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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관계는 계약관계다. 갑과 을 상호간에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계약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갑을은 단순한 계약관계가 아닌 '주종관계'다. 그래서 과도한 특권을 행사하는 갑의 행태가 중요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과도한 '갑질'이 문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관계라는 것은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과도한 '갑질'을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였던 '을'들의 체질화된 태도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갑을관계가 제대로 개선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최근 경기 평택비정규노동센터에서 평택지역 중·고등학생 5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노동자'에 대한 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노동자는 OOO다'라는 질문에 '거지' '장애인' '못 배운 자들' 등과 같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이렇게 노동자를 차별받는 존재로 인식하는 학생들이 노동자가 되었을 때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권을 주장하기 보다는 공부 못해 '노동자'가 된 자로서 부당한 차별을 운명인양 인내할 가능성이 크다.

노동자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부정적으로 답한 학생들의 글
 노동자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부정적으로 답한 학생들의 글
ⓒ 평택비정규노동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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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배운 노동자이기에 차별받아 당연?

학생들이 교과서를 통해 이렇게 배우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부모와 어른들의 생각이 이러했을 것이다. 구해근이 쓴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책을 보면 "가난해서 못 배웠기에 이토록 고통스런 노동을 할지언정 이제는 못 견디겠다"는 1980년대 노동자의 글이 나온다. "못 배웠기에" 어느 정도의 불공평한 대우는 받아들이겠다는 이야기다. 70~80년대 노동자들의 수기나 민주노조의 공개성명서도 못 배운 노동자로 받는 고통을 보여주는 글들이 많다고 한다. 부모세대의 이러한 노동자 인식이 바뀌기보다는 여전히 계속되어왔고 자식세대인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배운 것이다.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이런 부정적인 노동자 인식이 전통적인 유교적 신분질서의 유산임을 말한다. 전통적인 신분질서는 일제와 해방을 거치면서 와해되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신분 체계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노동을 천시하는 봉건적 신분질서가 여전히 영향을 미쳐 '못 배운 천한 노동자'라는 인식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갑을관계는 중세 양반사회의 변형된 모습이라고도 하겠다.

현재 갑을관계는 과거 양반사회의 변형

서양에선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불평등한 신분체제를 바꾸려는 민주혁명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혁명대신 묘한 방식으로 신분체제를 극복하였다. 반상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양반이 되는 방식으로 반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즉, 조선 후기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를 얻게 된 평민들이 등장하면서 사회구조에도 변동이 예고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새로운 사회관계를 모색하기 보다는 양반 가문에 편입되기를 희망했다. 일인 학자 사카다 히로시의 대구 지방 호적을 분석한 자료를 보면 17세기말(1690)에 양반, 상민, 노비 호의 비율은 9.2%, 53.7%, 37.1%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1858)에 오면 70.3%, 28.2%, 1.5%의 비율로 변화했다. 양반만 정력이 좋아 더 많은 자식을 낳은 결과는 아니다. 평민과 노비계층이 양반의 족보에 편입을 한 덕분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후손이 아닌 사람을 보기 힘들다.

하층의 편입을 허용한 조선의 지배계층은 이러한 면에서 매우 너그러웠다고 하겠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양반이라는 상징적 권력을 계속 유지하게 해주었다. 과거에 족보 앞에선 보수나 진보나 매한가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느 가문의 몇 대 후손이라는 가문의 역사 앞에선 머리를 조아리고 자랑스러워하는 태도는 마찬가지라는 말이었다.

한국사회의 특성이라고 말해지는 강한 상향 평등의식은 여기에서 나온다. 나도 양반이 될 수 있다는 동등의식은 한편으로 양반이라는 특권적 존재를 인정하고 유지시켜 주는 배경도 된다. 그리고 그 양반적 지위에 올라가고자 하는 강한 열망은 결국 그 통로인 교육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입시와 사교육 전쟁의 모습이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갑을관계의 연쇄

이런 사회 풍토에서 그 지위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은 종속적인 위치를 스스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학생들 생각처럼 못 배우고 공부 못한 노동자는 거지이고 장애인이고 이주노동자와 같은 외국인이다. 그 차별에 대한 인식만큼 반대로 갑이 되려는 열망도 강하다.

김밥 할머니가 평생 아끼고 모은 돈을 결국엔 학교재단에 기부하는 까닭도 이런 '못 배운 한'이다. 못 배웠다고 받는 차별은 당연한 것이니 그 차별의 해소는 배워서 남부럽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막장 드라마에서 보는 방식이다. 차별의 철폐가 아니라 차별받지 않는 위치에 올라서는 것이 목표가 된다. 그래서 그 위치에 올라서면 을을 이해하기보다는 고생한 만큼 '갑질'하는 권리를 누리려 한다. 또한 을로서 당한 수모를 푸는 방법도 '갑질'이 된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백화점에 가서 진상 고객이 되어 풀고 있다는 고백은 이를 말해준다.

그러다 보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촘촘한 갑을관계의 사슬이다. 그 대단한 '갑질'을 했던 남양유업 영업사원도 회사 내에선 따지고 보면 을에 불과했다. '슈퍼갑'이라 볼 남양유업 회장은 끝내 공식석상에서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사회에서 슈퍼갑이라 할 만한 새누리당 국회의원도 결국 내부에선 한낱 을임을 보여준 사례도 있다. 김무성 의원의 'NLL대화록 사전입수' 발언의 유출자로 지목된 같은 당 김재원 의원의 휴대전화 문자가 그렇다. "저는 요즘 어떻게든 형님 잘 모셔서 마음에 들어볼까 노심초사중이었는데"라는 문자 메시지와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은 솔직히 조폭관계를 연상시킨다. 사회에서 갑인 국회의원도 그 내부에선 '두목갑'과 '졸개을'이 있는 셈이다. 하기는 여왕개미와 일개미의 관계로 묘사되는 박근혜 내각의 모습은 전형적인 갑을관계 모습이다. 한국사회는 소수의 '로얄갑'을 제외하면 다 을인 셈이다. 그 을들이 슈퍼갑에 조금이나마 더 가까운 자리로 가고자 피튀기는 경쟁을 하는 사회다.

누구나 을로선 평등한 것이 민주사회

'갑을' 문제를 갑이 되는 것으로 해소하려는 노력은 결국 종속적인 갑을관계를 존속시킬 뿐이다. 그곳에서 갑은 또 다른 갑을관계의 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 민주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대기업 임원이라도 자기네 상품을 파는 데는 을이 되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따지고 보면 국민이라는 보통명사 앞에 을이지 않은가. 민주사회란 누구나 갑이 아니라 을로서 평등한 사회다.

을이 갑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을 그 자체로서 당당할 수 있을 때 갑을관계는 말 그대로 종속이 아닌 계약관계가 된다. 그럴 때 진정으로 평등한 민주사회가 되고 노동자는 부끄러운 이름이 아닌 사회를 책임지는 존재가 된다. 노동자가 없이 사회가 굴러갈 수 있는가?

갑을관계가 제대로 서기 위해선 그동안 인내만 해왔던 을들이 더 많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기내 승무원을 폭행했던 '라면상무'건도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아니었다면 무마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니 이 땅에서도 서비스 이상의 인격무시적인 요구는 고발되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한다. 그래야 '갑질'이 멈추고 정상적인 갑을관계가 된다. 뒤늦게 분출되고 있는 갑을 문제는 갑을관계가 바로서기 위한 진통이라는 생각이 들어 반갑다. 을이 당당해야 민주주의가 바로 선다.


태그:#갑을관계, #양반사회, #갑질, #슈퍼갑,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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