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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중부 최고의 신혼여행지인 우다이푸르! 라자스탄 트라이앵글의 마지막 도시. 블루시티와 골든시티, 그리고 화이트시티!
▲ 호반 도시 우다이푸르 인도 중부 최고의 신혼여행지인 우다이푸르! 라자스탄 트라이앵글의 마지막 도시. 블루시티와 골든시티, 그리고 화이트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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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살메르 발 우다이푸르 행 2층 버스에 탔다. 2층은 모두 침대 좌석이었고, 1층은 앉는 좌석과 침대가 섞여 있는 구조였다. 우리는 2층 슬리퍼(sleeper) 좌석을 미리 예약하였기에, 짐을 잘 정리하고 자리에 누웠다.

현재 시간이 오후 3시 30분, 내일 오전 5시경 우다이푸르에 도착 예정이니, 무려 13시간 반을 이곳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래도 우다이푸르에 대한 기대감과 처음 타보는 침대 버스의 재미로 좁은 공간의 불편함은 감수할 만했다. 그런데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다른 복병이 있었다.

차는 줄곧 정차를 했는데, 정차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타고 내렸다. 퇴근 시간 때가 되자 1층 복도는 서 있는 현지인으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2층 슬리퍼 칸에 누워 있는 우리는 완전히 가시방석에 좌불안석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있는 작은 커튼 한 장만이 영역을 구분해 주고 있었다.

우린 '이 시루자루같은 만원 버스에서 커튼 뒤에 숨어 일신의 안락만을 누리는 파렴치한 놈들'이 되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그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결코 커튼을 열어 현지인의 모습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쩌지? 같은 버스에 두 장면이 겹쳐 있는 옴니버스였다. 그 순간 상상의 유혈 쿠데타가 그려졌다. 갑자기 어떤 인도인이 외친다.

"여러분, 여긴 인도입니다. 저 외국인들이 뭐라고 2층에 누워 편하게 갈 자격이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속에 억지로 집어넣은 가축' 마냥 숨도 편하게 쉬지 못한 채 서로 낑겨서 이동하는데 말입니까. 다 끌어냅시다. 어떻습니까?"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호러 무비도 곧 시작되었다. 바로 버스 운전수의 난폭운전이었다. 적막한 새벽에 울려 퍼지는 요란한 클랙슨 소리와 좌로 우로 정신없이 돌려대는 핸들링에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장거리 슬리퍼 버스는 운전사의 피로를 염려해 두 명이 교대로 운전하였다. 그래서 운전석 뒤에는 별도의 좌석이 있고, 그 곳에서 다른 운전수가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

오늘 이 차의 운전사 둘 중 하나는 분명 도로의 난폭운전자일 것이다. 우린 상상했다. 기질 자체가 매우 호방한 사람이던가, 아니면 술 혹은 마약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뿐만 아니라 창문 틈새로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바람 또한 훼방꾼이었다. 아무리 창문을 꽉 닫아도 다시 열리고 그 틈새로 밖의 매서운 밤바람이 으르렁거리며 버스 안으로 침입하였다.

우리가 누구인가?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한국에서 준비한 두꺼운 테이프로 창문을 완전 봉쇄하였다. 대공사를 끝내고 병오형과 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야, 여기 인도잖아."

'방가방가 뚱땡이 녀석'과의 계속된 악연

라자스탄의 각 도시에는 지역의 지리적, 사회적 특성에 의해 제각색으로 만들어진 성들이 있었다.
▲ 화이트 시티의 궁전, 시티 팰리스 라자스탄의 각 도시에는 지역의 지리적, 사회적 특성에 의해 제각색으로 만들어진 성들이 있었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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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이푸르 도착 시간은 오전 4시 50분! 무려 13시간 넘게 달려온 것이다. 깜깜한 버스 스탠드 주위에는 흥정을 거는 릭샤 왈라들만 보였다. 제법 비싼 220루피에 새벽 릭샤를 잡아타고 미리 점찍어 놓은 할쉬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힘껏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잠이 깬 직원은 방이 없다고 하며 다시 문을 닫았다.

허탈한 마음 때문일까? 몇 배로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큰 거리로 나오자, 때마침 지나가던 릭샤 왈라가 어디를 가냐고 물었다. 또 다른 후보지인 랄가트 게스트하우스로 가자고 하니, 오케이 하며 50루피를 요구하였다. 오전 5시,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OK. 갑시다."

