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랑하는 가족이 말기암 판정을 받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얀 거짓말'이라도 하는 게 옳을까. 적어도 이 책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에 따르면 이는 오산이다. 환자들은 남은 삶을 차분하게 마무리할 권리가 있다. 그러려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한다. 시한부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게 정답이다.

그래도 불안하다. 죽음의 '진실'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자신이 '말기'라는 말을 들으면 환자들은 완전히 희망을 잃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다는데 괜찮을까. 실제로 환자들은 말기 통보를 받고 슬픔, 우울, 비참함, 부인, 화, 공포, 감정통제의 어려움, 격정, 죄책감, 후회, 외로움 등 다양한 감정을 드러낸다고 한다. 말기 환자 가족들이 '진실' 말하기를 주저하는 이유다.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
ⓒ 엘도라도

관련사진보기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는 '품위 있는 죽음'에 관한 책이다. 저자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이비에스(EBS) <명의>에 '웰다잉 전문가'로 출연했다. 25년간 '죽음의 질'을 연구했다. 우리들의 마지막이 어떻게 취급되어야 하는가에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를 집대성한 게 바로 이 책이다.

위의 상황에서 저자 윤영호 교수의 생각은 사뭇 다르다. 다양한 감정 변화는 말기 환자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시간이 경과하면 그 모든 과정에 적응하게 된다. '진실' 알리기는 환자의 삶의 질에 영향을 준다. 말기 사실을 추측이나 우연을 통해, 혹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알게 되면 직접 알게 되는 환자보다 삶의 질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가족들의 경험도 이를 뒷받침한다. 진실을 그대로 말할 때 환자와 남은 가족에게 더 좋은 결과가 찾아왔다. 품위 있는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최상을 희망하되 최악을 대비하라"라는 격언을 거듭 인용한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죽음 앞에서 피할 수 없는 갈등에 부딪힌다. 시한부인데 치료가 무슨 소용일까. 호스피스 병동은 죽으러 가는 곳이 아닌가. 의식이 없다고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면 어떻게 될까. 통증이 극심한데 마약이라도 맞으면 안 될까. 이 책에서 다루는 민감한 문제들이다.

죽음의 질 지수 10점 만점에 3.7점인 나라

'웰다잉'이 왜 필요할까. '살면서 괴로운 나라, 죽을 때 비참한 나라'라는 부제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죽음의 질 지수가 세계 꼴찌 수준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산하 연구소인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가 2010년 조사한 국가별 '죽음의 질 지수(Quality of Death Index)에 따르면 한국은 10점 만점에 3.7점을 얻었다. 40개국 중 32위였다.

저자는 죽을 때 가장 비참한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단언한다. 그는 25년간 나름대로 말기 환자와 그 가족들의 삶의 질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그런데도 변화는 더디다. 우리에게는 비참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유가 뭘까.

문제는 과거 자연적으로 맞이하던 임종이 점점 의료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환자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명백한 징후 앞에서는 죽음의 '자연성(naturalness)'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순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죽음마저 부정하고 죽음을 '의료화(medicalization)하려고 시도하면서 많은 비극이 시작된다. (15쪽)

죽음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는 "모두가 객사하는 한국"(31쪽)을 만들었다. 웰다잉을 고려해야 하는 두 번째 배경이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맞는 죽음은 호상(好喪)이다. 집밖에서 죽음을 맞는 것은 객사(客死)다. 과거에는 호상이 많았다. 최근에는 객사가 압도적이다. 통계청 사망 통계 결과에 따르면 임종 장소가 1989년에 병원 12.8퍼센트, 집 77.4퍼센트였다. 2012년에는 병원 70.1퍼센트, 집 18.8퍼센트로 역전되었다.

통증에 대한 인식과 대처 방식 등의 문제도 웰다잉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말기 환자들은 통증을 가장 무서워한다고 한다. 통증은 암환자들이 겪는 가장 흔하고 고통스러운 증상 중 하나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400만 명이 넘는 진행 암환자의 70~80퍼센트가 통증을 겪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말기 환자들이 적절한 진통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39퍼센트가 진통제를 처방받지 못한다. 통증 호소 환자의 50퍼센트 역시 통증 수준에 맞지 않는 진통제를 처방 받는다. 이는 또 왜 그럴까.

