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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늦복 터졌다> 책표지
 <나는 참 늦복 터졌다> 책표지
ⓒ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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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노년의 조건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죽는 날까지 일을 해야 행복할 것이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일했으니 일은 그만, 여행이나 하면서 보내는 것이 행복할 것이라 한다. 

전형적인 농촌에서 살며 오늘도 밭에 나가 일을 하실 팔순의 친정 부모님. 서울을 막 벗어난 외곽에서 살며 동네 어른들과 소일거리로 하루를 보내시는 낼 모레 팔순에 접어들 시부모님.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양가 부모님들이 속으로 바라는 바람직한 노년의 삶은 어떤 것일까?

'박덕성 구술, 이은영 글, 김용택 엮음'이란 독특한 저자의 <나는 참 늦복 터졌다>(푸른숲 펴냄)는 바람직한 노년과 따뜻한 가족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공감이 클 책이다.

부제는 '아들과 어머니, 그리고 며느리가 함께 쓴 사람 사는 이야기'.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이 '어머니와 나눈 것들을 쓴 자신의 아내 이은영의 글'을 엮은 것이다.

90세 어머니, 글을 쓰기 시작하다

1928년생 어머니 박덕성은 '내일 모레면 구십'이다. 몇 년 전부터 어머니의 병원 출입이 잦더니 결국은 입원했다. 하루 종일 병원침대에서의 무료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부지런하기로 말하자면 어머니 따라갈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 일 저 일, 이 집 저 집,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신다. 학교만 다니고 일도 안 해보고 게다가 게으르기까지 했던 나는 어머니가 부지런하신 것이 그 어떤 일보다 적응이 안 되었다"

이처럼 고백할 정도로 결혼 생활 내내 어머니의 부지런함을 불편해하기도 하며 살았던 며느리 이은영은 친구와 봄꽃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할 겸 떠난 나들이 길에서 실과 바늘을 파는 가게를 발견한다. 그 순간 어머니가 병원에서 할일은 바느질밖에 없다는 생각에 전주 시장의 한복가게에서 조각천들을 사는 등, 바느질감을 구해 가져다 드린다.

김용택 시인 어머니의 바느질.
 김용택 시인 어머니의 바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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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느질감을 본 어머니는 "잉? 여기서? 여기서 이걸 어떻게 한다냐?"며 질색한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어느새 바느질감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리하여 며칠 후 병원을 찾은 며느리에게 다섯 개의 조각보를 내밀 정도로, "오늘은 천이 부족해 하나밖에 못만들었다 아쉬워 할 정도로 바느질에 푹 빠져든다.

조각보, 찻잔 받침, 홑이불, 베갯잇 등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새로 만드신 물건들을 볼 때마다 식구들이나 친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바느질을 시작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놀랍게도 어머니 눈빛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서 집 생각 말고, 자식들 생각 말고, 아프다는 생각 말고, 죽기를 기다리는 거 말고, 나만 기다리는 거 말고, 다른 생각과 고민을 하고 할 일이 생겨서 어머니의 모든 신경이 살아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았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낸 내가 말할 수 없이 기특했다.
- <나는 참 늦복 터졌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시작한 지 두 달 된 어느 날, 며느리 이은영은 병상의 어머니가 마음 맞는 사람과 다섯 시간이나 눈빛을 빛내며 이야기 나눴다는 것을 듣게 된다. 이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머니 곁에 예전보다 더 자주 있게 된다. 와중에 생각해 낸 것이 어머니에게 글을 가르쳐 하고 싶은 말을 쓰게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제일 좋았을 때 1

어머니, 어머니는 살면서 언제가 제일 좋았어요?
나는 용택이 선생 된 때가 젤로 좋았다.
저 건너 밭에서 느그 시아버지하고 일을 하고 있는디
용택이가 어매, 어매 부르며 뛰어 오더라.
저놈이 미쳤나, 넘어지려고 왜 저렇게 뛰어 온다냐?하고는 일을 했다.
용택이가 오더니 어매, 아버지 나 선생 됐어요 하드라.
잉? 이게 뭔 소리여, 우리 용택이가 선생이 되다니.
정신이 하나도 없드라.
시상에 우리 용택이가 선생이 되다니, 나는 그때가 젤로 좋았다.
우리 용택이 선생 된 때가.
느그 시아버지가 키우던 소 한 마리 턱 하니 팔아서
용택이 광주양성소에 보냈다.
참말로 좋았제잉. - <나는 참 늦복 터졌다>에서

어머니는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아 오셨다. 공책과 연필을 내밀며 글씨를 배워보자는 며느리에게 어머니는 안 쓰시겠다고, 쓰고 싶은 말이 없다고, 바느질만 하자고 질색하신다.