가방을 짐칸에 싣고 출발한 지 3분도 안 되어 릭샤 왈라는 다 왔다며 내리라고 했다. 걸으면 5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를 50루피나 부르다니, 이런 사기꾼 녀석! 어쩐지 릭샤에 타자마자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방가방가 나도 한국인 친구 있어요" 하며 능청을 떨 때부터 뭔가 의심이 갔었다.

여행가이드에 자주 나오는 글귀가 떠올랐다. '인도에서 과도한 친절을 받으면 반드시 의심을 해 보아야 합니다' 이후 장호와 나는 그를 이렇게 불렀다. '방가방가 뚱땡이 녀석'이라고.

랄가트 38호 트리플 룸을 잡고 버스에서 제대로 못 잔 잠을 청했다. 오전 9시에 눈을 뜨고 잠결에 창문을 열자, 바로 앞에 느린 인도를 닮은 피촐라 호수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여기는 인도의 최고 신혼여행지인 호반 도시 우다이푸르!

간단히 요기를 하고 우다이푸르의 상징인 시티 팰리스로 출발했다. 골목골목을 돌아 시티 팰리스로 가는데, 뒤에서 "헤이" 하며 아침의 그 '방가방가 뚱땡이' 녀석이 쫓아왔다. 저 녀석, 귀신은 안 잡아가고 뭐 하나? 그는 또다시 우리에게 다가와 "방가방가" 눈웃음을 쳤다.

우리가 시티 팰리스를 간다고 하니 자기를 따라 오라고 했다. 가는 중간에 병오형이 한국에서 현지 아이들에게 주려고 챙겨온 볼펜을 꺼내자, 그는 능구렁이 같은 언변으로 모든 펜을 강탈(?)해 갔다. 아~ 이 녀석! 그는 우리를 시티 팰리스 입구까지 안내한 후, 바로 앞 저 골목에 자기 부인이 하는 가게가 있다며 잠깐 들르자고 했다. 그만, 제발 이제 그만! 너하고의 악연은 이것으로 끝내고 싶다.

그를 보내고 시티 팰리스 매표소에서 입장권과 사진 촬영권을 구입하였다. 시티 팰리스(City Palace)는 우다이푸르의 건설자인 우다이 싱 2세(Udai Singh II)가 처음으로 건축한 뒤 이후 마하라자들에 의해 계속 증축된 궁전이다. 궁전의 본관 건물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외 건물은 왕실 가족이 거주하거나 방문객을 위한 호텔로 사용되고 있었다.

박물관에 들어가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작은 계단을 따라 왕실과 관련된 다양한 전시물을 보았다. 특히 이전에 방문했던 다른 성과 달리 거울 세공 작품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조드푸르와 자이살메르에서는 궁궐 창문을 내다보면 황색 사막과 건물만 보였는데, 여기에서는 한쪽에는 피촐라 호수가, 반대편에는 우다이푸르 시가지가 시원스레 펼쳐졌다.

레이크 팰리스가 가난한 배낭여행객의 부러움을 일으켰다. 우린 저 곳이 아니라 게스트 하우스로 가야 한다.
▲ 피촐라 호수 한복판에 위치한 레이크 팰리스 레이크 팰리스가 가난한 배낭여행객의 부러움을 일으켰다. 우린 저 곳이 아니라 게스트 하우스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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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왕은 아침에 기지개를 펴는 것만으로도 극락왕생의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풍광 하나만큼은 최고였다. 특히, 피촐라 호수 한가운데에 홀로 솟아 있는 레이크 팰리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레이크 팰리스는 1754년 자갓 싱 2세가 무인도였던 작 니와스에 지은 왕실의 여름 호반 궁전이었다.

현재에는 민간 회사에서 매각해 최고급 호텔로 활용되고 있었다. 주말과 같은 황금 요일에는 예약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다고 하였다. 가격도 어마어마하다는….

시티 팰리스에도 조드푸르의 메헤랑가르 성처럼 많은 학생들이 현장체험학습을 나와 있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아이들의 '와' 하는 함성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호기심에 가보니, 어떤 외국 여성이 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을 때마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포즈를 취하는 것이었다.

