에게 받아 적은 후 저녁엔 닭백숙을 할 것이니 그때 조금 나눠주겠다고 했었다. 좀 이상한듯하여 들여다보니 단추를 어떻게 잘못 눌렀는지 쌀알이 보온 상태에서 익어버렸다. 손에 물 좀 묻힌다는 사람은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대번에 알 것이다. 실비아의 맛있는 요리 때문에 마음이 완전 쪼그라든 것을 핑계 삼아 그냥 우리 가족이나 머리 박고 먹어야겠다.

에잇! 실비아의 맛있어서 나쁜 요리들.

실비아가 만들어 준 벨기에 요리들이다. 재료도 좋고, 맛도 좋았다.
 실비아가 만들어 준 벨기에 요리들이다. 재료도 좋고, 맛도 좋았다.
ⓒ 이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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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이준호 기자

덧붙이는 글 | 2012년 맞벌이 엄마, 아빠, 5살, 7살 두 딸은 직장과 유치원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쉼(태국), 사랑(터키), 도전(유럽캠핑)을 주제로 5개월간 여행하였습니다. 본 여행 에세이는 그 중 도전을 주제로 한 유럽캠핑에 관한 글입니다.



태그:#리씨네 여행기, #유럽캠핑, #스페인, #피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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