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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에는 대웅전만 있는 게 아니다

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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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하면 사람들은 대웅전을 먼저 떠올린다. 그것은 대웅전이 고려 말의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기 때문이다. 1937년 대웅전을 수리하면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을 통해 이 건물이 1308년(충렬왕 3년) 지어졌음이 확인되었다. 그 후 수덕사 대웅전은 목조건축사에서 더욱 중요한 건물이 되었다. 왜냐하면 대웅전의 건축 연대를 통해 다른 건축의 조성 연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네 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 건물이다. 단순하면서도 웅장한 외관을 가졌지만 세부적으로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정면 세 칸의 빗살문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측면의 가구(架構)에서는 기능성과 예술성이 결합된 뛰어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측면 벽에는 원래 수생도·나한도·극락조도 같은 아름다운 그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능혜스님과 다담을 나누는 오마이뉴스 기자들
 능혜스님과 다담을 나누는 오마이뉴스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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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과 3층석탑을 보고 나서 우리는 수덕사의 강당에 해당하는 황하정루(黃河精樓)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능혜(能慧)스님과의 다담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능혜스님은 현재 수덕사 포교연수국장을 맡고 있는 비구니 스님이다. 그는 우리에게 차를 한잔씩 대접하면서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이야기를 해 준다. 스님이 출가한 계기가 무엇인지 하는 짓궂은 질문에도 스스럼없이 대답을 한다.

중생의 얼굴에서 고뇌를 보았다면, 스님의 얼굴에서는 평안을 보았기 때문이란다. 지리산 대원사로 출가해 해인 문중 스님인데, 수행 차 이곳 덕숭 문중의 수덕사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능혜 스님은 비구니 스님인데도 낯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아이들도 좋아해서 중학생(중3)을 만나자 자신도 "중인(중2)데" 하면서 좌중을 한 바탕 웃긴다. 차공양을 마치고 나는 황하정루의 1층에 있는 성보박물관으로 향한다.   

성보박물관에서 만난 경허선사의 마음

근역성보관이 있는 황하정루
 근역성보관이 있는 황하정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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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성보박물관을 그냥 지나친다. 그러면 수덕사를 절반만 알고 가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성보박물관에 조각과 공예, 회화, 전적과 현판, 고승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덕사 성보박물관의 공식 명칭은 근역(槿域) 성보관이다. 여기서 근역은 무궁화 영토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은 한국 근대 선불교의 맥이 경허-만공 스님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박물관에는 경허(鏡虛·1849~1912)와 만공(滿空·1871~1946) 두 스님의 유물이 남아 있다. 경허선사는 조선말기 침체된 선불교를 중흥시킨 스님이다.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삶을 통해 선불교를 진작시키려고 했던 스님은 그 때문에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걸림이 없이 자유롭게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선사의 문하에서는 수월·혜월·만공·한암스님 같은 선지식이 배출되었다.

경허선사 유묵
 경허선사 유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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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의 유품으로는 친필이 두 점 남아 있다. 하나는 무이당(無二堂)이라는 글씨고, 다른 하나는 심우도(尋牛圖) 6곡 병풍의 글씨다. 무이당은 <법화경>의 무이역무삼(無二亦無三)에서 따온 말이다. 성불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요, 둘도 셋도 없음을 뜻한다. 오직 하나뿐인 깨달음을 향해 매진하는 수행자의 굳은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심우도는 소를 찾는 수행의 10단계를 표현한 그림이다.

이곳 6곡 병풍에는 그 중 6단계만이 표현되어 있다. 제1심우(尋牛·동자가 소를 찾아 산속을 헤매다), 제2견적(見跡·소의 발자국을 찾다), 제3견우(見牛·소를 발견한다), 제4득우(得牛·소를 붙잡다), 제5목우(牧牛·소를 길들이다), 제6기우귀가(騎牛歸家·소를 타고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오다), 그리고 매 단계마다 그림 위에 경허선사의 해설을 써 넣었다.

그 해설은 심우에 대한 선사의 견해고 해석이다. 매 단계의 끝에는 8자로 된 경구가 적혀 있다. 제3견우의 마지막 부분에서 '남산북수일반불봉(南山北水一返不逢)'이라는 글자를 확인할 수 있다. '남산과 북수는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게 때가 있음을 표현한 말이다. 제2견적에서는 강남풍월이라는 글자를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 내부의 조도가 낮아 글자를 모두 읽어낼 수 없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만공스님의 거문고와 세계일화 이야기

만공선사의 누비동방
 만공선사의 누비동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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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스님의 유물은 경허스님에 비해 훨씬 많다. 그것은 만공스님이 수덕사 중심의 덕숭문중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만공스님은 일제강점기 한국불교의 왜색화를 막기 위해 선학원을 설립했을 뿐 아니라 스님들의 복지에도 신경을 썼다. 만공스님이 남긴 유물로는 누비(縷緋)동방·거문고·유묵과 글씨·인장 등이 있다.

