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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종이로 만든 우산-기자 주)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 10)


1958년 가을이었다. 수영 부부는 둘째 아들 우와 함께 광화문 근처에서 과외 공부를 하는 큰아들 준을 기다렸다. 시계를 보았다. 아직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수영 부부는 조선일보사 건물 모퉁이에 있던 극장으로 갔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1954)이 상영되고 있었다. 수영 부부는 둘째 우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수영 가족은 영화를 잘 보고 나왔다. 극장 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수영은 갑자기 들고 있던 우산으로 아내 현경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대로변이었다. 동행한 둘째 아들 우는 고작 다섯 살이었다. '어린 놈'(2연 4행)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요령부득의 상황에 울음을 터뜨렸다. "비 오는 거리에는 / 40명가량의 취객들이 / 모여들었"(2연 5~7행)다. 난데없는 이 폭력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시상의 최초 도입부에 뜬금 없는'살인'(3행)이 나온다. 그것은 일종의 아포리즘(aphorism) 같다. 누가 '살인'을 하는가.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1연 1~3행) 한다. 이 '살인'은 아마도 수영 부부가 함께 본 <길>에서 빌려 온 것이리라.

영화의 주인공 잠파노는 차력사다. 그에게는 모자라지만, 착하기만 한 조수 젤소미나가 있다. 돈을 주고 산 노예 같은 소녀였다. 잠파노는 가슴을 묶은 쇠사슬을 끊고, 젤소미나는 그 옆에서 춤을 추었다. 잠파노는 젤소미나를 학대하고, 젤소미나는 그런 잠파노를 점점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잠파노는 옛 친구이자 곡예사인 나자레노와 싸우다 그를 죽이고 만다. 우연히 이 광경을 본 젤소미나는 충격에 정신이 이상해진다. 그뒤 젤소미나는 조수 노릇을 제대로 못하게 된다. 잠파노는 잠든 젤소미나 몰래 그녀를 버리고 떠나버린다.

얼마 후 젤소미나는 병들어 죽는다. 젤소미나의 죽음을 알게 된 잠파노는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에서 뜨겁게 오열한다. 밀려오는 파도만큼이나 큰 참회의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젤소미나는 폭력적인 학대 속에서도 잠파노를 사랑했다. 잠파노는 그런 그녀가 혼란스러웠을까. 혹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여기는 자신을 참을 수 없었을까. 살인을 저지른 잠파노는 아마도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 충분한 각오"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남'뿐이었을까.

젤소미나를 학대한 것은 그 스스로를 향한 학대였다. 친구 나자레노를 죽인 것은 그 자신을 죽이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과 친구를 죽임으로써 가학적인 그 자신을 제거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바닷가의 오열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수영은 잠파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사디스트를 품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마조히스트를 데리고 다닌다. 학대하고 학대 당하는 그 모순적인 순환 속에서 사람은 자신의 밑바닥을 보려 한다. 그 벌거벗은 모습을 보게 될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수영은 "우산대로 / 여편네를 때려눕"(2연 2행)힘으로써 잠파노가 되고 싶었다. 그는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자신의 추악한 본질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니 경악스러운 폭력의 현장에서 우는 '어린 놈'(2연 4행)은 차라리 꼭 있어야 하는 훌륭한 '조연'이었다.

'죄'는 '벌'을 가져온다. 수영은 '죄'를 저질러 '벌'을 받으려 했다. 그럼으로써 추악한 자신의 내면을 정면으로 응시하고자 했다. 속물이 되어가는 자신을 철저히 파괴하여 갱생의 경지로 도약하기를 바랐다. 수영은 한 낙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갱생(更生) = 변모(變貌) = <자기 개조>생리의 변경 = 력(力) = 생(生) = 자의식의 괴멸 = 애정 ('시작 노트 3', ≪김수영 전집 2 산문≫, 436쪽)

그러나 '갱생'은 쉽지 않았다. '괴멸'되었어야 할 '자의식'은 여전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2연 8~9행)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2연 10~12행)을까 저어했다.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2연 15행) 온 것을 아까워했다. "여편네를 때려눕"히긴 했으나 '갱생'과 '변모'는 일어나지 않았다.

수영은 그 가을날의 일을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 아내 현경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상상해 본다. 파도 앞에서 어깨를 들썩이던 잠파노처럼, 수영도 울음을 터뜨렸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그것은 잠파노의 것과는 달랐으리라. 잠파노 같은 참회의 오열이 아니라 여전한 자신을 향한 자기 모멸의 몸부림이었겠기에 말이다. 수영에게 그것은 예기치 못한 '벌'이었다. 하지만 그 '벌'을 받으면서 수영은 또 다른 '갱생'을 도모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죄와 벌>, #김수영, #영화 <길>, #페데리코 펠리니, #잠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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