저자는 통증에 대한 의료인들의 지식 부족과 부정적인 태도를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의료진들은 환자들의 통증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하면 내성이 생길 것을 염려한다. 환자의 약물 의존성을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통증은 조절될 수 있다. 환자 자신의 평가와 자세한 병력 청취, 신체검사, 기타 정신건강 및 신경학적 평가를 통해 통증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가 제시한 통증 조절의 일반적인 원칙인 '3단계 진통제 사다리'도 유용한 접근방법으로 소개되고 있다. 물론 이 모두는 죽을 때라도 환자를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주기 위함이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죽음을 예고 없이 맞는 사람 또한 갈수록 늘고 있다. 2012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남자 184.5명, 여자 108.5명이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 특별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

암이 차지하는 비율은 압도적이다.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등 기타 만성질환을 모두 합친 비율보다 크다. 저자는 발암물질이 넘쳐나는 환경과 고령화로 인해 앞으로 3명 중 1명이 암으로 사망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죽음 준비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해보자.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저자는 맨 처음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라고 조언한다. 이를 바탕으로 ▲ 가족에게 필요한 정보 정리하기 ▲ 법적 효력을 가진 유언장 작성하기 ▲ 사전의료의향서 작성하기 ▲ 임종케어 과정을 미리 결정하기 등을 제시한다.

가족 등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실천할 일도 정리해 놓았다. ▲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감정 표현하기 ▲ 화해하고 감사 나누기 ▲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기 ▲ 이별의 말을 전하기 등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생명 속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저자의 통찰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죽음 준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사회적 차원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저자는 '죽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돈 때문에 병원에 못 가거나 가정 경제가 무너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건강보험 혜택을 주는 항목을 늘리고 체계적인 대안을 수립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둘째, 말기 환자에 대한 진료가 체계적이어야 하며, 임종 전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저자는 살릴 수도 없는 말기 환자들에게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책에서 인용하는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임종 전 1년 동안 의료비의 약 50퍼센트가 임종 전 2개월 동안 지출된다고 한다. 사망 전 1개월 동안에는 약 30퍼센트가 지출되고 있다. 죽음에 직면한 상황에서 집중적으로 진료를 받는 것이다.

파생되는 문제는 심각하다. 말기 환자의 의료비 중 총 진료비의 3분의 2, 총 입원 진료비의 80퍼센트 가까이가 상급병원 및 종합병원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대학병원 전체 병상의 약 10퍼센트는 적극적인 치료가 아닌 완화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후진국 수준의 '죽음'... 시스템 개선이 먼저다

저자는 이들이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으면서 병상회전율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들에게 들어가는 의료비 지출이나 의료 행위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의료 낭비이자 의료집착으로 비판하는 배경이다.

저자는 대안으로 호스피스·완화의료를 제안한다. 과거 임종환자에 국한되었던 호스피스는 오늘날 환자의 통증 등 증상관리를 포함해 신체적·정신적·사회적 돌봄을 위한 완화의료까지를 포함하는 전인적 개념으로 확대되고 있다. 호스피스 진료가 말기 환자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의료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외국 연구 결과도 보고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의 '죽음의 질'은 후진국 수준
 한국인의 '죽음의 질'은 후진국 수준
ⓒ KBS <다큐3일>호스피스편 화면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저자가 보기에 아직 우리나라는 갈길이 멀다. 법은 연명의료 중단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의 제도화는 요원하기만 하다. 앞서 본 것처럼 죽음의 질은 후진국 수준이다. 말기 환자와 가족이 감당하는 부담은 지나치게 크다. 저자가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고 외치는 까닭이리라.

저자는 질병 치료와 생명 살리기의 중요성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때는 죽음을 통해 삶을 완성하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삶과 죽음이 갈수록 파편화, 고립화되는 우리 현실에서 저자의 다음과 같은 외침이 묵직하게 들려온다.

국민들과 정부는 말기 환자와 가족들에게 들어가는 치료비를 비용으로 보지 말고 이 땅에 살아오면서 가족과 나라를 위해 기여한 국민들의 당연한 권리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 투자해야 한다. (246쪽)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립니다.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윤영호 지음 / 엘도라도 / 2014. 7. 17. / 287쪽 / 14,000원)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 - 살면서 괴로운 나라, 죽을 때 비참한 나라

윤영호 지음, 엘도라도(2014)


태그:#<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 #윤영호, #엘도라도, #호스피스, #완화의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