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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장애 4등급을 가진 오기채씨는 '군 인사법' 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 섰다.
 지난 11일, 장애 4등급을 가진 오기채씨는 '군 인사법' 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 섰다.
ⓒ 정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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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19일 오후 10시 44분]

지난 11일 오전 7시 31분. 여의도는 어두웠다. 국회의사당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국회 남문 앞은 더욱 그러했다. 지나가는 사람 없이 국회 앞은 적막했다. 온도계는 영하 4도를 가리켰다. 차가운 삭풍이 얼굴을 때렸다. 피켓 들고 있는 노인의 얼굴도 때렸다. '군 인사법 개정' '순직 안장'이라는 피켓을 든 남자. 오기채(70)씨는 그렇게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오기채씨는 현재 '장애 4급'이다. 2010년 추석 무렵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먼저 간 아들을 생각하다 잠깐 사이에 공장 기계에 한쪽 다리가 들어갔다. 그래서 잃었다. 아들을 잃고, 다리도 잃고, 행복했던 한 가정은 웃음을 잃어 버렸다.

아버지보다 먼저 간 아들. 오기채씨의 아들은 고 오종수 중위다. 2007년 아들이 이라크로 파병 갔다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현재 오 중위는 국군수도통합병원 냉동고에 있다. 2007년 사고 이후 7년 동안 유가족들은 시신을 화장하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다(관련기사: "이라크에서 안부전화 하던 내 아들이 왜").

그래서 나섰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차갑고 무거운 의족을 차고 국회로 향했다.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현재 2월 임시국회에 상정 중인 '군 인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아버지는 홀로 섰다.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오전 7시부터 오전 9시까지, 아버지는 그렇게 2시간 동안 버티고 서 있었다.

의혹만 낳은 국방부 합동조사

고 오종수 중위. 평화·재건 업무를 띠고 이라크로 향한 오 중위는 이역만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고 오종수 중위. 평화·재건 업무를 띠고 이라크로 향한 오 중위는 이역만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 박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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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종수 중위는 3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임관 뒤 의무행정장교(아래 의정장교)로 전북 익산의 7공수여단에서 군복무를 했다. 그 뒤 오 중위는 이라크 자이툰 부대의 6진 2차 교대 병력으로 2007년 4월 26일에 아르빌로 떠났다. 이라크 재건 사업과 의료지원 임무를 띠고 이역만리로 갔다. 그리고 5월 19일, 아들은 조국을 떠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 이후 오 중위의 죽음을 둘러싼 유가족들의 긴 싸움이 시작됐다.

당시 국방부는 오 중위가 총기를 이용해 목숨을 끊었고 한국시각으로 5월 19일 오후 6시 45분경(이라크 현지시각 오후 1시 45분)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당시 국내에서 군 복무 중이었던 오 중위의 동료 군의관은 오후 4시쯤(이라크 현지시각 오전 11시) 오 중위의 집과 전화번호를 묻는 군 당국의 전화를 수차례 받았다고 했다. 발표대로라면 군은 사망시각인 6시 45분 이후에 전화를 했어야 맞다. 그런데 군은 4시에 전화를 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약 2시간의 차이. 그래서 유가족들은 당시 전화통화 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사망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니 열람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아울러 사건현장을 촬영한 비디오 원본을 공개하라고 했다. 하지만 군은 공개를 거부했다. 오히려 군은 전화를 연결해 준 통신병의 실수로 치부했다. 단순한 '시간착오'였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기에 바빴다.

현장 훼손한 의무대장... "억울해서 화장 할 수 없었다"

'타살' 조사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총기사고인데도 군 조사단은 '탄약흔' 검사를 오 중위에게서만 실시했다. 국방부는'자살'이라고 결론짓고 수사를 진행했다.
▲ 사건 검증 '타살' 조사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총기사고인데도 군 조사단은 '탄약흔' 검사를 오 중위에게서만 실시했다. 국방부는'자살'이라고 결론짓고 수사를 진행했다.
ⓒ 박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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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들의 사건 현장 방문에서도 의혹은 계속됐다.

양○○ 상병은 고 오종수 중위를 목격한 최초 발견자였다. 양 상병은 회의시간인데도 보이지 않는 오 중위를 부대 이발소에서 발견했다고 진술했다. 오 중위는 이발소에 엎드려 있었다. 양 상병은 곧바로 행정보급관과 의무대장에게 보고했다.

이는 당시 행정보급관이었던 고○○ 상사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고 상사는 양 상병의 보고를 받자마자 이발소로 향했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오 중위를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고 상사는 쓰러진 오 중위를 보고 '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혹시라도 현장이 훼손될까봐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 상사와 같이 현장으로 향했던 의무대장의 진술은 달랐다. 의무대장은 이발소 실내가 '어두웠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실내가 캄캄해서 다른 건 못 보고, 오직 오 중위가 자고 있는 것만 봤다고 했다. 그래서 잠든 오 중위를 두 팔로 들어 올려 옮기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동일한 시각과 동일한 장소에서 세 사람이 똑같이 봤는데도 의무대장만 '다르게' 얘기했다. 실내가 '어두웠다'는 얘기만 되풀이 했다. 이에 오 중위의 고모부는 사건 당시처럼 현장을 재현해 달라고 조사단에 요구했다. 불을 끄고 켜가면서 의무대장의 진술을 확인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의무대장이 못 봤다던 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불을 켜나 안 켜나 오 중위의 피는 잘 보이기만 했다.

의무대장은 당황해 했다. 결국 '실내가 어두워 처음에는 피를 보지 못했다'는 의무대장의 진술은 사실이 아닌 셈이었다. 게다가 의무대장은 잠든(?) 오 중위를 옮기려고 해 현장을 훼손했다. 조사과정에서는 오 중위의 혈흔이 찍힌 의무대장의 발자국만 유일하게 발견됐다.

오기채씨는 이 사진을 보면 지금도 아들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오기채씨는 이 사진을 보면 지금도 아들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 박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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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군 조사단은 개의치 않았다. 증거와 상황이 명확하지 않은데도 수사를 진행해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의혹을 제기하는 유가족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살'이라고 되풀이했다. 유가족들은 말한다. 국방부 조사단의 수사가 부실했다고. 관련자의 진술도, 목격자의 증언도 무시하는 군 당국의 부실수사를 인정할 수 없다고. 

현재 2월 임시국회에서는 '군 인사법 개정안'이 계류중이다. 민주당 김광진 의원 발의로 채택을 기다리고 있다. 내용은 단순하다. "징집 또는 소집되어 병역의무를 이행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을 '순직자'로 예우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군인을 위해 기본적인 예우를 해달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제는 국방부가 대답해야

민주당 김광진 의원실의 고상만 보좌관은 '군 의문사'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우리 군은 현재 '군 의문사'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 자기 문제로 인지하고 있지 않다. 특히 국방부 고위관계자들이 이 문제에 무관심하다. 데려갈 때는 '내 자식과 같은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군 장병이 군대에서 목숨을 잃으면 나 몰라라 하는 국방부 고위 공직자들이 문제"라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수년을 기다렸다.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참다 못해 유가족들은 발의했다. '군 인사법 개정안' 을 만들었다. 하지만 국방부는 아무 반응이 없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함구하고 있다. 이 개정안을 수용할 수 없다면 다른 대안을 내놔야 하는데 무반응으로 일관하고만 있다.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유가족들은 여의도의 새벽을 열고 있다.


태그:#故 오종수 중위, #군 의문사 개정, #군 인사법, #고상만 보좌관, #민주당 김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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