내 어찌 가만히 있으리? 나는 작은 권총인 스마트폰을 집어넣고 박격포인 SLR 카메라를 꺼내들어 학생들을 향해 난사를 시작했다. '두두두두~' 무자비한 카메라 난사에 아이들은 일어나고 쓰러지고 웃고 소리 지르며 난장을 피웠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인솔 교사도 그 광경이 재미있는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 시티 팰리스의 주인공은 왕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회의주의자와 낙관주의자(Pessimist & Optimist)

선생님들이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현장체험학습을 왔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모두 주인공이 되어 일어났다.
▲ 라자스탄 아이들 선생님들이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현장체험학습을 왔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모두 주인공이 되어 일어났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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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인도 아이들의 미소가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인도 아이들의 모습과 함께 요즘 한국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청소년들의 얼굴에서 생기 있는 미소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급식을 기다리면서도, 소풍을 가서도 스마트폰 화면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스마트폰 속에서 홍수와 같은 정보를 만나고, 가상의 세계에서 노닐고,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한판 신나게 논다. 스마트폰 속에서 그는 항상 주연이 된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덮었을 때, 그는 다시 현실 속의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주연에서 카메오로 배역이 전환된다. 그리고 생동감 있는 미소는 냉소와 무기력으로 바뀐다.

가상 세계의 주연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주연이 될 아이들이 아니던가? 잘못된 시나리오에 따라 그의 무대는 전이(轉移)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문제인가? 스마트폰이 문제인가? 그럼 아이들을 데려다 교육만 잘 시키면 되는가? '이것은 옳은 것이고 이것은 그른 것이다. 알겠지?' 아니면 학생들의 스마트폰 사용만 규제하면 될까? 우리 아이들에게서 인도 아이들의 미소를 보고 싶다. 그런 미소를 되찾아주기 위해서 우리는 또 이렇게 얘기할까?

스마트폰 덮고 공부나 해! 열심히 공부하면 행복해질까? 혹여나 처음부터 시나리오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교탁 위에 서서 아이들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프다. 교사가 아닌 아이들보다 먼저 살아 온, 지금과 같은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한 선배로서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나 또한 단호하게 말한다.

"조용히 해! 수업 방해하는 놈은 알아서 해. 다른 아이들 공부하는 데 방해만 되는 나쁜 놈들."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벌써부터 뭘 안다고. 지가 공부하기 싫으니까 운동하겠다, 연기하겠다 그러는 거지!"

"그런 놈은 뭘 해도 똑같아. 이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놈이 사회에 나가서 뭘 잘 하겠어? 직장 생활하다 쫓겨나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잖니? 여긴 학교잖아. 공부해야지! 생각해 봐. 대학교 가서 너의 꿈을 펼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 아니겠어? 보충 수업 빠지는 놈 치고 좋은 대학 가는 놈 못 보았어!"

그래 이것이 나다. 교사 윤인철이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이 사회의 요구에 따라 길들여진 교사이고, 이 사회 체제에 적응하는 인재를 키워내는 것이 임무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본분이다.

하지만 윤인철은 꿈꾼다. 지금 사회 체제와 교육 시스템을 전복하고 부정하는 꿈이 아니라, 그냥 아이들에게 편하게 '삶'을 물어보는 꿈!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꿈 말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작은 변혁의 씨앗을 뿌리고 행복한 아이들이 주체가 되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꿈!

"넌 뭐가 좋으니? 뭘 하고 싶니? 뭘 할 때 제일 행복해? 넌 잘 하는 게 뭐야? 어떻게 살고 싶은데?"

그럼 아이들도 온몸으로 웃지 않을까? 교사는 처절하게 현실적이어야 하지만, 그 가슴은 몽상가이어야 한다.

"지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I am a pessimist, because of intellgence. But I am a optimist, because of will)." - 안토니오 그람시

시티 팰리스를 보고 외국인에게 개방되는 소수의 힌두 사원 중 하나인 '작쉬 만디르'에 갔다. 무희, 코끼리 등 건물 외벽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상, 예배당 안에서 울려 퍼지는 힌두교도들의 노래와 박수 소리에 속과 성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이 삼삼오오 들어와 예배당에 앉아 부르는 단조로운 가락의 노래는 나의 종교적 기질과 궁합이 딱 맞는 듯 순식간에 무아지경에 취해버리고 말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힌두 종교 의식인 푸자가 열린다고 했다.