누비동방은 누덕누덕 기워 만든 가사를 말한다. 누비가사 앞에는 나무와 짚으로 만든 신발이 한 켤레씩 있다. 거문고는 스님이 의친왕 이강(李堈)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문화재자료 제192호다. 거문고 뒷면에 조선 후기 대감식안(大鑑識眼)이던 육교(六橋) 이조묵(李祖黙·1792~1840)이 지은 찬문(撰文)과 만공선사의 게송(偈頌)이 적혀 있다. 게송은 1937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만공선사 거문고
 만공선사 거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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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는 무슨 곡조인가                一彈云是甚麽曲
바로 체(體)가 현현한 곡이로다.                               是體玄曲也
한 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는 무슨 곡조인가                一彈云是甚麽曲
바로 한 구절(句)이 현현한 곡이로다.                        是句玄曲也
한 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는 무슨 곡조인가                一彈云是甚麽曲
바로 진실(玄)이 현현한 곡이로다.                           是玄玄曲也  
한 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는 무슨 곡조인가               一彈云是甚麽曲
바로 석녀의 마음속에 있는 시간을 초월한 곡이로다.  是石女心中劫外曲也

아하.                                                                 咄

호서 덕숭산 금선동 소림초당                                湖西德崇山金仙洞小林草堂
불기 2964년                                                       佛記二九六四年

만공선사의 '세계일화'
 만공선사의 '세계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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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글씨는 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만공선사가 썼다. 스님은 시들어 떨어진 무궁화꽃을 들어 먹물을 적신 다음 '세계일화'라고 쓰고는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내렸다고 한다. 

"너희들이 보다시피 세계는 한 송이 꽃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오,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다.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오. 이 세상 저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이 조선이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중심이 될 것이다."

경허선사는 네 명의 제자를 두었다. 수월음관(水月音觀·1855~1928), 혜월혜명(慧月慧明·1861~1937), 만공월면(滿空月面), 한암중원(漢巖重遠·1876~1951)이 그들이다. 그중 법맥은 만공선사를 통해 벽초(碧超)·원담(圓潭)·송원(松原)스님으로 이어진다. 현재는 송원스님이 덕숭총림의 4대 방장이다. 만공의 다른 맥은 금오(金烏·1896~1968)선사를 통해 속리산 법주사로 전해진다. 그리고 경허의 또 다른 한 맥은 한암선사를 통해 오대산 월정사로 전해진다. 

불교조각과 공예 그리고 기와

석조 불두
 석조 불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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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조각으로는 불상과 나한상·동종이 있다. 불상으로는 목조 관세음보살좌상·철조여래좌상·금동여래좌상·소조 관세음보살좌상·석조불두 등이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철조와 목조불상에 금칠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화려한 불상이 되기는 했지만 재질이 가지는 본연의 맛은 덜한 느낌이 든다. 그 중 내 눈을 끄는 것은 석조 불두다. 나발과 육계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눈썹과 코까지 마모되었지만, 불상이 보여주는 고뇌의 표정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

나한상은 조선 후기 작품으로 돌로 만들고 그 위에 회칠을 했다. 홍성 용주사 칠성각에 모셔져 있던 것을 이곳 성보박물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머리에는 천의를 쓰고 손을 공손하게 가슴까지 올린 모습이 상당히 인간적이다. 양옆에 있는 나한은 동굴 안에 좌정한 형식을 취했는데, 역시 인간적인 모습이다. 예술성보다는 종교성을 먼저 생각한 작품이다.

향천사 범종
 향천사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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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로는 불구(佛具)와 제기·동종·편액 등이 있다. 불구와 제기로는 향로·가마·방화용 수조, 화반·목조 극락조가 있다. 동종은 향천사(香泉寺) 범종으로 몸통의 명문을 통해 강희 41년(1702년·壬午) 3월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용뉴는 8개의 발을 가진 쌍룡으로 되어 있다. 상대에는 범자문, 그 아래에는 4면에 9개씩 36개의 종유가 있다. 중대에는 시주자의 이름이 있고, 하대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종탁도 보인다.

편액으로는 추사의 친필인 무량수각(無量壽閣)과 시경루(詩境樓)가 있다. 이것은 원래 화암사(華巖寺)에 있던 것으로, 추사 김정희는 어릴 때부터 이 절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 외 화암사 요사채에 걸려 있던 '화암사' 편액, 만들어진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불유각(佛乳閣) 편액 등이 있다.

연화문 수막새 1
 연화문 수막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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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문 수막새 2
 연화문 수막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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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나는 이곳에 전시된 기와를 통해 수덕사의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 기와는 연화문 수막새가 가장 많고, 귀목문 수막새, 화엽문 수막새, 명문이 새겨진 암막새가 몇 점 있다. 이들 기와를 알면 편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내 안목이 그 정도는 되질 않는다. 자료를 찾아보니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귀목문의 눈과 연화문 꽃잎의 양감이 아주 강하기 때문이다.

나는 근역성보관을 떠나며 생각했다.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한국의 선불교를 이끈 큰 도량인 수덕사가 그 위상에 비하면 성보박물관의 규모나 전시유물이 빈약한 편이라고.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이라는 소전 손재형 선생의 글씨처럼 선불교의 맥이 경허 만공으로 이어졌는데도 말이다. 지금은 왠지 선불교가 해인문중을 중심으로 더 번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덕숭문중의 큰스님들이 선지식을 배출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해야 할 것 같다.


태그:#수덕사, #근역성보관, #경허선사, #만공선사, #불교조각(공예)과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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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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