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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회장 출신으로 농민군수에 도전하는 정정섭 구례군수 후보
 농민회장 출신으로 농민군수에 도전하는 정정섭 구례군수 후보
ⓒ 정정섭 후보 선거사무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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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때, 전남대학교 학생운동 지도부였던 한 청년은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고 고향 구례 땅으로 숨어든다. 본가는 섬진강 옆이었으나, 피신한 곳은 산수유로 유명한 산동면 산자락. 이때 그가 가진 것은 주머니 속 3600원이 전부였다.

품팔이와 일용직 등 농사일에 몰두한 그는 농민으로 정착해 자연스레 농민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약 20년 뒤, 2010년 지방선거는 그의 삶에서 전환점이었다. 구례군농민회장을 4년간 맡았던 그는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2010년 전남도의원에 도전해 승리한다. 무소속으로 나서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했으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성실하고 탄탄한 의정 활동으로 주목받은 그는 6·4지방선거에서 구례군수 도전을 선언했다. 광역의원으로 첫 정치판에 뛰어든 지 4년 만에 군수 후보로 나선 정정섭(무소속) 예비후보를 지난 17일 만났다. 도의원 재선이 아닌 군수직에 도전하는 이유를 들어봤다.

학생운동 수배자가 군수에 도전하기까지

"1년 반을 고민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내와 합의도 잘 안 됐어요. 주변에서 도의원 한 번 더 하고 다음에 군수에 나서는 게 좋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들었지요.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정정섭 후보 선거사무소에 걸려 있는 다산 정약용의 한시 첫 구절
 정정섭 후보 선거사무소에 걸려 있는 다산 정약용의 한시 첫 구절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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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후보는 선거사무소 벽에 걸린 액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인지좌여락(人知坐輿樂) 불식견여고(不識肩輿苦)(불식견여고) - 사람들이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가마 메는 괴로움을 모른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귀양에서 풀려난 이후 부당한 사회 현실 속 관리들의 횡포를 비난하며 지은 한시 <견마탄(가마꾼의 탄식)>에 들어 있는 첫 구절이다. 가마 타서 즐거운 사람이 아닌, 가마 메는 괴로움을 아는 사람 편에 서고 싶다는 게 그가 군수 후보로 나선 이유다. 결국 아내의 동의도 얻어냈다.

"사실 모든 도의원들의 꿈은 단체장입니다. 도의원의 기능은 집행부 감시와 견제, 예산 삭감이나 자료 요청 및 조례 제정 등입니다. 지역을 바꾸려면 단체장으로서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학생운동을 했던 그가 농민운동에서 정치로 방향을 튼 것도 군민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는 정치가 더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학생운동 시절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에 맞서 저항했어요. 운동은 저항을 통해 요구하고,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는 방식이죠. 정치는 책임을 진다는 점에서 운동과는 다르다고 봐요. 찬성과 반대를 조율하는 것인데, 실질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정치가 할 수 있는 부분이지요."

정치권 눈치 보다 피폐해진 지역

전남 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있어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노고단 앞 성삼재까지 도로가 뚫려 있어 지리산 종주의 출발점으로 등산객이 몰리기도 한다. 요즘은 귀농하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구례의 재정자립도는 10% 미만으로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최하위 권에 속한다. 2013년 기준, 지역 예산 규모 역시 전남의 시·군 중 가장 아래에 있을 정도로 '가난한 지자체'다.

정정섭 후보는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이후 도리어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자연이 주는 선물을 안고 있는 지역이고, 지리산과 섬진강은 역사와 문화 가치를 다 품고 있어 환상의 도시가 될 수 있지만, 지방자치 이후 도리어 민심은 피폐해졌고, 경제는 더 쪼그라들었다"고 말했다.

"주민 대표를 뽑아야 하는데, (특정 정당이) 작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분위기여서 낙하산 공천이 횡행했습니다. 지방 토호 세력이 군수로 진출해 군정을 장악했고, 가마 탄 자들만이 지역의 권력을 누렸지요. 주민들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정치권에 줄을 잘 서야 공천을 받으니, 자연스레 경쟁자들끼리 대립하면서 주민들 사이의 갈등만 더 커졌습니다."

기존 군수들이 주민 대표라는 사명을 간과하고 사익을 우선했다는 것이다. 정 후보는 "특정 정당의 일당 지배가 결과적으로 지역을 후퇴 시켰다"면서 "잘한 것이 있다면, 길 내고 포장한 것 정도였다"고 평가했다.

현직 구례 군수는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됐다가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탓에 선거를 몇 달 앞둔 지난해 12월 주민소환투표가 발의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투표율 미달로 무산됐으나 이 과정에서 주민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현직 군수는 다시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을 받았다.

정 후보는 정당보다는 무소속을 고집한다. 도의원으로서 의정활동을 눈에 띄게 한 덕분에 "새정치연합은 물론이고 새누리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에게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본은 정당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거절했다. 그는 "정당 활동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는 점도 (군수 출마) 망설임으로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주민만을 보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라고 덧붙였다.

