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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만석공원에 가면 영화정이란 건물이 있다. 1년내내 문은 굳게 닫혀있고, 여름이면 잡초가 무성해 만석공원에서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의 눈에는 흉물스런 건물이 되었다. 이런 건물이 왜 그 자리에 서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문화재를 복원해 놓고도 방치해두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없으니 활용방안 및 개방을 고려해 봐야할 것이다.

영화정 대문앞에 가면 영화정 소개 안내판이 있다. "영화정은 정조19년 병진년(1796)에 중건된 건물로서, 이곳에서 신구관 부사 유수들이 거북모양의 관인을 인수인계하고 업무를 시작하였다하여 일명 교구정으로도 불리웠다. 현재의 영화정은 남서쪽에 있었던 것을 복원 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영화정은 8칸의 평면구조를 하고 있으며 1고주5량, 겹처마의 팔작집으로 익공이 없는 "ㄱ"자 형태를 갖추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96년 10월에 신축 복원 되었다."

간혹 이 안내문을 읽어본 시민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영화정을 복원한 내용은 알겠는데, 영화정의 구조를 설명한 대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너무 어려운 표현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문화재를 제대로 보려면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함은 당연하지만, 그렇더라도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야 되지 않을까. 화성성역의궤에 "정조 19년(1795)에 만석거를 설치한 후, 같은 해 9월에는 만석거의 남쪽 언덕에 영화정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안내판의 '정조19년 병진년(1796)', 이 기록도 잘못된게 아닌지. 정조19년이면 을묘년(1795)이다.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벌이고, 화성 건설의 명분을 높이고 화성을 통한 왕권 강화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8일간의 행차가 있던 바로 그 해이다.

만석거의 맑고 깨끗한 물과 대유평의 기름진 들판이 보이는 영화정에서의 풍경은 일대에서 손꼽을 만한 것이었으며, 특히 벼가 익어가는 가을의 풍경은 석거황운(石渠黃雲, 만석거 주변의 황금물결)이라 하여, 정조 당시에 화성 16경 중 추팔경(秋八景)의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명승지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북지상련(北池賞蓮, 만석거에 핀 아름다운 연꽃)이 수원8경의 하나로, 만석거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풍광으로 사랑받고 있는 유적지이다.

복원만 해놓으면 되는가

이런 유서깊고 의미도 남다른 만석거에 세워졌던 영화정을 복원했는데 문이 굳게 닫혀있다면 문화재 복원의 의미가 없지 않은지. 우선 닫힌 문을 열고 일반에 공개 하기를 바란다. 내부를 정돈하고 컨텐츠를 보강하면 훌륭한 관광상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관리상의 어려움을 말할 수 있겠지만, 개방했을 때 사람의 정취가 문화재에 닿으면 그 문화재는 돌연 활기에 넘치고, 살아 숨쉬는 문화와 역사의 공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영화정이라는 이름은 만석거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과 꽃 소식을 맞이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정조 20년(1796) 봄에 정조가 들렀을 때 영화정이라 편액하고 수원부 유수 조심태가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영화정을 복원했으니 영화정 현판도 복원하는게 어떨지.

만석거는 화성성역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정조 18년(1794)에 전국적으로 극심한 가뭄이 발생하여 축조가 결정되었으며, 1794년 11월에 화성성역의 건설을 중단하고 장안문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안정된 농업경영을 위한 수리시설로 축조된 것이다. 만석거는 정조 19년(1795) 3월 1일 축조공사가 시작되어 5월 18일에 완성되었다.

만석거 축조를 통해 화성 장안문 밖의 척박한 황무지가 옥토로 변해, 당시 전국적인 가뭄에도 불구하고 화성지역은 가뭄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고 화성성역의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당시 만석거 축조에 5천 7백냥의 비용이 들었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통화로 계산하면 약 3억 9천 9백 만원이다. 당시의 통화가치와 단순비교는 어렵겠지만, 조선 후기에 1냥으로 구매할 수 있는 쌀을 기준으로 했을 때, 1냥은 오늘날 약 7만원에 해당한다.

만석거 하류에 있던 대유평이 오늘날에는 아파트단지로 변해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장안문 밖에서부터 북쪽으로는 만석거, 서쪽으로는 화서역 부근까지의 광활한 평야가 있었다. 정조 당시에도 대유평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던 듯, 화성 16경 중 춘 8경으로 대유농가(大有農歌, 대유평(大有坪)의 농사하는 노래)가 있었다. 만석거, 영화정, 대유평을 엮어 하나의 컨텐츠를 만들어봄이 어떨지.

1797년 8월 행차때 정조대왕이 지은 시 한수가 화성성역의궤에 전한다.

영화정에서 총리대신이 화성부를 바라본 시를 차운하다.

다락의 망루가 문득 솟아 오르니
산과 물이 갑자기 새로워지는구나
이 모든 것이 그대 총리의 힘이니
나를 위해 귀신처럼 지휘하였네
깃발과 북소리에 뛰어오르는 군사들이오
거리거리마다 생업을 즐거워하는 백성들이네
밭의 등급은 으뜸 중의 으뜸인데
도랑 뚫어 물대는 것 내년 봄을 위함일세

[한시번역 : 2001년 펴낸 국역 화성성역의궤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 e수원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영화정, #만석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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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가슴에 안고 살면서 고전과 서예에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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