'게으름만 피지 않으면 다시 와야지.'

콜라는 달라던 아이한테 빵을 주니... 잊을 수 없던 표정

카페에 들러 점심 식사로 빵과 음료수, 과자를 먹고 피촐라 호수가로 갔다. 어여쁘게 생긴 한 여자 아이가 다가오더니, 손을 벌렸다. 돈을 달란다. 돈이 없다면 먹을 것이라도 달란다. 우리는 애써 외면했다. 우리의 도움이 그 아이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며, 역설적으로 그 아이의 삶을 망칠 수 있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안할 정도로 거절을 반복했지만, 아이는 상관없다는 듯 계속 우리를 쫓아왔다. 그 곁에는 그녀의 엄마와 품에 안긴 동생이 있었다. 어머니도 이 구걸에 동참하여 조연으로 출연하였다.

작쉬 만디르 입구에는 거대한 코끼리 석상이 있었다. 그 아래 구도자 닮은 걸인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 힌두 사원 작쉬 만디르 작쉬 만디르 입구에는 거대한 코끼리 석상이 있었다. 그 아래 구도자 닮은 걸인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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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쉬 만디르까지 쫓아온 아이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나와 장호는 그동안 걸인을 무시해왔던 원칙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성공의 분위기를 예감했는지 손으로 상점에 진열된 콜라를 가리켰다. 우리는 가족의 배고픔을 덜어줄 요량으로 탄산음료가 아닌 10루피짜리 빵을 산 후 신문지에 싸서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아이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뭔 빵이냐, 내가 언제 빵을 달라고 했냐?'는 원망과 제대로 짜증난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는 우리에게 주문을 한 것이지 구걸을 한 것이 아니었다. 주문은 콜라였는데, 이 답답한 외국 얼간이들이 빵을 주니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소녀는 우리에게 구걸이 아니라 주문을 하고 있었다.
▲ 피촐라 호수의 걸인 소녀 소녀는 우리에게 구걸이 아니라 주문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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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 250루피에 릭샤를 잡아 우다이푸르 최고의 전망대인 몬순 팰리스로 갔다. 몬순 팰리스 입구까지만 릭샤가 갈 수 있어 입구 매표소에서 입장권과 정상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택시값을 지불했다. 택시를 타고 10여 분 오르막길을 오르니 정상에 닿았다. 정상에서 바라본 우다이푸르는 피촐라 호수 주위를 하얀색 건물이 장막처럼 두르고 있는 형상이었다.

화이트 시티! 뿌연 대기 때문에 확 트인 조망을 볼 수 없었다. 대신 인도에 들어와 처음으로 원숭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인도 신혼여행지인만큼 오늘만은 럭셔리한 식당에서 식사하기로 의기투합한 우리는 고급 레스토랑을 찾아 갔다. 바로 호변에서 피촐라 호수의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목 좋은 식당이었다. 인도 맥주인 킹피셔로 목을 축이며, 저녁 식사 주문이 시작되는 오후 6시 30분 이후 럭셔리 탄두리 치킨을 먹는 행복한 상상에 취했다.

그런데 종업원이 우리의 기대를 산산조각내고 말았다. 이날 오후 7시부터 모든 테이블의 예약이 이미 완료되었다며 7시까지 맥주를 모두 마시고 자리를 비우라는 것이었다. 아~ 토요일 밤이구나.

유목민의 피가 아직 흐르고 있다

피촐라 호수 최고의 뷰 포인트에서 럭셔리 탄두리 치킨을 먹었다.
▲ 피촐라 호수 피촐라 호수 최고의 뷰 포인트에서 럭셔리 탄두리 치킨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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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우리는 40대 초중반의 부부를 만났다. 이제 결혼 4년 차에 접어드는 한 대기업의 인도 주재원으로, 델리에서 4년째 거주 중이었다. 그는 오래 만난 친구처럼 우리와 자연스럽게 합석하였다. 인도 현지 문화 및 영어에 능숙한 그의 도움으로 예약이 안 된 화장실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탄두리 치킨과 난 등 고급스런 현지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음식보다 더 큰 값어치는 사람만의 만남, 그리고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었다. 부부는 인도를 사랑했다. 그를 통해 인도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후 베트남에서 피자와 파스타를 취급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여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조만간 한국에 있는 아파트도 팔고 직장도 그만둔 후 이탈리안 피자 굽는 기술을 배우러 이탈리아로 갈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었다. 아니면 인도인들이 기겁을 하며 먹는 '빼빼로' 사업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자녀가 아직 없는 그들은 델리에 일이 없는 주말을 이용해 1박 2일로 인도·태국·몰디브 등을 여행하는 유목민이었다.

