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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보길대교와 보길도 
우측은 노화도 모습
▲ 노화도 전경 좌측은 보길대교와 보길도 우측은 노화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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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4일 오전 11시 30분]

전복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완도군 노화도를 들어가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먼저 완도 화흥포와 해남 땅끝 마을이다. 80년대 이후 노화도 산양진항과 해남 땅끝을 통해 교류가 주로 이뤄지고 있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이목항을 통해 목포와 왕래가 이뤄졌다. 목포의 물자가 이목항으로 들어온 것. 이목항이 섬과 섬을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며 보길도, 소안도, 넙도 등 주변 섬사람들의 생활중심지이자 상업중심지였던 것이다.

60~70년 당시에는 항해 장비가 없었고 낡은 목선을 타고 새벽 6시 완도항을 출발해 오로지 선장의 감으로 파도를 헤쳐 청산도, 소안도, 노화도, 보길도, 넙도, 해남 어란, 진도 벽파진 등 3개 군의 포구를 거쳐 오후 5시에야 목포항에 도착하는 11시간의 멀고 험한 뱃길이었다. 더욱이 하루 한 척밖에 없는 목선이 육지로 나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섬사람들은 꼭 타야했고 이러다 보니 76t짜리 여객선 정원이 80명인데 모든 섬을 돌고 나면 200명 정도가 승선하곤 했다.

저마다 보따리 하나씩은 들고 탄 까닭에 배 하중에 무리가 따른 채 목숨을 건 항해를 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풍경들이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선박 기술에 힘입어 100t 이상의 철선이 등장했고 속력도 한층 나아져 운행 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하지만 도로의 발달로 목포 항로는 폐항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추억 속의 뱃길로 남게 되었다. 예전에는 사람과 화물만을 싣고 다녔는데 이제는 카페리(차도선)가 등장하여 자동차를 그대로 선적한 채 섬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시대를 맞고 있다.

예전에 보길도 소안도 넙도 추자도 등 이 지역의 중심지 장이었다.
▲ 노화장 예전에 보길도 소안도 넙도 추자도 등 이 지역의 중심지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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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노화도는 작은 목포, 제2의 목포라고 할 정도로 섬과 섬을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며 주변 섬들의 물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지금이야 인구 7천의 소읍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2만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해상 도시였다. 개도 만 원 짜리를 물고 다녔다던 호시절이 있었다. 섬사람들이 노전배(노로 젓는 배), 돛단배, 똑딱선, 통통배를 몰고 모여들었던 노화장은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목리에 오일장이 생긴 시기는 50년대로 추정된다.

보길도 사람들은 장날에 수시로 운행되는 도선을 타고 노화장에 온다. 인근의 보길도, 소안도, 넙도, 횡간도, 흑, 백일도는 물론 멀리 제주의 추자도와 육지인 땅끝에서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자신들의 배를 타고 장에 온다. 특히 80년 어느 해 소안도 사람들이 노화장을 보고 돌아가다 배가 뒤집혀 한 마을 사람 2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사고는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금은 목포와의 여객선이 끊긴지 30년이 지나 도로 교통의 발달로 6시간 거리의 목포 보다 50분 거리의 해남 땅끝과 완도 화흥포으로 나간다.