"지난 도의원 선거를 통해 일하는 사람들의 힘이 무엇인지 크게 느꼈습니다. 돈 없고, 농민운동만 했고, 이름도 없는 데다, 면에 사는 촌사람이, 재선에 도전하는 민주당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한 것은 농민들의 열망이 담겼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케이블카 추진, 현 군수의 8년 공약이지만 진척 없어

도의원 시절인 2010년 섬진강 시멘트길 조성이 환경파괴 논란이 일자 사업설명회를 주선해 주민들 입장을 전하고 있는 정정섭 구례군수 후보
 도의원 시절인 2010년 섬진강 시멘트길 조성이 환경파괴 논란이 일자 사업설명회를 주선해 주민들 입장을 전하고 있는 정정섭 구례군수 후보
ⓒ 조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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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후보는 자신의 정책 기조를 세 가지로 압축해 설명했다. 공직자들의 청렴과 자연환경 활용, 소통이 핵심이다.

"공직자들이 청렴하지 못한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사심을 버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지요. 하늘이 준 천혜의 조건 역시 잘 활용하려고 합니다. 관광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맛을 즐기는 것인데, 이를 농업과 연계시켜 지역민들의 소득을 증대 시키려 합니다. 소통도 중요한데, 행정과 주민, 젊은이들과 노인세대, 원주민과 귀농자의 의견이 다릅니다. 개인적으로 어르신들에게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소통 능력을 인정받고 있으니,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생각입니다."

사실 정 후보만이 아니라, 군수에 출마한 대부분 후보자들이 지리산과 섬진강으로 대표되는 자연환경 활용을 강조한다. 그간 많이 나온 것이 케이블카, 골프장 건설 등이다. 같은 방향인지 궁금해 케이블카 건설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케이블카 문제는 일단 환경영향평가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지리산 성삼재까지 올라가는 도로가 있는 상태에서 어떤 게 주민에게 더 도움이 되느냐를 따져봐야지요. 케이블카 문제는 사실 중앙정부의 잘못이 큽니다. 하려면 다 하든가, 아니면 다 안 하든가 해야 하는데, 지리산권 지자체들의 갈등만 유발하고 있거든요. 현 군수가 8년간 공약을 내놨지만 전혀 실행이 안 되는 사안입니다. 케이블카를 활용해 제대로 돈 버는 곳은 전국에 하나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예전에 제가 사는 산동면에 골프장 건설 논란이 있을 때도 가장 앞장서서 반대했습니다. 당시 지역 주민들에게 엄청 욕을 먹었습니다만 득보다 해가 더 많은 사안이었습니다. 그래도 지역주민들은 지난 도의원 선거 때 몰표로 저를 응원해 주셨습니다."

정 후보는 "사람과 자연이 공존해야 하는데, 주체는 사람이어야 한다"라며 "관광자원으로 주민 삶의 질을 향상 시키고,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빽' 없는 후보, 이번에도 승리할까

그는 군수로 당선하면, 주민이 군수의 업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매달 '일일 군수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농민회장 할 때 기아자동차 노조와 자매결연을 맺고 구례에서 생산된 쌀을 납품하고, 북녘으로 보낸 경험을 토대로 '기아자동차 수련장' 지역 유치도 내걸었다. 또 그는 노인 복지를 위한 복지재단 설립, 농산물 최저가격 보장 등 '지역 농산물 세일즈맨'을 자처했다.

하지만 선거 전망이 밝은 건 아니다. 행정관료 출신으로 새정치연합 후보로 나서는 현직 군수와 전직 군수가 강력한 경쟁자다.

현직 군수는 3선 연임 도전이고, 재선 경력의 전직 군수는 골프장 건설을 추진했던 인물로 지난 선거에서 현 군수와 대결해 아깝게 패했을 만큼 기반이 탄탄하다.

선관위에 신고한 개인 재산도 후보들 중 가장 적다. 최하 3배에서 최대 10배 정도 차이가 난다. 읍이 아닌 면에 살고, 조직이라고 해봐야 농민회와 여성농민회 등이 전부다. 선거자금은 펀드를 통해 마련 중이다.

선거사무소 관계자는 "주민의 요구사항에는 되든 안 되는 무조건 '하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후보님이 거짓말을 못 하니 돕는 사람 처지에서는 답답하다"고 말했다.

정 후보가 기대하는 건 변화의 바람이다. "바꿔보자"는 주민의 의지가 무명의 농민을 도의원에 당선시켰 듯이, 이번에도 주민만 보고 가겠다는 것이다. 정 후보는 "주민들의 주인 의식을 높이고, 자치시대 시민의식을 향상시키는 데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한 정당의 지배가 지속되는 지역에서 고정된 틀을 깨고 농민회장 출신 후보가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러올 수 있을지 구례의 선택이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 성하훈 기자는 2014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지방선거특별취재팀에서 활동합니다.



태그:#정정섭, #지방선거, #구례군, #농민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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