배낭여행에서만 만날 수 있는 유목민들! 단 한 번의 삶을 누구보다 사랑하기 위해 매순간 몸부림치는 그들 종족은 선택과 결단의 삶에 익숙하다. 다름의 가치를 훈장으로 생각한다. 쉼표와 마침표는 그들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직 느낌표와 물음표만을 쫓는다. 만난 지 몇 분 만에 의기투합하여 동족의식을 나누면서도 절대 같음을 거부한다.

정착에 길들여진 나도 그들과 만나면 유목민의 피가 몇 방울은 마르지 않고 아직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럴 때면 나도 유목민의 삶을 꿈꾼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라는 족속은 정착과 유목의 경계선에서 항상 눈치만 보고 있는 기회주의자라는 것을. 그저 경계선에 불안하게 걸터앉아 마음이 가라는 대로 갈 뿐이다. 경계선의 삶이 나에게는 가장 딱 맞는 옷이다. 삶의 양 극단을 선택할 용기는 천성으로 물려받지 않은 것을 어찌하겠는가.

카페에서 바라본 피촐라 호수의 석양이 멋드러진다. 인도가 타오른다.
▲ 피촐라 호수의 석양 카페에서 바라본 피촐라 호수의 석양이 멋드러진다. 인도가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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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들과의 대화는 꽤 유쾌했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여행객이 아니라 인도에 정착해 살아가는 시민으로 경험한 진짜 인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줄곧 인도를 보지 말고 인도인의 삶을 보는 여행을 하라고 충고했다. 편견의 인도를 보지 말고 민낯의 인도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봐야 하는 인도인의 일상과 삶의 방식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뭄바이에서 델리까지 철도를 설치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아십니까? 살상을 거부하는 시크교도들의 요구에 따라 포클레인이 아니라 호미로 땅을 다지고 건설했다는 웃지 못 할 이유이랍니다. 불살생!"

"거지도 또 하나의 직업이고 카스트입니다. 그들을 불쌍하다고 여길 필요는 절대 없습니다. 할머니도 거지였고 엄마도 거지이고 자신도 거지가 될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비참한 삶에 대해 불만이 없어요. 그렇게 살게끔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까요."

"인도인은 거짓말을 참 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죄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운명으로 생각할 뿐."

"인도인을 더럽고 불결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얼마나 청결한 지 다른 사람이 앉은 좌변기에 신발을 신고 위에서 볼일을 봅니다. 다른 사람의 엉덩이가 닿은 그곳이 너무 더럽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도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은 '행복하세요?(Are you happy)'입니다. 이 말은 어떤 행동을 비아냥거리는 말로 자존심이 센 인도인은 큰 치욕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들과의 대화는 식당을 나와 숙소에까지 이어졌다. 랄가트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피촐라 호수와 그 위에 비친 화이트 시티를 내려다보며 소주 두 병을 비우고서야 긴 만찬은 끝났다. 몇 년 후 그는 인도에서 빼로 그룹의 회장이 되어 인도 빼빼로를 팔고 있을 것이리라. 어디에서건 그의 꿈과 행복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이들의 삶이 정말 '라이프 이즈 굿(Life is Good)' 하구나.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중고등학교 현직 교사 세 명이 2014년 1월, 한 달간 인도를 여행한 기록입니다. 델리에서 자이살메르, 우다이뿌르, 조드뿌르, 아그라, 바라나시, 맥그로드 간지 등 인도 중북부를 방문했습니다. 단순히 '관광'이 아니라 '사색과 반추, 철학'이 있는 '여행'에 관한 것입니다.



태그:#우다이푸르, #몬순팰리스, #파촐라 호수, #시티팰리스, #작쉬만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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