노화도와 보길도는 하나
▲ 보길대교 노화도와 보길도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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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노화도는 섬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섬의 크기와 육지와의 적당한 거리, 해산물의 대량 생산하는 보배 섬의 대명사가 되었다. 필자가 전국의 섬을 수차례 답사를 했지만 노화도만큼 유력한 섬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노화도가 '제2의 목포'라 불리며 발전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입지적 조건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주변 섬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드넓은 '농토'가 있었다. 노화도는 섬이면서도 산지가 적고 전형적인 농촌 모습으로 도청들, 동천들, 충도들, 신양들 등의 평야를 가지고 있다. 농토와 함께 바다라는 농장에서 50-60년대 지주식 김 양식을 시작하였고, 70년대 초까지 일본으로 수출을 높은 소득을 올렸다. 얼마 후에 대일 수출이 중단되고 김의 과잉 생산으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다 미역양식이 시작했다. 김 양식과 미역과 청태(파래)도 많이 생산하였다. 특히 청태는 한때 전량이 충청도로 들어갔다 한다. 이렇게 노화도에서 생산된 수산물은 목포항을 거쳐 전국으로 팔려 나갔다. 그러던 중에 90년대부터 전복 양식으로 방향을 잡기 시작하였다. 바닷가에 사는 어민들은 80% 이상이 전복 양식에 매달리고 있고 전국 생산량도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농사짓는 동부 마을은 초등학교가 폐교되고 갈수록 사람이 없지만 전복하는 서부의 마을은 돌아오는 어촌이 되고 젊은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노화도는 400년 전 염등리에 전주이씨가 입도하여 제염(소금생산)을 하며 마을을 형성하였다. 노화란 지명은 지금은 농경지와 염전으로 변한 염등리와 등산리 앞 갯벌에 갈대꽃이 피면 장관을 이루어 노화란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넙도 주민이 이목리에서 일을 보고 집으로 가고 있다.
▲ 보길대교와 선외기 넙도 주민이 이목리에서 일을 보고 집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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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도의 관문은 예전에는 이목항이었으나 지금은 산양진과 동천항으로 그 중심이 옮겨갔다. 면소재지인 이목항은 상업적인 모습으로 발전해 있다. 여기는 보길도의 청별항 사이에 2008년 개통된 보길대교와 길이 620m의 다리가 있다. 이 다리의 등장으로 뭍에서 보길도를 찾는 여행객들은 시간과 뱃삯을 절반으로 줄이면서 노화도까지 아울러 돌아볼 수 있게 됐다. 보길대교의 가치는 아마도 천문학적인 유무형의 유익을 가져왔다.  이 두 다리를 일컬어 보길대교라고 하는데 지명의 유명세가 짙게 풍긴다. 노화도보다는 보길도가 훨씬 더 유명하다.

좌측에 제2의 목포 이목리가 희미하게 보인다.
▲ 노화 이목리와 보길도 청별의 일출 좌측에 제2의 목포 이목리가 희미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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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이목항은 그 풍요가 풀어놓는 흥겨움에 '작은 목포'라 불린다. 국가어항인 이목항은 전형적인 어촌형 소규모 도시다. 대부분이 식당과 횟집들이지만 특히 항구답게 다방이 많다. 이목항은 바다를 앞에 두고 건물들이 한 줄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모양새다. 식당이나 모텔 혹은 여관은 부두를 따라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다. 식당은 대부분 횟집이었다. 건물 뒤쪽으로 골목이 이어지면서 집들이 혹은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허름한 여관부터 제법 번듯한 모텔까지 숙박업소가 여럿 있다.

옛부터 노화와 보길도는 하나였는데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다. 이제 다리가 개설되어 주민들의 교류 특히 관광객들이 많아질 것이다. 보길도를 찾는 연간 30만 여명의 다도해 관광객과 도서주민의 불편 해소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곳 섬에는 '당'자가 붙은 마을 이름이 4개나 된다. 그만큼 이 섬은 당산제 신앙의 뿌리가 깊다는 의미다. 대당리의 경우에는 마을 뒤편 낮은 구릉에 위치한 나무숲 사이에 웃당이 있고, 여기로부터 마을 건너편 저지대에 아랫당이 있다. 대당마을은 돌담이 제법 많은 편이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탓에 골목도 좀 복잡하다. 노인정은 2층짜리 건물이다.

1560년경에 이곳에 입주하여 큰 당을 만든 후 대당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이곳 당산나무는 400여 년생이 되는 팽나무로 이곳을 성역화하여 고사를 지내며 풍어와 마을의 평년을 기원해 왔다는 전설이 있다. '거리제' 또는 '들제'라고도 하는 이 제사는 음력 정월 초하루 자정을 기하여 지내는데 소머리, 산채, 막걸리 등이 제물로 올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제물들은 모두 마을 공동 소유의 제사답에서 수확되는 쌀로 그 비용을 충당한다. 대당리에는 1884년에 세워진 관찰사 조강하 송덕비와 함께 7기의 지석묘군이 있는데 남방형 고인돌로 도서지방 선사시대의 연구에 기초자료가 된다.

표지석과 큰 집들이 보인다.
▲ 전복의 원조마을 미라리 표지석과 큰 집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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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도에서 이목항 다음으로 주목 받는 마을이 미라리이다. 이목항의 정반대 쪽에 위치한 노화읍 미라리. 일명 전복마을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두 개의 표지석과 한 개의 마을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전복마을 미라리'. 미라리 해안은 온통 갯벌이다. 드넓게 형성된 갯벌이 끝나는 지점에 항구가 형성되어 있다. 항구로서는 갯벌을 빼면 그다지 큰 편은 아니다. 해안은 전형적인 바닷가마을이다. 멀리서 봐도 방파제에는 배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해안도가 길게 이어져 있다.