이런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제일 좋았을 때'를 묻는 것으로 시작, 어머니가 하시는 말을 받아 적은 후 어머니에게 쓰게 하는 것으로 글쓰기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나는 용택이 선생 된 때가 젤로 좋았다.'

낼 모레면 구십이 될 어머니가 태어나 처음 쓴 글씨들. 이 열 몇 자 쓰는 데 어머니는 30분도 더 걸렸단다. 손에 힘이 없어서 글씨를 쓰는 손이 덜덜 떨렸단다. 이렇게 어머니의 글쓰기는 시작됐고, 며느리 이은영은 어머니의 나머지 이야길 들으며 녹음을 한다. 그리고 병원에서 돌아와 그것들을 글로 정리한다.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아온 김용택 시인의 어머니 박덕성씨가 내일 모레면 구십 나이에 글씨를 배워 처음 쓴 글.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아온 김용택 시인의 어머니 박덕성씨가 내일 모레면 구십 나이에 글씨를 배워 처음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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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명절에 식구들이 다 모였을 때 어머니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비로소 자식들로부터 독립이 되어 있었다. 자식들과 눈만 마주치면 아프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시던 어머니가, 이 자식 붙들고 신세 한탄, 저 자식 붙들고 신세 한탄하며 나 좀 봐달라고, 너희들이 나한테 왜 이러냐고, 제발 나 좀 봐달라고 매달리시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당신이 수를 어떻게 놨는지, 바느질을 어떻게 했는지 설명했다. 글쓰기를 어떻게 했는지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눈빛은 살아있었고 어머니의 몸짓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줄임) 어머니는 몸이 아프면서 잃었던 자존감을 바느질과 글쓰기를 하면서 화복하고 계셨다. 놀라웠다. 행복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어머니께 잘해야 한다는 무거운 부채감에서 벗어났다. 어머니와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어머니가 좋아서가 아니라,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서가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무서워서, 남편이 있어서 의무감으로 어머니께 잘하던 때도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나는 참 늦복 터졌다>에서

어머니의 글쓰기는 어머니의 자존감만 회복시킨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바느질과 글쓰기를 하기 전까지 "스스로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냥 이대로 시인의 아내로 살다가 늙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며느리 이은영은 내일 모레면 구십이 되는 연세에 한글을 깨치고, 그 침침한 눈으로 이불에 꽃잎을 흩뿌려놓으시는 어머니를 보며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은 "이 나이에 내가 뭘 못하겠는가?"로 이어진다. 서로를 챙기고 애틋해하는 고부간의 관계가 더욱 깊어졌음은 물론이다.

이 과정을, 그 마음과 바람들을 오롯하게 이 책에 담았다. 이야기는 순차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이어진다. 어머니가 글씨를 배우며 썼던 삐뚤삐뚤한 손글씨들과, 꽃이 수놓아진 바느질 작품들까지 넣었다. 처음에 몇 글자 되지 않았던 어머니의 손글씨 작품은 뒷 페이지로 가면서 글자수가 많아지고, 신변 이야기로 시작된 글들은 김용택 시인도 깜짝 놀랐다는 것이 믿어질 정도의 감성어린 시로 이어진다.

이런 변화를 느끼며 읽는 동안 감동이 계속됐다. 마치 한 가족의 사랑과 따뜻한 인간의 정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연속극을 보는 듯했다. 어머니 박덕성씨와 며느리 이은영이 주고받은 이야기도 뭉클한 감동으로 읽었지만, 며느리로서의 애환에 관한 부분들도 못지않게 뭉클하게, 눈물까지 찔끔 흘려가며 읽었다.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영원히 해답이 없을거라  생각한 적 있는 고부간 갈등도 얼마든지 풀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이었나보다. 시집 식구들의 사사건건 간섭 때문에 얼마 전 SNS까지 등지고 말았다는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와 시집 식구들에게 이 집 고부가 나눈 마음들이 전해지면 좋겠다. 그 친구에게 선물해야겠다. 5월에 꼭 읽어야 할 책으로도 추천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참 늦복 터졌다>(박덕성 구술·이은영 씀·김용택 엮음/ 푸른숲/ 2014-04-25/ 13,500원)



나는 참 늦복 터졌다 - 아들과 어머니, 그리고 며느리가 함께 쓴 사람 사는 이야기

이은영 지음, 김용택 엮음, 박덕성 구술, 푸른숲(2014)


태그:#김용택 시인, #박덕성, #고부갈등, #섬진강 시인, #바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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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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