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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바라보는 새누리당의 심정이 착잡한 것 같습니다. <오마이뉴스> 보도(<'교학사 완패' 개탄한 새누리 "전교조 테러 때문"> 기사)에 따르면, 6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보수성향 시민사회단체 합동 신년회에서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는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현실을 아주 비통하게 보고 있다"라고 하면서 "교과서를 하나 만들었는데 1퍼센트의 채택도 어려운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황 대표는 뜬금없이 "특별히 문화 예술이 가치중립적으로 이념에 휘둘리지 않도록 우리가 지켜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답니다. 구구절절 묻어나는 충심이 아름답긴 하지만, 황 대표의 모습은 애처롭기만 합니다. 안타깝게도 교학사 교과서는 1%가 아니라 거의 0%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역사교실'을 개설해 이끈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도 착잡하긴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이른바 '교학사 완패' 사태에 얼마나 격분했을까요. 김 의원은 황 대표와 함께 참석한 자리에서 "교육부의 엄정한 검정을 거쳐 통과된 역사 교과서를 전교조의 테러에 의해 채택 않는 나라는 자유 대한민국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미 예상한 반응입니다. 어김 없이 전교조를 동네북으로 삼은 그 고약한 말법 말입니다.

그래서입니다. 저는 전교조 교사입니다. 저는 지금 심한 모멸감으로 생긴 마음 속 흥분을 가누지 못한 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김무성 의원의 '전교조 테러'라는 말 때문입니다. 5만 명의 교사가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는 합법 교원 노조를 향해 '테러'를 쓰는 김 의원의 말법은 대체 그 의도가 어디에 있을까요. 교사 집단을 순식간에 테러리스트 모임 정도로 격하하는 그의 말법은 단순한 비유일 뿐일까요.

그리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어떤 식으로든 전교조에 부정적인 낙인을 찍으려는 의도가 너무 빤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더 흥분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친한 변호사 친구에게 전화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뒤 그에게 명예훼손죄가 성립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명예훼손죄가 성립하려면 불특정 다수인 공중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있어야 해. 김 의원이 공개석상에서 이야기했으니 이 조건은 성립됐고…."
"다른 게 또 있는가?"
"정 선생, '전라도 놈은 사기꾼'이라는 말이 명예훼손죄로 성립될 수 있겠는가?"
"글쎄…, 조금 힘들 것 같은데?"
"그렇지? 수 년 전에 <황산벌> 제작진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 적이 있어?"
"그래? 뭣 때문에?"
"영화에 벌교 사람들로 이뤄진 욕 부대가 나오잖아. 그걸 본 벌교 출신 서울 시민 셋인가가 자신들을 모욕했다며 고소장을 낸 거지."
"결과는?"
"기각됐어."


조금 허탈했다.

"김 의원의 '전교조의 테러'도 그럴 수 있겠네?"
"그럴 수도 있지만…"


친구는 '전교조의 테러'와 '전라도 놈은 사기꾼'이라는 말을 서로 비교했습니다. 후자에 비해 전자가 특정성이 상대적으로 강해 명예훼손죄가 성립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소주 한 잔만 얻어 마실 테니 필요하다면 대신 고소해 주마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성에 차지 않아 인터넷으로 <형법>을 찾아보았습니다. <형법> 제307조는 명예훼손죄를 공연히 사실이나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허위적 사실뿐만 아니라 사실까지도 명예훼손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유포한 내용이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명예훼손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김 의원이 말한 '전교조의 테러'는 확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사실이냐 허위의 사실이냐 여부를 가리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단해 보면 허위의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식적으로 따져 보면 됩니다.

살풍경한 시국입니다. 이런 시절에 정부 부처와 집권 여당이 공공연히 그 뒷배를 봐 주는 교과서 채택 과정에 '테러'를 가하는 간 큰 전교조 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떤 미지의 '외압'에 전교조 본부(또는 지부나 지회, 분회)나 전교고 소속 교사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을 가정해 보십시오. 교육부나 사법기관, 모질기 짝이 없는 주류 보수 언론이 조용히 넘어갔을까요.

'전교조의 테러'가 허위의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김 의원의 또 다른 발언을 통해서도 방증됩니다. 그는 교학사 교과서가 교육부의 엄정한 검정을 거쳤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교육부는 오히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구하기를 자임한 '수호천사'였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입니다. '물귀신' 작전으로 다른 7종 교과서를 물고 늘어지기도 한 주인공도 교육부가 아니던가요. 교육부가 교학사 교과서를 위해 한없는 '온정'을 베풀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엄정한 검정을 거쳤다니요.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입니다.

지나가는 소를 웃게 만드는 건 황우여 대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과서를 만들었는데 1%의 채택도 어려운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요? 있었습니다. 그것도 바로 옆나라였습니다. 일본 극우단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서 만든 후쇼샤 판 역사교과서가 그 주인공입니다. 후쇼샤 판 역사교과서의 첫 해 채택률은 1%를 채 넘지 못한 0.039%였습니다.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최초 검정 통과 후 후쇼샤 판 역사교과서보다 더 친일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오죽하면 교학사 교과서의 검통 통과에 대해 '제2의 국치'라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사실 관계 오류를 비롯해 왜곡과 편향의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상상'과 '발명'이라는 조롱이 나오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저들은 오히려 큰소리로 부르댑니다. 그중에서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 중 한 명인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입니다. 예의 합동 신년회에서 이 교수는 '교학사 교과서 완패'를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당한 것으로 규정했다고 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양심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인데, 그마저도 부정하는 저들의 잔혹함과 전체주의적인 모습이 국민들 앞에 드러나면서 국민들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교과서 '불량'과 '날림' 공사의 주인공 중 한 명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지금 이 교수는, 다른 교과서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오류 건수, 검정 통과 이후에도 수백 건이나 나온 오류와 왜곡의 사례들만으로 국민과 학생들 앞에 백 번 사과해도 모자라는 책임의 장본인이 아닐까요.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이 교수의 작렬하는 '뒤끝'은 다른 역사교과서를 향합니다. 그는 다른 역사교과서들이 "북한을 옹호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전교조가 원하는 교과서라는 것을 밝혀내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전교조 = 북한을 옹호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집단'이라는 프레임으로 전교조를 흠집 내려는 전형적인 책동입니다. 이 교수에게서도 전교조를 향한 명예훼손 혐의가 짙게 풍겨나는 이유입니다.

김 의원이나 이 교수의 발언에 대해 전교조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대응책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으나,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전교조는 김 의원과 이 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 바랍니다. '전교조의 테러'와 같은 말에서 현장 교사들이 느끼는 격한 반응들만으로도 명예훼손죄는 충분히 성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지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해야 합니다. 전교조는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과 이명희 공주대 교수를 즉각 고소하십시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전교조의 테러',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 #황우여 대표, #이명희 공주대 교수, #명예훼손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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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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