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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에도 설날 아침 설빕을 차려입은 소녀들이 동네마당에서 널뛰기를 하고 있다. (1953. 2.)
 한국전쟁 중에도 설날 아침 설빕을 차려입은 소녀들이 동네마당에서 널뛰기를 하고 있다. (1953. 2.)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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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사람

사람이 늙는 것을 좋게 말하여 원숙(圓熟), 또는 완숙(完熟)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늙는다는 것은 낡게 되는 것으로, 사람은 늙게 되면 자연히 생동감이 떨어지고 너절해 지기 마련이다. 곧 늙는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의 날이 가까워지는 것으로 죽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나는 40여 년 서울을 근거지로 살다가 학교를 조기 퇴직하고 생면부지의 강원도 산골마을로 내려 왔다. 그때 나는 매화산 전재고개를 넘으면서 많은 것을 버리기로 작정했다. 자연히 이전 도시적인 삶의 습성과 그동안 관계를 지속해 오던 이들과의 단절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경조사나 이런저런 모임 참석을 극도로 자제했다. 교통도 불편하거니와 한 차례 다녀오면 그 후유증이 오래 가기 마련이고 내가 산골마을로 내려 온 의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서울나들이를 했지만 차차 세월이 지날수록 그 빈도가 줄어들었다. 이즈음에는 거의 모든 모임에 참석을 자제하고 있지만 그래도 청우회 모임만은 빠지지 않는다. '청우회(淸友會)'는 가난했던 고교시절에 종로구 청진동 <동아일보> 세종로보급소에서 만났던 네 명의 친구들이 일 년에 서너 차례 만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다.

그동안 우리 네 사람은 부정기적으로 만나 오다가 10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만나는데 몇해 전 모임의 이름을 짓자고 하여, 내가 "우리 네 사람은 청진동에서 만났으니 청우회가 어떠냐?"고 제의하자 모두들 좋다고 하여 그렇게 결정되었다. 우리는 주로 옛 추억이 담긴 청진동 부근에서 만나는데 일 년에 한 번 꼴은 내가 사는 마을에서 만난다.

50년 전 우리들은 모두 까까머리 고교생 신문배달원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자급자족했다. 그때는 모두 같은 신분이었지만 이후 서로 가는 길은 달랐다. 평생 목회자의 길을 걷는 구본우 목사, 해군 준장으로 예편한 노진덕 제독, 기업인이 된 제주도 출신의 현동훈 회장, 교단에서 3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친 뒤 퇴직해 강원도에서 글쟁이로 사는 나,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부지런히 살아왔고 현재도 열심히 살고 있다.

50년 만에 강원도 횡성 자작나무 숲 미술관에서 만난 청우회 친구들(왼쪽부터 구본우 목사, 현동훈 회장, 필자, 노진덕 제독)
 50년 만에 강원도 횡성 자작나무 숲 미술관에서 만난 청우회 친구들(왼쪽부터 구본우 목사, 현동훈 회장, 필자, 노진덕 제독)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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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기는 빈교행(貧交行)

우리들은 만나면 자연스레 50년 전 서울의 북촌과 서촌의 골목길을 누볐던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기 마련이다. 대문 틈으로 신문을 넣다가 개한테 바짓가랑이 물린 이야기, 보급소 조장의 횡포 이야기, 어느 집 독자가 베풀어준 온정 이야기 등, 가난했지만 꿈을 먹고 살았던 그 시절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모임 시간 내내 즐겁다.

지난 연말 망년회 모임을 끝내고 헤어지는데 동훈이가 나에게 말했다.

"박도, 미안해. 이번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는 서른 권밖에 못 샀어."
"무슨 소리야. 그게 어디 적은 부수야."

그는 내가 책을 낼 때마다 상당량의 책을 그것도 꼭 시중 서점에서 사주고 있다. <영웅 안중근>은 수백 권을 사서 친지에게 나눠준 모양이다. 옛날 청진동 골목에서 호떡 한쪽을 나눠먹던 그 우정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그 친구는 나에게 계속 좋은 책을 쓰라고 아낌없이 성원 하고 있다.

그날 망년회 모임을 마치고 청량리 역에서 원주로 내려오는 밤 열차를 타고 원주 내 집으로 돌아오는데 두보(杜甫)의 '빈교행(貧交行)'이 떠올랐다.

손을 뒤집어서 구름을 만들고 손을 엎어서 비를 만드니, (翻手作雲覆手 雨)
그 어지럽고 경박한 사람들을 어찌 구태여 다 헤아릴 수 있으리오. (紛紛輕薄何須數)
그대는 관중과 포숙의 가난한 때의 사귐을 보지 못하였는가? (君不見管鮑貧時交)
이 진정한 우도(友道)를 지금 사람들은 버리기를 흙같이 한다. (此道今人棄如土) 

한 친구(문학평론가 황현산)는 말했다.

"기억과 그리움의 샘이 마르지 않는 사람의 땅은 늘 기름지다. 그 땅에 관해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태그:#청우회, #우정, #신문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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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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