해변가에 마을회관과 미라리사무소가 있다.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바닷가마을 풍경이다. 그러나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붉은 벽돌로 지은 아담한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으리으리한 집들로 다문 입이 쩍 벌어진다. 그리고 새롭게 지어지는 집들도 규모가 크기는 마찬가지다. 어엿한 부자마을이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전답이 별로 없는 관계로 가장 가난한 마을 중에 하나였다. 당초 이 마을은 1990년까지 김 양식을 통해 먹고사는 평범한 어촌이었다. 80년대에는 반짝 호황을 누리기도 했지만, 대일수출 감소 등으로 재미를 보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90년대 중반까지 4∼5년 동안은 파래자반을 내다팔아 짭짤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으나, 주변 지역에서 우후죽순처럼 파래자반 양식어가가 늘면서 경쟁력을 상실했다.

전복의 어린 새끼를 선별하고 있다.
▲ 전복 치패 공장 전복의 어린 새끼를 선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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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보잘 것 없는 어촌이었던 미라리를 되살린 것은 전복이었다. 1996년부터 몇몇 주민이 전복 양식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자 고향을 떠났던 사람이 하나 둘 돌아왔다. 외환위기 등으로 직장을 잃은 도시민이 귀향해 양식업에 뛰어들었다. 이어 90년대 중반부터는 전복 양식으로 전환했으며, 2002년부터 본격적인 소득이 발생하기 시작해 지금은 마을 주민 모두가 전복을 양식하고 있다.

비싼 가격이라 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바다의 산삼' 전복이 대량양식의 성공으로 대중화 길로 열린 데는 미라리 마을 청년들의 온갖 고생과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서민 누구나 전복을 먹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년 동안 자란 전복새끼 모습
▲ 전복치패 공장 1년 동안 자란 전복새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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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마을인 구목리는 양하리와 석중리와 함께 연간 약 수천톤의 납석을 생산하는 탄광지다. 주변은 온통 논과 밭 그리고 산이고 산 중턱에는 파헤쳐진 광산지대가 나타난다. 특히 옥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생산한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인데 골목의 돌담이 인상적이다. 잔돌을 어른 키 이상의 높이만큼 높이 세운 돌담들. 마을 골목길에 들어선 반공구호가 새겨진 표지석. 도로 쪽으로 나오면 담벼락은 이내 그림으로 덥여있다. 공공미술로 장식된 담벼락을 볼 수 있다. 이 앞을 지나는 도로가 '노화북로'다.

구목리는 원래 '교통의 요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는 동양 최대 납석광산이 있으며 연간 650,000t을 동남아에 수출하여 많은 외화를 획득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납석광산이 개발되어 광석을 일본 및 대만에 수출하고 있는 민경산업이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옥은 품질이 뛰어나 김, 전복 등과 함께 노화도의 특산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옥은 노화도의 자랑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산허리는 파헤쳐서 안타깝기도 했다. 개발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이면에 도사린 자연환경 파괴와 오염이라는 치명적인 오점을 애써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복을 선별하고 있는 모습
▲ 전복양식장 전복을 선별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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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도의 자연 환경은 김,미역, 전복 양식을 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갗추고 있는 곳이다. 바로 동남쪽에는 보길도와 소안도가 북쪽에는 횡간도가 서쪽에는 노록도와 넙도가 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 섬들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배를 안전하게 정박 시키면서 수백년 동안 삶의 터전 노릇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전복양식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 밀식과 대량의 양식으로 물의 흐름이 약해지고 바다의 오염으로 전복 폐사율이 30~40%에 이른다. 전복 연구소가 새롭게 생겨나고 연구를 진행해 하루 속히 대책이 필요한 시기다.

▣ 노화도 개요 

노화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읍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6°40′, 북위 34°10′에 위치하며 면적 25.01㎢, 해안선 길이 41㎞, 최고점 160m 개압산, 인구는 6,611명(2002년)이다.

지명유래

염등리 앞의 갯벌에 갈대꽃이 피면 장관을 이루어 갈대 노, 꽃 화자를 써 노화도라 하였다고도 전해온다.

☛ 노화도 가는 길
완도읍 화흥포항 청해진 카페리호 ↔ 노화읍 동천항 1일 수시로(50분 소요). 061-552-1171 해남 땅끝에서 정보고호 ↔ 노화 산양진 수시로 (50분 소요), 061-535-4268


태그:#노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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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이 기자의 최신기사책 '북한의 섬'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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